제535화
534화-운주 (6)
“후우…….”
화산파의 영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선 설천위는 하얗게 흩어지는 입김을 바라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 정도 높이면 언제나 춥네.”
입김이 나올 정도의 추위가 사시사철 지속된다는 건 나쁘지 않은데.
바람 쐬고 싶을 때 딱 좋겠어.
입김이 다시 바람에 휩쓸려 등 뒤로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설천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흐름을 느꼈다.
이 거대한 산맥을 타고 흐르는 모든 기(氣)를.
자연에 뿌려진 모든 영(靈)을.
나 자신을.
극도로 확장된 감각 속에서 기어코 이질적인 것이 걸려든다.
몇 번의 전투로 쫓아냈던 것들이 기어코 다시 기어 올라왔다.
다수의 강시와 무인, 그리고 소수의 혈귀로 이루어진 병력.
혈교다.
전가라는 자금줄도 틀어막아서 여유가 없을 텐데, 참 독한 놈들이다.
각 지부가 독자적인 자금력을 확보해서 운용되나?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데.
짧은 감상과 함께, 기어코 화산 전체를 자신의 감각 속에 넣은 설천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저 밑에서 들리는 포효와 함께, 화산파의 무인과 술사들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화산을 뒤흔드는 포효엔 진득한 피 냄새가 가득했다.
요동치는 살기와 투기 속에서 설천위는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충돌한 화산파의 무인들과 무림맹의 무인들이 이를 악물고 자리를 사수하는 것이 보였다.
그 사이에 끼어든 술사들이 열심히 혈귀와 강시들을 몰아내려 하지만, 역부족인 듯했다.
다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화산파와 무림맹의 무인들 사이에 끼어 있는 한 사람의 존재가 그들에게 여유를 만들어 줬다.
포효하는 특수 개체 혈귀를 막아선 사내.
두 주먹으로 공간 자체를 짓누르는 무공을 선보이고 있는 패력단주의 머리통을 보던 설천위는 천천히 두 손을 모았다.
손바닥을 마주 대고, 그 손끝을 화산파로 향한 설천위는 천천히 팔을 벌렸다.
양손에서 요동치는 영력이 붉고 검게 휘몰아친다.
이윽고, 완전히 가슴을 열 정도로 팔을 벌린 설천위가 두 손을 움켜쥐었다.
[대분화(大噴火)]
쾅!!
귀를 먹먹하게 하는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화산이 요동친다.
본래 화산(華山)은 화산(火山)이 아니다.
깎아 지르는 듯한 절벽과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절경인 산이다.
화산 폭발 따위 있을 수 없는, 단순히 지각의 융기로 인해 생긴 땅.
그러나 산(山)이라는 정체성 하나만으로.
“나쁘지 않네.”
설천위는 화산(華山)을 화산(火山)으로 바꿔 버렸다.
* * *
전장 한가운데서 한창 싸움을 이어 가던 황보중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용암 덩어리에 헛숨을 삼켰다.
‘힘을 아낀다고 하더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언제 영력이 필요해질지 모른다고 힘을 아끼겠다고 말하던 인간이 갑자기 용암을 쏟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기가 차는 것은 기가 차는 것이고 문제는 용암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는 거다.
관의 군대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진군하는 적도 아니고, 아군과 뒤엉켜 싸우고 있는 적들을 상대로 이런 용암 세례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
“괴물 놈.”
떨어지는 용암이 정확하게 영력을 지닌 강시와 혈귀들에게만 쏟아지는 것을 확인한 황보중은 그만 혀를 내둘렀다.
저만한 규모의 공격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목표물을 정할 수 있다니.
인간의 솜씨가 아니다.
자신도 권기를 쏟아 내 하늘을 뒤덮을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제어는 힘들었다.
애초에 그런 공격은 내공의 소모가 너무 극심해서 쓰지도 않겠지만.
효율이 완전히 박살 난 공격 방식인데, 설천위는 이걸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쓰고 있으니…….
설천위와 자신 사이에 대체 얼마나 높은 벽이 있는 것인지 가늠조차 되질 않는다.
애초에 술사는 다른 건가 싶기도 하다가도 백화단주와 죽은 만귀단주를 떠올리면 전혀 그랬던 기억이 없으니…….
