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3화
532화-운주 (4)
“언니는 아직 안 왔네.”
객잔에 돌아온 연화는 텅 빈 방 안을 확인하곤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객잔의 1층, 식사를 하는 곳에 자리를 잡은 연화가 간단히 음식을 주문했고, 얼마 뒤에 내려온 운주가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고 호위도 안 보이는군.”
“그 아저씨라면, 근처에서 숨어서 호위하고 있지 않을까.”
“음,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말고 나오면 될 터인데.”
쓸데없는 배려를 하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은 운주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짜증이 담긴 눈으로 고개를 돌리는 연화의 모습에 그의 시선 또한 함께 돌아갔다.
“히끅, 뭐야. 웬 병X이 여자를 끼고 있어?”
그냥 대놓고 시비를 걸겠다는 모양새로 다가오는 사내의 몸에선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아저씨, 취했으면 얌전히 안주나 처먹다가 꺼지세요.”
연 소저의 입이 이렇게 거칠었나?
짜증과 분노가 담긴 연화의 목소리에 운주는 살짝 놀라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가식 따윈 없는, 지금껏 보아 오던 여식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
역시 알면 알수록 재미있었다.
“어쭈? 처웃어?”
그런 운주의 미소를 오해한 사내가 노골적으로 적의를 풍기며 다가왔다.
“옆에 여자를 끼고 있다고 히끅, 감히 나를 무시해?”
“하아.”
상식, 아니 기본적인 사고의 논리조차 없는 전형적인 만취자의 행태에 연화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술 취한 놈들은 싫어.
설란 언니가 있을 땐 분위기에 압도돼서 다가오지도 못하던 머저리들이…….
어린 여자, 팔 하나 없는 남자, 이렇게 만만해 보이는 이들을 상대로는 어찌 이리 당당할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연화가 대충 기세를 일으켜 사내를 밀어내려는 그 순간.
“팔도 없는 병X 주제에. 킬킬, 어린것이 제대로 힘쓰는 사내를 못 맛봐서 이런 놈팽이랑 다니는 모양인데, 내가 끝내주는…….”
추잡한 사내의 음담패설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연화의 눈이 기이하게 일렁였다.
“병X은 너고, 이 새끼야.”
칠흑으로 일렁이는 기운.
몇 번이고 겪었던, 우상으로 삼았던 사람의 힘.
문율과는 달리 패도(覇道)를 품을 역량이 없기에 품지 못했던 힘이지만, 분노라는 감정은 그녀에게 비슷한 결과를 이끌어 낼 힘을 주었다.
그것은 살의(殺意)이며, 동시에 저주(咀呪)이니.
“컥!”
갑자기 기도가 막혀 쓰러진 남자가 몸을 비틀며 바닥을 기었다.
“끄으으으가각!”
괴성을 흘리며 온몸을 비트는 사내의 얼굴은 한껏 붉어져 있었고, 이마의 혈관은 마치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죽을 것처럼 제대로 호흡조차 못 하고 몸을 비트는 사내.
“네년! 무슨 사술을 쓴 것이냐!”
“감히 황보세가의 무인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터져 나오는 호통에 연화는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 연화가 묵고 있는 객잔은 허름하기는 해도 황보세가의 권역에 있는 곳.
그곳에서 대낮부터 술을 처먹고 깽판을 부릴 수 있는 무인들이 누구겠는가?
동네 왈패?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조잡하긴 해도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는 연화와 운주에게 시비를 걸 놈은 황보세가의 무인 정도밖에 없었다.
즉.
“당장 사술을 풀어라! 계집!”
“사특한 사파의 무리가!”
이 인간들은 황보세가의 무인들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연화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수습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굽히자.’
적의 시야에 들지 않는 게 중요했다.
이런 놈들은 얼마든지 정리할 수 있다.
문제는 이놈들이 가문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때의 반응이다.
그때부터 시간제한이 생기는 거나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있을 테니, 사과하면 뺨이나 몇 대 맞고 끝낼 수 있을…….
“그만.”
연화가 사죄를 하려던 그 순간, 어느새 다가온 운주가 그녀를 잡았다.
“그대가 사죄할 필요 없다.”
담담한, 하지만 확고한 무언가가 실린 목소리에 저절로 허리가 굳었다.
마치 고개를 숙이는 걸, 허리를 숙이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황보세가의 무인이라고 했나?”
