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532화 (532/624)

제532화

531화-운주 (3)

황보세가.

중원의 북동쪽, 산둥성에 자리한 이 가문은 무림에서도 황실과 친한 가문 하면 딱 떠오르는 가문 중 하나다.

이유는 당연히 북쪽에 있는 이 나라의 수도 북경과의 접근이 용이하고,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일이 있는 등 복합적이긴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다.

산둥성의 북쪽에는 바다가 있고, 이 바다는 북경이 있는 하북과 닿아 있다.

해안가를 따라서 오가는 배는 당연히 상업의 주축이 된다.

큰돈을 만질 수 있고, 당연히 힘 좀 쓰는 가문인 황보세가 또한 이곳에 발을 깊게 담그고 있었다.

거기다 황실과 연까지 있다?

돈을 쓸어 담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그 덕분에 황보세가는 황실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오대세가 중에서도 제법 자금력이 탄탄한 가문이다.

과할 정도로 큰 덩치와 언뜻 무식해 보이는 무공 혹은 성격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조용하네요.”

“다행이네.”

황보세가가 자리를 잡고 있는 창읍.

밤의 등불이 곳곳에 밝혀진 그 도시를 멀리서 지켜보던 연화와 설란은 생각보다 조용한 도시 분위기에 안심했다.

만약 일이 터진 와중이라면 당연히 전투로 시끄러웠을 거고, 일이 터진 뒤라면 피와 죽음의 냄새로 어수선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용하다는 건 아직 폭발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니 충분히 좋은 소식이었다.

“여러모로 시선을 돌리고 다시 돌아왔으니, 이제 추적도 없을 겁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급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빨리 도시로 들어갈 생각에 설란은 운주와 고 호위를 떨어트리기로 했다.

애초의 목적이 적을 따돌리고 숨을 돌릴 여유를 찾는 것이었고, 지금의 운주와 고 호위는 그만한 여유를 충분히 되찾았다.

헤어질 이유로는 충분했고, 상황 또한 그러했기에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맞았다.

다만.

“설 소저.”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담담한 얼굴로 도시를 바라보던 운주는 고개를 돌려 설란과 눈을 마주쳤다.

“황보세가에 무슨 일이 생겼소?”

“운 공자, 이건 무림의 일입니다.”

너무나도 의도가 노골적인 운주의 물음에 설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실 출신의 귀족 자제를 이런 일에 끌어들일 순 없었다.

심지어, 운주는 도주 과정에서 한쪽 팔이 잘리는 중상까지 입은 환자다.

어찌나 정신력이 좋은지 팔이 잘린 자리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도 태연한 안색을 유지했지만, 거기까지.

무공은 미숙하고, 딱히 술사로서의 능력도 없었다.

그런 인물이 지금 황보세가로 들어간다?

아무리 화경급 고수인 고 호위가 붙어 있다고 해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황보세가는 지금 암약하는 세력의 표적이 되어 있습니다.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 곳에 고작 소저 둘이서 들어가겠다는 소리군.”

“저희는 무인이니까요.”

난 아닌데…….

차마 이 분위기에서 설란의 말에 부정을 하지 못한 연화는 슬쩍 고개를 돌려 도시에 집중했다.

무인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성과를 보이는 수밖에.

연화가 도시에 흐르는 영력에 집중하는 사이, 설란은 다시 설득을 이어 나갔다.

“고 호위께서 붙어 계신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는 일이 황보세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술법이 원인이 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을 거라는 것이 저희의 추측입니다.”

“연 소저의 능력을 보고 짐작은 하고 있었소.”

“예. 그러니 고 호위를 생각하셔서라도 일단 조용히 도시에 몸을 숨기시는 것이…….”

“그러니, 더더욱 내 두 눈으로 봐야겠소.”

또렷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두 눈을 마주한 설란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마주 볼 수 없는 무언가.

본능의 단계에서 이루어진 행동에 스스로 당황하기도 잠시, 설란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지금 운주가 이러는 것이 단순히 연화를 향한 마음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애초에 저희가 황보세가를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내가 가까운 팽가가 아니라 황보세가 쪽으로 온 이유가 있소.”

지금은 밝힐 수 없지만.

짧게 말을 끊은 운주는 열망이 담긴 눈으로 설란을 바라봤다.

