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534화 (534/624)

제534화

533화-운주 (5)

“보복이라는 건가요?”

“우 참정이 역도들과 손을 잡았다면 그러하겠지.”

운주의 대답에 설란은 가늘게 신음했다.

황실이 그렇게 얽혀 있다면, 황보세가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건…….

‘무리야.’

단순히 황실의 농간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실의 농간에 분노한 채 술법에 빠져 있는 상태.

그게 황보세가의 상태다.

그런 게 아니라면, 상식적으로 황실에서 상업에 방해를 놓는다고 해서 황실을 적대시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대가문이라고 해도, 황실이라는 이름은 결코 쉽게 무시할 수 없다.

무엇보다 명분이 부족하다.

황실이라는 이름을 대놓고 부정하는 순간, 황보세가라는 맛 좋은 먹잇감을 뜯어먹기 위해 달려들 승냥이들이 한 무더기다.

그런 승냥이들에게 얼마나 뜯길지 모르는데, 명분 없는 싸움을 시작한다고?

도저히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마 황보척도, 그 휘하의 무인들도 제정신이 아니겠지.

그들을 외부인인 지금의 일행이 끼어들어서 진정시킨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반대로 황실의 압박을 해제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고.

즉.

“언니, 이건 역시 방법이 없겠는데요?”

“너, 왜 좋아하니?”

“그야……. 헤헤.”

그렇다 할 방법이 없다.

그 사실에 오히려 좋아하는 연화의 모습에 운주와 고 호위가 의아해했으나, 설란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최대한 숨길수록 좋으니까.

“후우, 반역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우 참정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자가 황실의 상황을 아는지, 또 알고 있다면 그들과 협력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군.”

운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란은 히죽히죽 웃고 있는 연화의 볼을 당겼다.

“그런 의미에서 술사님 준비 좀 해 주시죠?”

“눼. 원니.”

* * *

“허어, 이런 것이……?”

심야.

지체 없이 우 참정의 가문으로 접근한 설란 일행은 어둠에 몸을 숨기고, 담을 넘었다.

단순히 몸을 숨긴 것이 아니라 연화의 술법으로 존재 자체를 지워서 별다른 무리 없이 가문에 잠입하자, 놀란 고 호위가 감탄했다.

“헤헤, 제가 이런 건 또 단주님보다 잘하거든요.”

그 인간은 파괴와 파멸, 그리고 절망을 위해 재능을 쓰는 양반이라 이런 건 좀 못하지.

당가에서 각려를 업고 천장을 기어 다녔을 때도 안 들켰지.

그땐 뭐, 황실의 암부처럼 은밀하게 당가를 휘저어 놨었지.

나, 역시 재능이 있을지도?

히히 웃으며 앞장서는 연화의 모습에 운주와 고 호위는 여전히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상황이 썩 좋지 않고, 이렇다 할 방법이 없는 갑갑한 상태인데 왜 저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

의아해하는 두 사람의 의문을 풀어 줄 겨를도 없이 가문 안으로 쑥쑥 들어간 일행은 순식간에 목표로 했던 방 앞에 도달했다.

두 눈을 부릅뜬 병사들이 지키는 방.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술법으로 은밀하게 두 병사를 재운 연화의 솜씨에 조심스럽게 병사를 잡아서 문 앞에 기대 놓은 설란과 고 호위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가니,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사십 대 중반 정도 되는 사내가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옆에는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 또한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설란은 눈빛을 보냈고, 고개를 끄덕인 연화는 조심스럽게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툭툭.

가볍게 우 참정의 이마를 두들기자 천천히 눈을 뜨는 우 참정.

“─────!”

비명을 지를 것처럼 입을 뻐끔거렸지만, 방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고수를 대비해 기막을 펼치지 않고 연화의 술법으로 우 참정의 목소리만을 지운 것이다.

발버둥 치려는 우 참정을 그대로 들어 올린 연화가 바닥에 그를 내려놨다.

