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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529화 (529/624)

제529화

528화-흑룡(黑龍)은 암운(暗雲)을 먹는다 (4)

황보척은 자신 있었다.

어떤 문제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더라도 갈고닦은 가문의 주먹으로 얼마든지 깨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그리 확신했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했는가?

자신 있게 흑룡학관에 교환학생으로 갔다가 놈들의 수작에 걸려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때부터 황보척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비웃음이 담긴 시선.

오만함 때문에 철백에게 패했을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던 황보척의 자존심은 그런 조롱의 시선에 찢기고, 꺾여 갔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

아무도 없었다.

같이 학관을 다니는 동생?

형으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다른 놈들?

제 친우라 믿었던 놈들은 자신의 패배에 하나같이 비웃음의 눈초리를 보냈다.

고독했다.

가문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치료가 끝나 학관에 복귀한 뒤에도.

비웃음은.

조롱은.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다.

무림맹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가문의 무력대에 들어가 홀로 겉돌며.

“크크큭.”

황보척은 자신감을 되찾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 * *

“이건 진짜 위험해.”

패력단주 황보중이 참석해 열린 회의.

모두를 모아 놓고 설천위는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황보척의 실력이 상당히 좋아진 것 같긴 하지만, 문제가 될 수준인가?”

드물게 적극적으로 말을 꺼내는 철백의 모습에 몇몇 이들이 신기해했지만, 설천위는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문제가 될 거 없어. 문제는 황보척을 따르는 이들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는 점이야.”

“으음, 정신에 간섭하는 술법일 확률이 높은가 보네요.”

“그래.”

“그런데…… 무인의 정신은 쉽사리 헤집을 수 없지 않나요?”

연화의 지적에 설천위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문제인 거야. 패력단주님께 보고가 될 정도로 이상행동을 보이는 무인들이 그만큼 많이 생겼다는 뜻이니까.”

“아,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는 건가요?”

“그렇겠지. 그리고 술법의 제물은 당연하지만, 일반인보다는 무인이 더 좋아.”

하물며, 외공을 꽤나 심도 있게 단련하는 황보세가의 무인이라면 더더욱 좋다.

“이 정도로 진행됐으면, 황보세가에 언제 참사가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참사(慘事).

죽음을 암시하는 그 단어에 황보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얼마나 여유가 있겠나?”

“이 서한이 도달한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여야 해요.”

“그럼 바로.”

“아뇨. 패력단주님은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설천위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서던 황보중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움직이는 순간, 놈들이 움직일 거란 소린가?”

“지금 가문을 정상으로 되돌릴 힘이 있는 사람은 가주님이니까요.”

당가가 왜 그 개판이 났던가.

가주가 주기적으로 복귀해서 가문을 살피지 않고 맹에 처박혀 정치놀음에 빠져서 그런 거다.

지금 만독단주는 거의 폐관에 가까운 상태의 가문으로 돌아가 처박힌 상태다.

만독단은 부단주가 힘겹게 운영하고 있었고.

당화유도 돕고 있으니 어느 정도 굴러가고는 있는 것 같지만.

여하튼, 가주라는 존재는 이 무림에서 정말 큰 존재감을 지닌다.

일종의 가문의 왕이라 할 수 있으니 명분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해야 할까.

사람의 심리를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주라는 존재다.

술법의 세뇌를 받지 않고, 여론에 휩쓸려 움직이던 이들을 단숨에 휘어잡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존재는 수작질을 부리고 있는 이들에겐 당연히 크나큰 위협이 된다.

가주가 가문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저들도 머저리가 아니니 조금 부족하더라도 먼저 일을 진행시키는 방향으로 서둘러 움직일 거다.

그리고.

“그렇다면 흑룡단주, 자네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 아닌가…….”

황보중의 씁쓸한 목소리에 다른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중이 가주라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계획을 방해할 수 있는 존재라면, 설천위는 그냥 계획 자체를 깨부술 수 있는 괴물이다.

웬만한 강자는 상대도 안 되는 무력에다 긴 세월 준비한 술법을 단숨에 날려 버릴 수 있는 뛰어난 술법까지 지녔으니.