“함께하고 싶소. 절대 방해는 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지.”

* * *

“언니, 맞아요?”

낡은 객잔.

야음을 틈타 은밀하게 도시로 잠입한 네 사람은 낡은 객잔에 자리를 잡았다.

두 개의 방, 각각 일행끼리 흩어진 뒤 설란은 은밀하게 기막을 펼쳤다.

“숨기는 게 있어.”

“그렇겠죠? 애초에 어디 가문인지 말도 안 해 주는데.”

연화의 말대로 운주는 자신이 어디 가문 출신인지 밝히지 않았다.

애초에.

“운 씨 성을 가진 가문은 몇 있지만, 화경급 고수를 호위로 부릴 만큼 강대한 가문은 없어.”

“가명인가요?”

“아마도.”

매우 높은 확률로 가명일 것이다.

그렇기에.

‘……설마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설란은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일이 벌어질 확률은 너무나도 낮았으니까.

“일단 황보세가에 들어갈 방법부터 고민하자.”

“대놓고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요?”

오는 길에 대놓고 움직이길래 이번에는 그냥 싹 밝히고 정정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우리의 정체를 알고 미리 습격해 온 적들이야. 섣불리 정체를 밝히고 움직이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야.”

그럼 애초부터 조용히 왔으면 되는 게……?

동공이 떨리는 연화의 반응에도 설란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먼저 며칠 정도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모으자. 단, 탐문은 하지 말고.”

“조용히 숨어서 듣기만 하라, 이건가요?”

“그래, 간단한 은신술 정도는 가능하잖아?”

유예린이나 살존같이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는 기적은 불가능해도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는 정도의 은신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존재감을 감추고, 타인의 시선을 피해 사각으로만 다니면 되니까.

주변에 동화되어 사람들의 인지에서 벗어나는 은신술은 기본 중의 기본인지라 숙련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웬만큼 실력 있는 무인이라면 필수적으로 익히고 있는 기술이다.

그러니 설란은 말할 것도 없고, 연화 또한 일반인 사이에 숨어드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수준으로 익혔다.

‘올 때는 쓰지 말라더니…….’

갑자기 바뀐 설란의 지시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길에 다가오던 기분 나쁜 녀석들의 면면과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 붙었던 적들의 면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뭐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거기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운주도 못 만났을 테니까.’

본명도 모르는 남자지만.

이 일이 얼추 마무리되고 무림맹으로 돌아갈 때쯤 되면 이름 정도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살짝 생각이 딴 곳으로 새는 연화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란은 피식 웃으며 기막을 거뒀다.

“그렇게 됐으니, 내일부터는 조사에 집중하자.”

* * *

“조사라, 기본 중의 기본이군.”

“뭐, 그렇지.”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밖으로 나온 연화는 자신의 옆에 붙은 운주의 옆얼굴을 힐끗힐끗 훔쳐봤다.

‘아니, 얘는 왜?’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다니면서 귀동냥만 하는 거니까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그 딱딱한 고 호위가 용케도 보내 줬네.

이거 어디 숨어서 따라오고 있는 거 아니야?

샥샥 시선을 돌리며 은근히 주위를 살피던 연화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흠칫 놀랐다.

“……이, 이.”

“주변에 동화될 거라면, 이런 게 더 낫지 않겠나?”

비어 있는 왼팔 대신, 오른팔로 연화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 운주는 능숙하게 그녀를 이끌었다.

가슴이 두근거려 정신을 못 차리던 연화의 이성은 여인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운주의 모습에 차갑게 식어 버렸다.

“……좀 놀았나 봐?”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여성을 대하는 법 또한 포함되어 있었지.”

“요즘 고관대작 자제들은 그런 것도 배우나?”

여자 후리는 법도 가르쳐?

상당한데…….

“호위 중 하나가 가르쳐 준 것뿐이다. 나중에 써먹을 때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그때 호위는 한쪽 팔로 어깨를 감싸고, 남은 팔로는 숨겨 뒀던 꽃을 내밀라고 했지만…….

‘그건 힘들겠군.’

어깨 아래로 사라져 버린 왼팔은 이미 없음에도 끊임없이 통증이 느껴졌다.

손이 잘린 죄인들이 잘려 나간 손에서 아픔을 호소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착각이 아니었군.’