난리를 치던 황보세가의 무인들마저 입을 다물고 있는 묘한 침묵 속에서 운주는 특유의 담담한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하급 무사 주제에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닌가?”
“그, 그…….”
제대로 대답조차 못 하고 말을 더듬는 무인들을 보며, 운주는 품에서 작은 금패를 꺼냈다.
“자네들의 얼굴이 자꾸 기억에 남으려고 하는군. 꺼져 주겠나?”
운주가 꺼낸 금패를 확인한 사내들은 재빨리 쓰러진 동료를 둘러멨다.
그리고 두고 보자, 같은 조잡한 도발조차 하지 못한 채 미친 듯이 달려서 객잔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운주는 연화의 어깨를 붙잡은 손을 부드럽게 풀어내며 그녀를 바라봤다.
“미안하군. 일을 망쳐 버렸어.”
“……그 금패가 뭔데요?”
“황실의 징표이네.”
“황실의 징표요?”
“황실에 공적을 쌓은 이들에게 주는 패지.”
아.
잠깐, 그걸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어떻게 바로 알아봤지?
“황보세가의 인물이라면 모두 알고 있네. 이 금패를 가진 사람은 귀빈이니까.”
연화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해 준 운주는 연화를 자리에 앉히고, 자신 또한 자리에 앉았다.
“이 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황보세가에서 전부 파악하고 있진 않겠지만, 놈들이 보고하는 순간 찾아올 걸세.”
“……괜찮아. 좀 빨리 움직이지 뭐.”
나도 들이박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아까 사내놈이 한 말은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군.”
“응? 아, 씁 그 새끼 팔을 부러트렸어야 했는데!”
“팔을?”
“너보고 팔 없다고 그, 그 뭐냐, 기분 나쁘게 말했잖아! 아직 상처도 다 안 아물었구먼. 싸가지 없는 새끼들…….”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는 연화를 가만히 바라보던 운주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그렇군. 하긴 사실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뭘 사실이니 신경 쓰지 마! 팔이 있고 없고가 뭐가 중요하다고!”
너를 욕해!
뒷말을 뱉어 내기도 전에 자신의 손을 잡는 운주의 손길에 흠칫 놀란 연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그리 생각해 준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 * *
“……들어가기 거북하네요.”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객잔 앞, 고 호위의 제지에 멈춰 서서 상황을 전부 지켜본 설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일을 조금 빠르게 진행할 생각이었으니까요. 황보세가에 꼬리가 보인 걸 아쉬워할 틈도 없을 거예요.”
거기다 운주의 대응은 의외로 깔끔했다.
뭐가 됐든, 황실과 연이 있는 인물이 갑자기 나타난 것에 황보세가의 사람들은 놀랄 테니까.
정보를 모으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하려 할 테니 당연히 시간이 걸릴 터.
이쪽이 움직이기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다.
대충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던 설란은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사라진 방향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고 호위를 바라봤다.
“용케 참으셨군요.”
“……무엇을 말이오?”
“고 호위님의 성격을 봐선 시비를 건 순간 달려들지 않을까 했는데요.”
설란의 노골적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고 호위는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때로는 지켜봐야 할 때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오.”
“그건 참, 저도 얼마 전에 깨달은 건데요.”
“그렇다면 한참 늦었구려. 나이를 헛먹은 게지.”
“고 호위님이 나이를 헛먹었으면, 무림의 대부분의 무인들은 나이를 헛먹은 거지요.”
무인들의 목표는 강해지는 것인데, 환갑이 다 되도록 초절정에도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니까.
아니, 수두룩한 걸 넘어서서 절대다수의 무인들이 경지를 넘지 못하고 무너진다.
초인의 벽은 결코 녹록지 않으니까.
그리고.
“저희는 지금부터 우 참정(右參政)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 * *
우 참정.
종3품의 관리이자 한 성의 육조(六曹)를 관리하는 수장이다.
육조(六曹)란 인사, 재정, 예식과 교육, 군사, 사법, 공사를 말하며 이것들을 관리하는 조직의 수장이 우 참정이다.
좌 참정도 있지만, 지금 황보세가와 연결되어 그들의 상업을 돕는 이는 우 참정이다.
그런 우 참정을 만나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너무 바빠서 사람 만날 시간조차 내기 힘든 고위 관리니까.
“정식으로 만날 필요는 없습니다.”