황보중이 움직이는 것보다 더 격하게 반응하면 반응했지, 그보다 못하진 않을 거다.

“뭐, 그렇죠. 저는 직접 못 움직이죠.”

“답답하군. 다른 방법을 찾기에는 시간이…….”

“에이, 방법을 뭘 찾아요? 방법이 없으면 단주님을 여기 앉혀 놓지도 않았죠.”

갑갑하게 눈을 감았던 황보중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방법이 있다고?

그럼…….

“바로 움직이죠.”

* * *

“……왜 또 저일까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연화는 입술을 삐쭉였다.

“불공평한 세상…….”

술법도 하고, 무공도 하는 게 무슨 죄라고 유독 나만 이렇게…….

“연 부단주는 아직 얼굴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니, 나름 합당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휴, 그렇죠? 늦은 녀석이 잘못이겠죠? 에휴, 그나저나 언니 왜 자꾸 말을 높이세요?”

단주님의 누님이나 되시는 분이 왜?

“이러면 가는 동안 제가 힘들어요! 말 편하게 해 주세요!”

“……그럼 그럴까?”

“네! 히히, 그나저나 흑룡단에 들어온 뒤로 좋은 언니들이 많아서 좋아요.”

“언니들만?”

“오빠 놈들은 불러 주면 표정이 이상해져서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어요.”

흑룡단도 기강을 한번 잡아야겠구나.

연화의 말에 속으로 해이해진 흑룡단의 기강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설란은 어느새 우울함을 떨쳐 버리고 흥얼거리고 있는 연화를 바라봤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술법적인 역량까지 있는 인재.

부단주인 연화가 유일하다시피하고, 심지어 그녀는 인지도도 거의 없어서 거리를 걸어가도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이름을 들어 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워낙 어려 보이는 외견 탓에 아예 떠올리지도 못하고 넘어가 버렸다.

즉, 생각보다 은밀하게 행동할 수 있어 좋았다.

더불어 자신도 활동 경력에 비해 외부 활동이 적어서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적었다.

외모 때문에 자꾸 시선이 쏠려서 면사를 쓰긴 했지만.

아무튼, 연화와 설란 두 사람의 조합은 생각보다 은밀하게 이동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황보세가로 향하는 길.

“흐하하하! 아름다운 계집들이로군! 가진 것을 전부 내놓고 옷을 벗어라. 그럼……. 끄아아아악!”

요즘 급격하게 늘고 있다는 산적 놈들은 악령을 씌워서 한동안 밥을 못 먹게 만들고.

“이곳에 꽃이 두 송이나 피어 있군! 내 좋은 술을 대접할 터이니 어디 한……. 끄아아악!”

“이 아이는 미성년자입니다. 퇴비 공자.”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마구 들이대는 한량의 손목은 꺾어 주고.

“흥! 감히 왕보문을 무시해?!”

“네놈들이 먼저 시비를 걸지 않았느냐! 우리 왕부문을!”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나요?”

객잔에서 난리 치는 놈들도 어루만져 주고.

“크악! 살수냐!”

“죽어라! 부모님의 원수!”

웬 야산에서 맞붙고 있는 놈들은 무시해 주고.

그렇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연화와 설란은 은밀히 황보세가를 향해 나아갔…….

“전혀 은밀하지 않아!”

아니! 너무 대놓고 움직이는 거 아닌가?!

가도 위.

가볍게 검을 닦아 내고 있는 설란을 바라보며 연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 저희 너무 드러내 놓고 움직이고 있진 않나요? 이, 조금 더 조용히 움직이는 게…….”

“충분히 조용히 움직이고 있지 않니?”

“그…… 객잔에서 시비 같은 게 걸리면 무시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다못해 분쟁에 끼어드는 것만이라도…….”

“주변에 폐를 끼치고 있는 놈들을 가만둘 순 없지 않니. 나름 무인을 자처하는 놈들인데, 우리의 손으로 막지 않으면 일반 양민들에게 피해가 간단다.”

아, 그건 아는데요.