그들을 정신병자 취급하던 의원 놈들은 싹 다 팔을 잘라 버려야겠어.

“그런데 이런 게 더 눈에 띄지 않나?”

“주위를 둘러보면 이렇게 다니는 연인들이 더 많다.”

“그야 그렇지만…….”

입을 우물거리던 연화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운주와 연인 행세를 하면서 도시를 돌아다니기 시작한 연화는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모든 것은 주변에 동화되기 위해서!

“이거 봐 봐! 맛있겠다!”

“닭꼬치로군. 두 개 주게.”

“이거 예쁘다!”

“으음, 선물로 주기에는 조금 조잡한 생김새지만, 소저가 원한다면 나쁘지 않겠지.”

“저기! 뱃놀이한다!”

“아무리 그래도 배에 타는 건…….”

“헛!”

운주의 말에 정신을 차린 연화는 붉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귀, 귀는 열고 있었어.”

“나도 열고 있었네. 아무래도 한번은 객잔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군.”

“응…….”

* * *

조용히 도시를 훑고 돌아다니던 설란은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 조용히 작은 찻집에 들렀다.

잔잔한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아담한 크기의 찻집.

그곳에 도착해 자리에 앉은 설란은 간단히 차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차 나왔습니다.”

매화향이 나는 차와 함께 너무 달지 않게 만든 당과가 나오고, 설란은 자연스럽게 찻잔을 어루만졌다.

‘황보, 마비, 장남, 구금, 대모……?’

찻잔에 새겨진 암호를 읽어 낸 설란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은은한 매화향이 퍼진다.

그리고.

‘아무래도 정면 돌파는 힘들 것 같네.’

자신의 어머니까지 구금할 정도로 황보척이 망가졌다는 건 상당히 뼈아픈 소식이었다.

최근에 연화가 해결했던 당가와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당가는 명분을 쥔 쪽이 몰려서 그 명분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고, 그래서 연화와 설천위가 그 명분을 활용할 수 있는 자리를 힘으로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래서 별다른 잡음 없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황보세가의 경우 명분도, 힘도 상대가 쥐고 있는 상황이다.

정면 돌파?

지금 황보세가에 화경급 고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죽었다는 소리가 없는 전대 가주도 그렇고, 아예 힘을 공개하지 않은 강자가 있을 수도 있다.

대가문의 저력이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런 전력들이 황보척의 손에 들어갔느냐 아니냐 하는 것.

그리고 황보세가를 노리고 있는 음지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

이 두 가지다.

‘답답한 상황이군.’

기습이 쉽사리 통할 상대도 아니거니와, 기습으로 얻어 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구금돼 있다는 황보중의 아내를 구해 낸다고 한들 그녀의 목소리로는 무인들을 움직일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 황보척을 따르는 무인들을 전부 죽인다?

그것도 힘든 일이다.

애초에 그게 가능할지도 의문이고,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문제 해결로 이어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황보세가에 침입한 적들이 노리는 것이 애초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가장 좋은 방법은 황보세가에 숨어 들어가 있는 적들의 목적을 파악하고,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술법 자체를 파훼, 정신을 차린 황보척의 도움을 받아 적을 몰아내는 것인데…….

‘황보세가쯤 되는 곳의 무인들이 넘어갔다는 건 단순히 술법만의 문제가 아닐 확률이 높아.’

무인들의 심성을 건드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리라.

불만이든, 열망이든 무엇이든 간에 무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의 뭔가가 있다.

그것은 당연히 황보척에게도 있을 것이고, 전력을 쏟아부어 술법을 해제했는데 황보척이 여전히 이쪽을 적대한다면…….

‘천위라고 해도 힘들지 몰라.’

아무리 동생이 강하다고 해도 사지나 다름없는 곳에 동생을 부를 순 없었다.

최소한 사태 해결의 실마리라도 보이지 않으면…….

“추가 주문입니다.”

고민하던 설란은 주문하지도 않은 다과의 등장에 상념을 끊었다.

나온 접시를 조심스럽게 들어, 그 위를 훑자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암호가 읽혔다.

‘황실, 부패, 원인.’

아무래도 조사가 필요한 대상이 눈에 보이는 덩치뿐만은 아닌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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