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1화
530화-운주 (2)
“웬일로 여기까지 왔대?”
흑룡단의 지하 뇌옥.
몇 군데 돌아다니며 잡아 온 죄인들을 가둔 그곳에서 한창 작업에 몰두하던 설천위는 느껴지는 인기척에 도구를 내려놨다.
내려놓자마자 사라지는 도구들이 신기할 법도 하건만, 철창 밖에 선 사람은 별다른 반응 없이 설천위를 바라봤다.
“역시 사파로 전향하기로 마음을 굳힌 건가요?”
“안 간다니까.”
그런 인간이 이런 짓을 해?
불신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수아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제가 꼭 용건이 있어야 올 수 있나요?”
“외간 여자가 너무 다가오면 좀…….”
“흥, 어머니께 서신으로 다 전해 들었거든요? 변태 단주님.”
그래도 반한 사람인데, 너무 충격적이었지.
아무리 그래도 두 사람이랑 같이…….
순간 얼굴이 빨개진 백수아는 혼자 헛기침을 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정보가 들어왔어요.”
“정보? 연화랑 누님이 벌써 황보세가에 도착했나?”
“아뇨. 그쪽이 아니라 화산파에서 일이 터진 모양이에요.”
“화산?”
화산은 무림맹과 가까이 있는 문파 중 하나다.
같은 섬서성에 있는 문파니까.
가깝다고는 해도 꽤나 거리가 있기에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다.
상황이 조금만 길게 이어져도 지원군이 도착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
뭐, 그렇다고 무림맹에서까지 일을 벌이던 놈들이니 화산파에서 일을 벌이지 않을 리가 없지만…….
“아예 당하진 않았을 거고, 버티고 있나?”
화산파는 술사들이 꽤나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유와 청백이 화산파 출신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술법의 기초는 확실한 문파이고, 당연히 무림에서 손에 꼽히는 신공절학을 가지고 있는 만큼 무인들의 수준도 높다.
웬만한 적의 기습엔 흠집도 안 날 만큼 덩치가 크고 단단하다는 소리다.
“네. 다만, 조금 힘든 모양이에요.”
“하,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 어디서 전력을 그렇게 계속 끌어오는 거지?”
죽여도, 죽여도 계속 나와.
게임에서야 뭐 게임이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현실에서 맞닥뜨리니 감탄만 절로 나왔다.
중원 무림이 넓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고 해야 할까.
대체 얼마나 넓고, 얼마나 사람이 많으면 이렇게 계속해서 튀어나올 수 있는 건지…….
“지원은 누가 갔는데?”
“선검단과 백화단이 조금씩……. 단주급은 없습니다.”
“인원이 부족하긴 한가 보네.”
화산파에 문제가 생겼다는데, 고작 시늉뿐이라니.
하긴 여유가 있었다면 단주급이 자리를 비울 일 자체가 없나.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지원 간다고 해.”
“하지만…….”
“어차피 무리 안 해. 누님 쪽 연락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가만히 처박혀 있을 수만은 없잖아?”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힘은 충분히 모아 뒀지만, 더 많이 모아 두면 더 좋지.
거기다.
‘슬슬 정체기가 왔어.’
술법은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끝없이 다양해지고 있지만, 그 고점이 높아졌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요, 였다.
무공은?
당연히 정체된 지 오래였다.
이 몸뚱이로 화경까지 오른 게 대단한 거였으니까.
다만.
‘가능성은 있다.’
오존회담에서 오존은 전부 다 이견 없이 자신을 그들의 회의에 끼워 줬다.
뛰어난 술사라는 점도 이유겠지만, 그 배경에는 그들이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존조차 인정할 정도의 힘.
술사로서 자신의 역량은 이미 그곳에 도달했다.
단지.
‘완전히 딛고 일어서야 해.’
그것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흑암지규군을 흡수해 얻은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충분한 힘을 손에 넣었지만, 격을 올리진 못했다.
애초부터 자신이 그만한 힘을 다룰 역량이 있어서 급격히 강해졌을 뿐 벽을 넘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수련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확신이 생기고 있었다.
