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530화 (530/624)

제530화

529화-운주 (1)

강시의 악취.

설란은 그것을 느낌과 동시에 강대한 기(氣) 또한 느꼈다.

다만.

‘흔들리고 있어.’

한껏 피폐해진 그 기는 멀리 떨어진 지금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초고수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거겠지.

강시라고 꼭 악인이 부리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무림의 상황을 생각하면 열 중 아홉은 혈교나 혈사련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설란은 확인하고 넘어가는 쪽을 택했다.

적을 따돌리긴 했지만, 언제 추적이 붙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근처의 위협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건 너무 안일한 행동이니까.

위험을 조금 감수하더라도 확인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한 후 움직이는 게 맞았다.

그렇기에 연화와 함께 전투의 소음이 시작되는 곳에 도착한 설란은 상황을 눈에 담고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정리한다.”

“네.”

전투 상황에 들어간 설란의 딱딱한 목소리에 연화의 대답이 따라온다.

그리고 단숨에 전장에 파고든 설란의 검이 수십 송이의 꽃을 피워 냈다.

얼음으로 만든 꽃은 그 잎에 예기(銳氣)와 한기(寒氣)를 품고 적의 살을 가르고 얼렸다.

그런 설란의 뒤를 따라 진입한 연화는 몸에 영력을 두른 채 적들 사이를 누볐다.

설란처럼 복잡함이 화려함으로 화해 아름답기까지 한 초식 같은 건 없었다.

최단의 이동, 최단의 공격.

그 안에 품은 최선의 일격이 적의 턱을 깨부순다.

철저하게 급소만을 노리는 공격은 적을 일격에 죽일 힘 따위 품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원하는 것은 파괴.

강시를 상대로 단숨에 죽인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적의 행동을 멈추게 하는 것.

가볍게 턱을 깨부수는 연화의 주먹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강시의 사지를 터트렸다.

갑작스레 나타나 자신을 돕는 두 사람의 모습에 공격을 받던 사내는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저들이 왜 도와주는지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강시의 숫자는 열하나.

치밀하게 합격진을 구사해 오던 적들의 균형을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이 흐트러트린 지금.

“흐읍!”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찾아왔다.

사내가 손에 쥔 곤봉에 선명한 강기가 맺힌다.

불안정한 사내의 몸 상태를 증명이라도 하듯 강기는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그 안에 담긴 힘만큼은 확실하게 그 흉포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기를 두른 곤봉을 사내가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진법의 빈틈을 드러낸 강시들의 머리통이 터져 나간다.

단숨에 강시 둘의 머리통을 깨부순 사내는 그대로 전투를 이어 나갔다.

한번 적의 흐름을 깨부수자, 전투는 순식간에 사내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갔다.

거기에 더해 적의 움직임 자체를 묶는 데 특화된 설란의 무공과 애초에 강시를 상대하는 것이 전문 영역인 연화의 활약은 순식간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후우.”

마지막 남은 강시의 머리통을 뽑고 그 가슴을 꿰뚫어 버린 연화는 강시의 사기(死氣)를 흡수하는 괴연천식(傀然天食)을 다스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괜찮으십니까.”

“……조력에 감사를 표하오.”

깔끔해진 상태로 겨우 호흡을 고르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간 설란은 아직도 경계심이 가득한 사내의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다섯 걸음 이상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선 설란은 가만히 사내와 그 동료를 살피곤 품에서 연고를 꺼내 바닥에 내려놨다.

“금창약입니다. 지금이라도 상처에 바르면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약을 두고 일어선 설란은 망설임 없이 물러났다.

경계심이 가득 찬 상대에게 무리하게 접근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무엇보다.

‘황실인가?’

사내의 무공은 황실의 것이었다.

아마 황실의 자제들 중 하나가 탈출했고, 그 호위무사가 함께하고 있는 거겠지.

호위무사의 무공 수준이 화경인 것으로 보아 자제의 지위도 꽤나 높을 터.

강시에 습격을 받은 연유를 듣고 싶긴 하지만…….