그 우리도 사정이란 게…… 있지 않나요?

그 패력단주님이 아시면 피가 거꾸로 솟구쳐서 그 여파로 제가 내상을 입을 것 같은데요.

답답할 정도로 대화가 막히는 기분에 연화는 두 눈을 감았다.

설란은 이랬다.

대화?

평소엔 잘 통한다.

아니, 대부분의 대화에서 문제없이 통한다.

상대방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들어 주고, 또 충분히 생각해서 자신만의 답을 들려주니 정말 대화하면 할수록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대화가 잘 통한다.

그런데.

유독 이런 부분에서는 벽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전혀 말이 통하질 않았다.

아니, 대화(對話)라는 것이 상대[對]와 이야기하는[話] 것인데, 이걸 과연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응,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런 부분에선 내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는 걸까.

객잔에서 작업을 걸어오던 한량 때부터 줄곧 했던 얘기지만, 설란은 도통 연화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소한 문제들이 이어지는 여행길 끝에.

“……내 이럴 줄 알았어.”

황보세가가 자리 잡고 있는 도시 앞에서 연화는 적들과 조우하게 됐다.

* * *

“잘 가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지하 투기장의 관중석.

그곳에 앉아 다리를 까딱이던 설천위는 옆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유예린을 바라봤다.

“연화와 설란 언니 걱정인가요?”

“응, 누님에겐 잘 말해 두긴 했는데 솔직히 위험한 일이니까.”

“그래서 이렇게 자잘한 곳만 털고 있나요?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그것도 있긴 한데…….”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포로를 살피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몇 가지 실험할 게 좀 있거든. 사람을 상대로 할 짓은 아닌지라.”

“일단 밟고 있는 것도 사람이긴 한데요.”

“에이, 애들 사다가 투기장에 세우는 놈은 사람 취급을 못 해 주지.”

얘는 데려다가 약간의 실험에 쓸 거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누님보고 일부러 조금씩 시선을 끌라고 했는데,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은밀하게 가야 한다고 하더니 시선을 끌라고 했다고요? 공자도 너무 물렁해요. 패력단주 보고 뭐라 할 처지가 아니네요.”

“뭐, 그렇지.”

유예린의 지적에 설천위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화에게는 괜히 겁먹을까 봐 말하지 않았지만, 설란과 연화는 미끼의 역할도 함께하고 있었다.

적당히 시간을 끌어 황보세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진행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역할.

거기다.

“아직까지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놈들이 제대로 정보 공유를 안 하고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네.”

만약 황보세가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놈들이 공동파와 연관되어 있는 놈들이라면, 또 그들에게서 사건에 대한 정보를 받고 있는 이들이라면, 설란이 설천위를 불러들일 수 있는 모종의 수단을 가지고 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을 거다.

안다면, 어떻게든 설란을 저지하려고 상당한 전력을 투입할 거고.

모른다면, 건들지 않거나 약간의 견제 정도만 할 것이다.

전자라면 설란은 황보세가에 도달하기 전에 설천위를 불러낼 것이고, 후자라면 황보세가에 도착한 다음에 불러내겠지.

이게 충분한 시간 끌기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 * *

“달려라!”

“달리고 있어요!”

황보세가에서 보낸 것으로 추측되는 이들을 피해 도주하는 설란과 연화는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사실 달리고는 있었지만, 그리 조급하지는 않았다.

이미 반쯤 따돌렸으니까.

그럴 여유가 없었다면, 아예 적을 쓰러트리는 데 집중했거나 설천위를 불러냈을 거다.

‘……최후의 수단이지만.’

황보세가를 구하기 위해선 최후의 최후까지 설천위를 아껴야 한다.

그렇기에 마지막의 마지막에나 불러낼 거다.

설란은 다시금 각오를 다지며 달리다가 이내 걸음을 멈췄다.

거의 비슷하게 걸음을 멈춘 연화 또한 두 눈을 번뜩이며 영력을 끌어올렸다.

“언니.”

“……고민해 보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전투음에 잠시 고민하던 설란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강시의 악취가 나네. 처리하고 움직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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