길어지는 생각에 고개를 털어 끊어 낸 황보중은 다시 주먹을 쥐고 움직였다.
설천위의 용암 세례에 반절 이상의 강시와 혈귀가 당했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것들이 있었다.
애초에 대상이 되지 않았던 혈교의 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적들을 쓸어버려라!!”
“우아아아아아!!”
화산오검 중 하나인 운청의 외침과 함께 사기가 충만해진 이들이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칠게 달려가는 무인들 속에 뒤섞인 황보중 또한 적들의 사이로 파고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흐하하하하! 덤벼라!! 어리석은 벌레 놈들아!!”
혈교도의 머리통을 부수고, 용암에 반쯤 녹아내린 강시를 찢어발긴다.
전장의 투기와 죽음의 악취가 뒤섞인 이곳에서 황보중은 오랜만에 머릿속이 시원하게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설천위를 따라 억지로 온 전장이지만, 요 며칠간 전투에 빠져 골치 아픈 일들을 잊을 수 있었던 건 참 좋았다.
애초에 몸을 움직이는 게 성격에 맞기도 했고.
그야말로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며 적들을 쓸어버리던 황보중은 기이한 느낌에 걸음을 딱 멈췄다.
그리고.
쾅!!
직후, 고작 몇 걸음 떨어진 전방에서 추락한 존재를 확인하곤 혀를 내둘렀다.
몸에 검은 구체를 두른 채 떨어진 설천위의 발아래로 강시와 혈교도가 피떡이 되어 찌부러져 있었다.
“참 끝도 없이 많네.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
스스로 용암 분출의 일부가 된 것처럼 전장에 떨어진 설천위가 발을 구르자, 이번엔 대지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적들 사이를 가르는 균열.
그리고 그곳에서 솟구치는 용암은 지척에 있는 적들을 덮쳤다.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이는 용암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황보중은 재빨리 소리쳤다.
“흑룡단주가 날뛴다! 전장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마라!!”
전장의 열기에 고취되었던 이들의 정신까지 깨울 정도로 강렬한 울림이 화산파를 흔들었다.
명불허전, 단주급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 주는 그 사자후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면서 흑도를 손에 쥐었다.
“감사요.”
짧은 인사와 함께 그대로 적들 사이로 달려드는 설천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황보중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어린노무 시키가.”
말이 짧아.
* * *
“후우, 얼추 끝났나.”
날뛰는 설천위와 황보중을 원동력 삼아 전장은 금세 끝을 맞이했다.
두 사람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치열하게 적들을 쓸어버린 덕에 화산파와 파견 온 백화단, 선검단은 전력을 크게 아낄 수 있었다.
여태까지 몇 번이나 있었던 전투였지만, 이번에는 결과가 조금 달랐다.
여태까진 적들이 대놓고 도주를 염두에 두고 움직여 항상 끝을 못 맺고 놓쳤지만, 이번에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수준으로 적들을 궤멸시켰다.
“꽤나 과격하게 움직이는구나. 힘을 아낀다고 하지 않았나?”
“흐음, 그렇죠? 전이문은 힘의 소모가 장난 아니거든요.”
황보중의 물음에 몇 구의 혈귀가 융합해 만들어진 특수 개체의 혼을 뜯어보던 설천위가 턱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로 인원을 데려가려면, 이게 또 힘의 소모가 장난이 아닌지라.”
“그런데 이번에는 굳이 추적까지 하면서 적을 쓸어버린 이유가 무엇이냐?”
도망치는 적을 흑관으로 만들어 낸 벽으로 막아서면서까지 설천위는 굳이 이번 전장을 깨끗이 정리했다.
추후에 습격이 있더라도, 이번 전투로 적들의 전력은 크게 약화됐을 터.
다만, 그게 설천위가 힘을 아끼던 것을 포기하고 전투에 직접 개입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감이에요.”
“감?”
감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황보중은 납득했다.
무인의 감은 상당히 잘 맞는다는 인식이 있고, 황보중 스스로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특히, 전장에서 느끼는 감은 무인의 생명과 직결되는 요소인지라 강한 무인일수록 감이 잘 맞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술사의 감은?