그러는 사이, 미리 준비해 온 두꺼운 천으로 불빛이 새어 나갈 곳을 막은 고 호위와 설란이 다가왔다.

[우 참정, 몇 가지 묻고 싶은 일이 있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등불을 켜고 미리 가져온 지필묵으로 설란은 필담을 시작했다.

[황보세가를 압박하고 있더군요. 맞습니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우 참정은 설란이 쓴 내용을 보고 가만히 설란을 응시했다.

그리고.

[역도들이 황실의 과실을 훔쳐 먹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황보세가가 역도의 무리라는 것인가요?]

침묵.

붓을 움직이지 않는 우 참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란은 다시금 붓을 움직였다.

[황보세가는 역도의 무리들로부터 오히려 폐하를 지키려 했다고 합니다. 우 참정께서는 어찌 황보세가를 역도의 무리로 모는 것입니까?]

설란이 써 내린 내용에 우 참정이 차갑고 날카로운 눈으로 설란을 바라봤다.

[황실에 일어난 난은 진압되었고, 그 과정에서 황보세가의 무인들 몇 명이 숙청됐다.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이들도 목이 베였다.]

[폐하께서는 일단 황궁의 상황이 안정되기 전까지 그 사실을 숨기기로 하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보세가를 가만히 둘 순 없는 노릇이지.]

분노를 삭이듯, 잠시 붓을 멈췄던 우 참정은 다시금 붓을 움직였다.

[해서 내가 따로 움직여 황보세가의 자금줄을 끊었다.]

[우 포정사께선 관망하라 하셨지만, 고작해야 무인 나부랭이들이 감히 폐하를 시해하려 했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법.]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우 참정의 모습에 설란은 작게 감탄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목숨의 위기를 느끼고 위축되어야 정상이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오른 관인이라고 한들 결국 투쟁과는 먼 삶을 살아온 인물.

한데, 지금도 냉정을 유지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한다는 건 칭찬해 마땅한 일이다.

다만.

[그 정보, 확실한 것인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역도들이 실패했다는 말.]

쿵!

설란의 글이 다 끝나기도 전에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친 우 참정이 분노로 몸을 떨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호통을 치지 못하는 것이 어지간히도 한이 됐는지 그 눈은 잔뜩 커져 있었다.

다만, 뻐끔거리는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기에 그렇게 잠시 분노를 토해 내던 우 참정은 이내 다시 붓을 들고 글씨를 휘갈겼다.

얼마나 서예를 갈고닦았는지, 분노해서 휘갈기는 글씨조차 깔끔해 알아보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폐하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황궁의 침묵이 말이 되질 않는다! 역도 놈들이 역천에 성공했다면 반드시 피바람이 불어야 할 터! 이런 식으로 조용한 것 자체가 그 증.]

딱, 거기까지 글을 쓰다가 멈춘 우 참정은 자신이 휘갈기던 종이 위에 놓인 물건을 내려다봤다.

금색으로 빛나는 패.

그 안에 새겨진 글자는 ‘황(皇)’이라는 간단한 글자였으나, 그 필체가 심히 비범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 패를 잡아 뒤집은 우 참정은 이내 눈을 크게 부릅뜨고 허리를 숙였다.

양 무릎과 양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이마조차 바닥에 닿는 자세.

오체투지(五體投地).

불교에서 비롯되어 상대를 극도로 존경하는 표시로 사용되며, 황제를 보는 모든 백성들이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자세.

그 자세를 우 참정이 갑자기 취한 것이다.

금패 뒤에 새겨진 ‘천(天)’의 글자를 확인한 뒤에 벌어진 일이다.

당연하게도 그 금패를 던진 주인인 운주에게 설란과 연화의 시선이 꽂혔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붓을 든 운주는 빠르게 글을 써 내렸다.

[역도의 역천은 성공했다. 우 참정, 지금부터 군사를 모으고 황보세가를 향한 압박을 풀어라.]

* * *

우 참정의 장원에 있는 별채.