객잔의 방.
그곳에 일행을 모아 놓고 설란은 자신이 얻은 정보와 앞으로의 계획을 풀어 놨다.
“중요한 것은 그자가 의도적으로 황보세가를 압박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걸 알아내는 게 더 힘들지 않을까요?”
“아마 그렇겠지. 쉽진 않을 거야.”
연화의 물음에 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황보세가의 무인들에게 불만이 쌓인 이유는 재정의 압박 때문이지.”
“아, 그러고 보니 돌아다니면서 들었어요. 황보세가에서 최근 근처 상인들에게 보호세를 강요한다고.”
“대가문에서는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는 일이야.”
오대세가쯤 되는 가문은 영역의 상인들에게 보호세를 거두지 않는다.
그들의 자발적인 후원금만을 받을 뿐.
허울뿐인 눈 가리고 아웅 같지만, 생각보다 매우 인도적인 방법이다.
대가문은 명예도 챙기면서 재정에 도움이 되니 좋고, 상인들은 최대한 부담이 안 가는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 좋다.
흑도의 무리에게 뜯기느니 차라리 자발적으로 대가문에 바치는 게 기분도 덜 나쁘고.
지역 상인들의 후원금은 대가문의 뿌리가 되는 자본이다.
그들이 사업체를 굴리고 더 큰 돈을 벌 수 있게 해 주는 기본 자금.
그러니 웬만한 일이 아니면 대가문은 지역 상인들을 쥐어짜지 않는다.
돈을 강요하는 순간, 명예와는 거리가 멀어지기에 가문의 무사들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게다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지역 주민들과 척을 지는 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 사람은 다 아는 부유한 가문인 황보세가가 지역 주민들을 쥐어짜고 있다?
“재정 상황이 악화된 건 확실하군.”
“그 악화의 원인이 우 참정? 그 사람이라는 거죠?”
“그래. 아마 의도적으로 황실과 이간질을 해서 교역의 길을 끊어 버리고 있는 모양이야.”
찻집에서 얻은 단편적인 정보와 도시를 오가며 귀동냥한 정보만으로 여기까지 추측을 하다니.
“무림맹의 부단주란 대단하구려.”
“헤헤, 과찬을.”
아, 연 소저도 부단주였지?
연화의 반응에 평온한 안색을 유지하며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운주는 다시 설란을 바라봤다.
“내가 도움이 될 정보를 가지고 있소.”
“공자님!”
“그만! 동행을 원한 건 우리고, 방해가 되지 않겠다고 약조한 것도 나다.”
고 호위를 진정시킨 운주는 또렷한 눈동자로 설란을 응시했다.
“황실에서 반역이 일어났소.”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황실에 심어 둔 사람이 몇인데.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설란은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황실에 일하는 사람의 숫자는 만을 가볍게 넘는다고 하니, 그 많은 이들의 입과 손을 막을 순 없다.
하지만.
“없을 만하지. 그 반역은 성공했고, 지금 황실은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을 터이니.”
“……단순한 반역은 아니군요.”
“맞소. 내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한 이유가 있소.”
두 눈으로 꼭 확인해야만 하는 이유.
간단했다.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그 반역에 참여하지 않았소.”
* * *
“척아…….”
축축한 지하실.
그곳에 앉은 여인은 눈물을 훔치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누가, 누가 너를 그리 만들었느냐…….”
흑룡학관에서의 실패 이후, 아들이 주변을 과하게 신경 쓰게 됐음은 알고 있었다.
뼈를 깎는 노력을 하기에 능히 스스로 일어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질없다며 학관을 그만두고 가문에 돌아와 가문의 무력대에 들어가서 밑에서부터 경험을 쌓아 가는 모습을 보고 상처를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자격이 없구나……. 자격이 없어. 몹쓸 어미가…… 자식의 속이 곪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구나…….”
자신을 이곳에 가둔 자식의 얼굴을 떠올리며, 황보세가의 대모는 눈물을 훔쳤고.
콰득!
그런 여인의 머리 위, 화려한 황보세가의 건물 안에서 가주 집무실에 앉은 황보척은 안면이 무너진 관리에게서 끈적한 피가 달라붙은 주먹을 뗐다.
“드디어 선을 넘는구나. 탐관오리 놈들…….”
차갑게 식어 가는 관리의 시체를 바라보는 황보척의 두 눈에는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