‘황보세가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황실은 아직 건드릴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황보세가의 일이 진행되면 자연스럽게 황실 쪽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지금 굳이 무리해 황실 쪽과 연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쫓기는 이들을 거두어 봤자 황보세가의 일을 처리하는 데 부담만 늘어날 뿐.

미련을 가지지 말고 강시를 처리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일단 물러나는 것이…….

“잠깐! 그대들은 누구인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강시의 힘을 흡수하고 있는 연화에게 다가가려던 설란은 어린 소년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솔직하게 놀랐다.

사내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소년의 눈에는 공포가 없었다.

힘이 약해서 숨어는 있었으나, 지금의 상황에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는 뜻이다.

단순히 철이 없는 건가?

아니.

‘그래 보이진 않는군.’

그렇다고 하기엔 눈빛이 너무 강렬했다.

확실하게 상황을 인지하고,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천위를 떠올리게 하는 눈빛이네.’

몇 년을 못 보다가 오랜만에 만났던 동생.

스스로의 무재(無才)에 항상 기죽어 있던 녀석의 눈이 어느 순간 저렇게 변해 있었다.

불굴(不屈)의 정신.

결코 흔들리지 않는 패기로 가득 찬 눈동자.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나가던 설란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무림맹의 무사들입니다. 임무를 위해 이동하던 중이었습니다.”

“임무라면……. 혹 황실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무림의 일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말해 줄 수 없다.

그런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설란의 대답에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동행을 부탁해도 되겠는가?”

“ㅍ……, 공자님!”

“그만! 자네는 이미 너무 지쳤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것이 옳아.”

다급히 입을 여는 사내를 한 손으로 말린 소년은 선명한 눈동자로 설란과 연화를 보며 말했다.

“과, 아니 나는 운주라고 하네.”

“운 공자님, 저희는 목적이 있어서 움직이는 도중입니다. 호위를 해 드릴 순 없습니다.”

단호한 설란의 대답에도 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도 좋네.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내 호위무사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 터이니. 우리가 몸을 추스를 때까지만이라도 함께하고 싶네.”

“임무 중이기에 저희를 추적하는 무리도 있습니다.”

“더더욱 좋군.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서로 부담을 나누면 그만큼 여유도 생기겠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 계속 들이대는 운주의 모습에 설란이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 순간.

“야! 근데 넌 왜 자꾸 싸가지 없게 언니한테 반말이야!”

연화의 외침에 미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 * *

“헤헤, 난 또 뭐라고. 귀족님이셨군요!”

“됐다. 존경심이 담겨 있지 않은 존대는 의미가 없으니.”

“그래? 좋네! 나도 반말이 편해!”

연화의 외침 후 흘렀던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설란은 결국 동행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유는 몇 가지 있었지만…….

“자! 우리 조직의 특제 육포! 이건 먹을 만할걸?”

“음, 나쁘지 않군.”

연화가 도와주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정말 동행하기 싫었다면 운주가 반말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감사하오.”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돕는 것이 강호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설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으나, 사내는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추가된 것만으로도 불침번을 돌릴 여유가 생겼고, 휴식도 제대로 취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으니까.

거기다.

‘술사라니.’

이쪽의 흔적을 지우고 거짓 흔적을 남기는 연화의 솜씨는 확실히 숨통을 트이게 만들어 줬다.

술사가 왜 그런 것에 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든 잘하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초생단의 부단주와 흑룡단의 부단주라…….’

이미 두 사람의 정체를 파악한 사내는 살짝 마음의 평온을 얻은 상태였다.

긴장을 늦추진 않았으나, 그 수준의 정도가 확 풀어진 느낌.

마지막 긴장의 끈은 놓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여유가 좋았다.

체력에 여유가 생기고, 심리적으로 평온을 되찾으니 상처의 회복도 빨라진 느낌이다.

“후, 일단 적의 추적이 상당히 늦어진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요 며칠, 적의 습격은 두 번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제오늘 줄어들던 습격은 이제 아예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니 적들이 자신들의 흔적을 놓친 게 확실해 보였다.

“연 소저의 덕입니다.”

“고 호위님도 도와주셨으니 가능한 일이죠.”