당연히 뭐, 단순한 감이 아니라 예지 정도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술사로서도, 무인으로서도 초인의 경지에 오른 설천위의 감은 뜬금없는 행동을 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
“왠지 지금 싹 정리해 놔야 속이 좀 편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원래는 대분화만 쓰고 조용히 관망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참 왜 그랬지,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혼을 회수하던 설천위는 불현듯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아, 역시 잘 맞아.”
피식 웃는 설천위의 어깨 위로 보라색 기운이 일렁였다.
“아직 한참 더 싸울 수 있으시죠?”
황보중을 바라보는 설천위의 입가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이런 미친 역도 놈들!!”
“감히 관에 칼을 들이대다니! 정신이 나간 것이냐! 황보척!!”
창읍의 관청.
활과 창을 꼬나든 관병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관리들의 호통에 분위기가 흉흉해졌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관리들의 호통에 기죽을 정도로 상대는 허약하지 않았다.
“정신 나간 것은 네놈들이다! 어찌 약속을 어기고 순리를 어기는가! 돈에 눈이 멀어 의(義)를 저버리는 네놈들이 정녕 관인이라 할 수 있는가!”
전신에서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며 소리치는 황보척 때문에 관리들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병력을 믿고 소리치고 있긴 했지만, 상대는 하늘을 날고 강 위를 달린다는 오대세가의 무인.
공포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허나.
“헛소리! 네놈이 정녕 의(義)를 말하고자 한다면 관리를 살해한 죄를 자백하고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야!”
기세에서 밀릴 순 없고, 무엇보다 관의 이름을 믿기에 관리는 더더욱 크게 호통을 쳤다.
“관리?! 감히 그딴 놈을 관리라고 하는 것이냐! 식솔들을 먹여 살리고 싶다면 가문의 아이들을 바치고 제물마저 바치라는 놈을 어찌 관리라 할 수 있겠는가!!”
황보척의 외침과 함께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뿜어내던 위압감은 곧 살기로 변해 갔다.
마치 참고 있던 감정을 토해 내려는 듯 거칠게 요동치는 그 기세에 분위기는 더욱 흉흉하게 변해 갔다.
당장에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처럼 살기를 뿜어내는 황보세가의 무인들.
언제든 손가락에 힘을 풀기만 해도 화살이 발사될 수 있도록 시위에 걸어 팽팽하게 당겨 놓은 관인들.
두 집단의 치열한 기 싸움이 절정으로 치닫고, 이젠 긴장감에 제대로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그때.
“그만들 하시게.”
허공에서 나타난 인물을 확인한 두 집단은 눈을 크게 떴다.
“우 참정!”
“우 참정!”
이 상황의 가장 큰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의 등장에 양측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위험합니다!”
“감히 무슨 낯짝으로!!”
관청 밖에서 황보세가의 앞에 나타난 우 참정의 모습에 관리들은 애가 탔고,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분노를 토해 냈다.
일촉즉발, 지금 당장에라도 우 참정을 지키기 위해 화살을 쏴야 하나 고민하는 병사들의 갈등이 극에 다다른 그 순간.
“무림맹에서 나왔습니다.”
우 참정의 등장에 놀라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람의 발언에 다시금 분위기는 변했다.
“초생단 부단주, 설란이라고 합니다.”
포권과 함께 자신을 소개한 설란은 단호한 눈빛으로 황보척을 응시했다.
“황보척 공자, 물러나십시오. 피를 볼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 개소리! 먼저 선을 넘은 것은 저들이다! 선을 넘은 자들을 응징하지 않으면 어느 누가 선을 지키며 살아간단 말인가!”
절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온몸으로 주장하며 오히려 앞으로 나서는 황보척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란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대답과 함께 고개를 돌린 설란은 연화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확실하네요.’
황보척이 정상이 아님을 확인한 설란은 다시금 한숨을 토해 내는 것과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연화, 부르렴.”
“넵!”
연화의 활기찬 대답과 달리 검을 꺼내 든 설란의 모습에 분위기는 급속도로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미리 너무 나서지 말라는 얘기를 전해 들어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운주와 고 호위마저 손을 써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고민하던 그때.
“됐어요!”
발랄한 연화의 외침과 함께 보라색 문이 허공에 나타났다.
그리고.
“바보 같은 아들놈이!!”
전장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피를 뒤집어쓴 황보중의 주먹이 그대로 황보척의 안면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