그곳에 자리를 잡은 설란 일행은 한숨과 함께 회의를 시작했다.

“……일이 꼬였군.”

“설마 그사이에 황보세가로 간 관리가 죽었을 줄은…….”

우 참정을 어떻게든 설득해 냈는데, 설마 황보세가에서 사고를 쳤을 줄이야.

운주의 도움으로 일이 잘 해결되는가 하고 기대하던 설란의 뒤통수를 때리는 소식이었다.

술법에 당한 이들이 있으니 우 참정을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토대는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완전히 꼬여 버렸다.

“이래선 절대 안 오겠네요.”

“무조건 함정이라고 생각하겠지.”

우 참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직후, 설란이 떠올린 최고의 수단은 황보척을 따로 불러내는 것이었다.

따로 불러내서 연화의 힘으로 황보척에게 걸려 있는 술법을 해제한다면?

만약 잘돼서 황보척이 제정신만 차린다면 단숨에 상황이 호전될 수 있었던 기회였다.

황보척을 선두로 세워서 황보세가를 진정시키고, 동시에 황보세가에서 암약하고 있는 놈들을 찾아내서 처리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 기회가 깔끔하게 날아가 버렸다.

이젠 우 참정이 황보세가를 향한 압박을 멈추라고 해도 멈추지 않을 거다.

당장 우 참정의 상사인 우 포정사의 분노가 상당한 데다 밑에 있는 관리들의 분노도 하늘을 찌를 정도였으니까.

운주의 금패를 남발하기도 힘든 것이 누굴 믿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황실의 인물이 이곳에 있음을 섣불리 밝혀서 좋을 게 없었다.

‘……설마 했지만.’

고심하는 운주를 바라보던 설란은 짧게 상념을 끊었다.

설마 하는 추측이지만, 이제는 거의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린 연화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운주가 우 참정에게 들이민 금패는 황가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황(皇)’이 새겨진 반대편에 ‘천(天)’이 새겨진 금패는 황제의 대리인.

즉, 황제가 자신에 준하는 권위를 부여한 증거라는 소리다.

그렇기에 하늘이란 글자[天]가 새겨진 것이고.

역모에 성공한 황궁에서 도주한 인물이 그런 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름이다.

운주.

현 황실의 성은 주(朱) 씨다.

그리고 현 황제의 이름은…….

“언니?”

“아, 응.”

“일단 설득은 힘들 것 같으니까 황보세가를 제압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옳지 않을까요?”

연화에 의해 상념이 끊긴 설란은 그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보세가를 제압한다니, 너무 힘든 일 아닌가?”

그런 설란의 한숨에 동의하듯 운주가 의견을 냈지만, 그의 물음에 연화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또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서…….”

“무림맹주라도 부르겠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족히 한 달은 걸릴 터인데…….”

그 한 달 동안 얼마나 상황이 더 나빠질지…….

침음을 삼키는 운주를 가만히 바라보던 설란은 다시 연화를 바라봤다.

별다른 긴장감 없이 웃고 있는 모습.

이래서 그 아이가 쉬질 못하는 거다.

각자 해결해 줄 일은 해결해 줘야 걔도 좀 쉴 텐데…….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설란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주는 아니지만, 흑룡단주를 부를 생각입니다.”

“흑룡단주라…….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괴물 같은 재능을 가진 젊은 무인이라고.”

“괴물 같은 재능……. 맞는 말이긴 합니다.”

운주의 말에 호응한 건 고 호위였다.

마치 설천위를 알고 있다는 듯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그 모습에 더더욱 확신을 얻은 설란은 근질거리는 입을 잠재우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일단 황보세가를 제대로 압박해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뒤에 상황을 해결하는…….”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하려던 순간.

말을 멈춘 설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연화와 고 호위가 기세를 흘렸다.

그 사이에서 빠르게 상황 파악이 끝난 운주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큰일 났습니다! 황보세가 놈들이 병력을 이끌고……!”

기어코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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