자신이 벽을 넘지 못한 이유도.
‘완전한 자성영역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이유.’
자성영역을 흉내 내는, 그런 제멋대로 움직이는 짝퉁이 아니라.
진짜 스스로를 투영한 자성영역.
그것을 완성하는 순간, 벽 하나를 넘을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 왔다.
그리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선.
“좀 상대할 만한 녀석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실전만큼 좋은 게 없었다.
* * *
“으아아아아아!!”
포효와 함께 휘몰아치는 기세에 설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자신보다 한 수 위의 고수다.
고 호위의 실력에 다시금 확신을 얻으며 설란은 손아귀가 찢어지는 충격을 견뎌 내면서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여기서 밀리면, 연화가 죽는다.
무슨 상황인지, 그리고 왜 저런 짓을 했는지 이유를 듣기 위해선 연화가 살아 있어야 한다.
반드시 지키…….
“그만.”
순간,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 호위와 설란의 힘겨루기가 멈췄다.
두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서 돌아가고.
“……힉.”
자신도 모르게 나온 소리에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설란은 부릅뜬 눈으로 연화와 운주를 바라봤다.
분명 운주의 목을 관통한 연화의 손이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것 참, 신기한 기분이군.”
운주의 목에선 피 한 방울 나오고 있지 않았다.
도리어 목에 손을 박아 넣은 연화가 폭포수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제야 연화와 운주를 차분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된 설란은 흐릿해진 연화의 손에 눈을 크게 떴다.
언젠가 백화단주인 성화린에게서 들은 적 있었던 술사의 비술 중 하나.
영체화(靈體化).
스스로의 신체를 영적인 것으로 바꾸는 술법.
사용하는 데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재능.
재능이 없는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익힐 수 없다는 비술 중의 비술.
실체를 가지지 않은 악귀를 상대할 때 술사의 역량이 극대화되는 특징을 지닌 술법이라고 들었다.
그걸 연화가 지금 사용했다는 것은…….
‘운 공자의 내면에 악귀가 있었다는 건가……!’
그렇게 흔적을 지우고 따돌렸음에도 강시가 따라붙은 이유가 저것 때문인가!
깨달음을 얻은 설란이 아차 했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상황을 지켜보던 고 호위 또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까득!
스스로를 향한 분노에 이를 악문 고 호위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팔을 잃은 주군을 데리고, 도망을 거듭하면서도 그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적의 손아귀에 놀아났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
자신을 향한 그 살의에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곤봉을 거두고 물러난 고 호위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을 쥔 채 선 설란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고 호위는 똑바로 자신의 주군만을 바라봤다.
그리고.
[끼에에에에에에아아가각!]
사람의 것은 확실히 아닌 것 같은 괴성과 함께, 연화의 손에 붙들린 부정형의 형체가 발버둥 쳤다.
그야말로 존재 자체를 비트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연화의 손에서 벗어나려 발악하는 존재를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회색의 기운이 집어삼켰다.
“이건 소화시키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네.”
한 손으로 식은땀을 훔쳐 내며 호흡을 고른 연화는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시선에 어깨를 으쓱였다.
“속인 건 맞지만, 이유가 있어서였어.”
“안다. 제 몸으로 겪고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으니.”
“그럼 다행이네. 높은 공자님의 몸에 함부로 손댔다고 혼날 일은 없겠어. 헤헤.”
웃음을 짓는 연화를 가만히 바라보던 운주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다른 사람에겐 이런 짓은 하지 말도록. 심장이 멈춰 죽어 버릴 테니.”
무인의 손이 자신의 목을 꿰뚫는 경험은 살벌하다 못해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등이 축축해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운주는 연화의 손을 바라봤다.
“그래서, 그게 정확하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나?”
“뭐 별건 아니고, 저주의 일종? 난 먹어 치우는 거 전문이라 잘 모르겠지만, 아마 네게 원한이 있는 인간들을 뭉쳐서 만든 저주일 거야.”
“……내게 원한이 있는 사람을 이용해 만든 저주라는 건가.”