연화의 흔적 지우기를 도왔던 고 호위의 솜씨를 떠올리며 설란은 살짝 눈을 감았다.

고 호위는 복면을 쓰고 있는데, 복면 밖으로 드러난 눈과 이마에도 큰 흉터가 있었다.

그것도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화상 자국이.

아마 복면 아래에도 화상으로 인한 흉터가 있겠지.

‘이쪽의 정체는 진즉에 들킨 것 같지만.’

저쪽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니 쉽사리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물론.

“신기하지?”

“호오, 이건 확실히 신기하구나.”

고관대작의 아들이라는 건 신경 쓸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체감을 못 하는 건지 연화는 동년배인 운주를 한껏 긴장을 푼 채 대했다.

진짜 친구라도 된 것처럼 이리저리 떠드는 모습이…….

‘너무 훈련만 시켰나…….’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저렇게 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인데, 너무 각박하게 굴진 않았나.

아니, 천위의 말대로라면 원래 무림을 떠돌던 굳센 아이라고 했는데.

애초에 저렇게 붙임성 있는 성격이었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윤혜와 아이들이 너무 패서 그랬던 것뿐인 건가?’

그러면 돌아가서 진짜 적당히 훈련시키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여러모로 걱정이 될 만큼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연화 때문에 설란의 고민이 여러모로 깊어지던 그때.

“언니.”

즐겁게 떠들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차가운 연화의 목소리에 설란은 즉시 검을 뽑았다.

동시에, 고 호위 또한 곤봉을 뽑아 움켜쥐었고.

파바박!

사방에서 솟구친 강시들과의 전투가 시작됐다.

“공자님!”

전투의 시작과 동시에 운주의 곁으로 뛰어간 고 호위가 곤봉을 휘둘렀다.

달려오던 강시 셋이 단숨에 가슴을 가격당해서 튕겨 나갔지만, 그 뒤를 따라온 강시가 즉시 빈틈을 메웠다.

“언니! 먹어 치울게!”

그리고 그런 고 호위의 곁에서 두 주먹을 움켜쥐고 소리치는 연화의 모습에 설란은 즉각 반응했다.

먹어 치운다는 말은 신호였다.

연화가 주력으로 삼는 박투술이 아닌 술법을 중심으로 싸우겠다고 선언.

당연히 그에 맞춰 움직여 줘야 했다.

연화의 계획에 즉시 반응한 설란은 검으로 적을 제압하는 데 중점을 두고 움직였다.

적을 확실하게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적의 움직임을 묶는 형태로.

그리고.

[괴연천식(傀然天食)]

연화의 능력이 단숨에 강시들을 집어삼켰다.

치솟은 검회색의 기운이 강시들을 덮치자, 강시들은 마치 고장 난 기관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적들의 갑작스러운 정지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물러난 고 호위가 운주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쩌적! 쩌적!

강시들의 몸이 갈라지는 것과 함께 솟구친 보라색의 기운이 검회색의 안개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열 구가 넘는 강시를 파괴한 연화의 술법에 고 호위와 운주가 감탄하던 그 순간.

“역시.”

어느새 고 호위의 바로 뒤까지 다가온 연화가 손을 뻗었다.

꽉!

“큭!”

“놈!”

갑작스레 운주의 어깨를 움켜쥐는 연화.

운주의 고통스러운 신음에 고 호위가 살기를 뿜어내며 곤봉을 휘둘렀으나, 운주가 들어 올린 손이 그런 고 호위의 곤봉을 막았다.

어느새, 연화의 뒤에 서서 검을 내밀고 있었던 설란 또한 움직임을 멈추고 서로를 향한 기세가 살기로 변해 넘실거리는 그 순간.

“역시, 너는 나를 가엾이 여겨서 그리 친절히 대한 것이더냐.”

씁쓸한 운주의 목소리에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운주의 어깨를 잡고 있던 연화의 손이 운주의 목을 움켜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단숨에 떨어지는 고 호위의 곤봉을 설란의 검이 막아 내고.

목을 내주었음에도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던 운주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즐거웠다. 연화.”

삶을 포기한 미소와 함께 연화의 손가락이 운주의 목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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