씁쓸한 눈동자로 자신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는 운주를 보던 연화는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원한 안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 단주님도 죽이고 싶어 하는 인간이 수두룩 빽빽한데. 신경 쓰지 마. 이런 저주는 다들 살다 보면 하나쯤 달고 사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너무 나가지 않았니?
“연화야.”
“이건 언니도 인정해야죠! 정파에도 한 무더기는 될 텐데.”
그거야 그렇지만…….
연화의 당찬 대답에 어색하게 웃은 설란이 머쓱하게 입을 다무는 그 순간.
“하긴, 그렇군. 사람은 살아가다 보면 원한을 사는 법이지.”
“그래, 그러니까 스스로 당당하기만 하면 돼! 주변은 신경 쓰지 마!”
방긋 웃으며 손을 휘젓는 연화를 가만히 바라보던 운주는 불쑥 손을 뻗어 연화의 손을 잡았다.
“으, 응?”
예상치 못한 손길에 연화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그 순간.
“그렇다면, 이것은 언젠가 내게 돌려다오.”
“응? 왜?”
“내가 받을 원한을 그대가 대신 짊어질 필요는 없으니까.”
당당하게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똑바로 보는 운주를 바라보던 연화는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안 돼! 이미 흡수해 버렸으니까. 이건 내 거야. 달라고 해도 못 돌려줘.”
“그건 안 될 일이군. 그렇다면 내가 다른 것을 대신 짊어지지.”
“뭘? 짊어질 건데?”
장난스러운 연화의 물음에 운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어 버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대. 그대가 힘들어지는 순간이 오면, 내가 그대를 짊어져 주지.”
“꺄아! 그게 무슨 남사스러운 소리야!”
퍽! 퍽!
“주, 먹이, 강, 하군!”
어깨가 흔들리는 충격에도 꿋꿋하게 입을 여는 운주의 모습에 뺨을 감싸고 웃던 연화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나중에 정 필요하면 부탁할게. 우리 도련님이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흠, 확실하게 약속했으니 믿고 맡기도록.”
“그래. 기대할게.”
운주의 대답에 빙긋 웃은 연화는 이제 슬슬 흡수가 끝난 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는 왜 그러고 있어요? 뭐 해요? 빨리 안 일어서고.”
“나는 사죄할 것이…….”
“아, 됐어요. 빨리 일어나기나 해요. 저주가 풀린 걸 눈치챈 술사가 추적을 보내올 테니까 지금 제대로 도망쳐서 따돌려야 해요.”
온갖 분위기를 다 잡고 있던 고 호위는 연화의 재촉에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흙 속에서도 꽃은 피어나는 법이구나.”
바쁘게 이동하는 도중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 호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고 호위와 운주를 슬쩍 바라본 설란은 이내 자신과 함께 앞에서 달리고 있는 연화를 바라봤다.
옆에서 보니, 얼굴이 꽤나 붉다.
숨이 차서 그런 건 아닐 테고…….
여유가 있다면 놀려 먹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연화야.”
“네. 언니.”
“그, 영체화? 그런 술법은 언제 익힌 거니?”
너 술법 배운 지 몇 년 안 되지 않았니?
3년을 못 채웠을 텐데?
조심스럽게 묻는 설란의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연화는 아하, 하고 손을 들었다.
“이거요?”
흐릿해지는 손.
자유자재로 영체화를 사용하는 그 모습에 속으로 놀라면서 설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전에 단주님한테 대충 배웠어요. 혹시나 해서 해 보니까 되던데요?”
해 보니까 되더라.
어디서 정말 많이 들어 본 소리에 설란은 두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아마 술사적 재능은 나랑 비슷할걸?’
설천위가 연화를 두고 했던 평가를 떠올린 설란은 빠르게 인정하고 포기했다.
“응. 그렇구나.”
그냥 하면 되는 거구나.
내 동생 놈이랑 하는 소리가 똑같네.
너도 조만간에 전이문 열 거니?
차마 그런 말은 꺼내지 못하고, 설란은 열심히 달렸다.
목표로 했던 황보세가가 슬슬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