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8화
527화-흑룡(黑龍)은 암운(暗雲)을 먹는다 (3)
“흐음.”
청곤을 사로잡아 흑룡단으로 돌아온 설천위는 집무실에 앉아 턱을 괸 채 고민했다.
청곤의 처우?
이미 끝났다.
오랜만에 썼지만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는 낙인을 혼에 새겼으니, 그는 이제 죽은 것과 매한가지다.
설령 화산이 도(道)를 이룬 술사들이 사는 도문이라고 해도 풀어 줄 순 없을 거다.
애초에 풀어 줄 리도 없지만.
청유와 청백에게 듣기로 화산의 술사들은 꽤나 콧대가 높았다.
제자라고 한들 죗값을 치른 죄인을 그냥 치료해 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청곤은 이제 머릿속에서 지워도 상관없다.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까.”
그 뒤에 있는 놈들이다.
죄를 묻으려고 입김을 불어넣었던 꼰대들.
그놈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완전히 복수를 끝냈다고 하기에는…….
[됐다. 당사자들을 처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도 아쉬운데요.”
[놈들의 죄는 제 식구를 감싼 것뿐이다. 앞으로 네 일에 방해가 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처벌할 가치는 없다.]
고개를 저은 현태중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그건 인간의 본성이고, 제 무리를 챙기는 것은 짐승의 본능이지. 나 또한 죄인이니, 내 복수는 여기에서 끝내는 것이 옳다.]
“……후, 아저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좋아요. 당사자인 황보세가의 말종까지만 정리하고 끝내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는데, 다 철회해야겠네.
뭐…… 계획이라고 해 봤자 적당히 틈을 드러내게 만든 뒤 그 틈을 찔러서 피를 보도록 유도하는 것뿐이지만.
“좋아요. 그럼 이대로 그냥 황보세가나 들이박죠?”
[그건 좋은 생각이구나.]
[쯧쯧, 너는 너무 잔인하니라. 자고로 처벌이란 깔끔하게 목을 베는 것이…….]
혀를 차는 소백진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는 집무실을 나섰다.
철백과 서하영은 수련이나 하겠다고 했으니까…….
“유 매를 데려갈까.”
그쪽이 조금 더 협박엔 좋을 것 같은데.
우리 마눌님이 협박에는 참 능통한…….
“다, 단주님!”
느긋하게 복도를 걸어가던 설천위는 저 멀리서 달려오는 부하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리 다급하게 달려오지?
“패, 패력단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오, 급할 만한데?
* * *
흑룡단의 정문.
그곳에 선 거한의 흉흉한 분위기에 흑룡단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무기를 꽉 움켜쥐었다.
‘대, 대체 무슨 용무로?’
‘단주님이 선검단을 들쑤시고 오셨다던데, 그 일 때문인가?’
‘패력단은 선검단이랑 별로 안 친했던 것 같은데?’
서로 눈빛으로 고민하던 단원들의 손에서 어느새 긴장으로 흐른 땀이 방울져 떨어져 내리는 순간.
“왜 또 그렇게 폼은 다 잡고 계신데.”
“무슨 소리냐?”
“아니, 왜 그렇게 분위기를 잡고 계시냐고요.”
가볍기 그지없는 언동과 함께 걸어오는 설천위의 모습에 단원들의 긴장은 단숨에 풀어졌다.
안도감.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그 감정에 단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무기를 내리고 손에 밴 땀을 바지춤에 닦았다.
그리고.
“……예전에는 저러지 않았는데.”
훈련하다 말고 튀어나왔던 서하영은 이제는 뭐 웬만한 왈패 부럽지 않은 설천위의 껄렁껄렁한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옛날에는 나름 진중한 맛이 있는 인간이었던 것 같은데, 흑룡학관에 다녀온 뒤부터였나? 뭔가 본격적으로 사람이 삐뚤어진 듯한 느낌이다.
그야 상대방을 방심시키려고 저런 태도를 취한다는 얘기를 본인에게서 직접 듣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냥 편해서 저러는 것 같은데.’
진짜 왜 정파 출신인 거지.
“흑룡단주, 단둘이 긴밀히 얘기할 것이 있다.”
“그럼 은밀히 찾아오시는 게 맞을 텐데, 왜 정문에서 이러고 계신데요? 뒤에 그놈은 왜 끌고 오셨고?”
설천위의 지적에 패력단주의 뒤에 있던 이가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여태까지 패력단주의 존재감에 가려져 그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단원들은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 깜짝 놀랐지만, 설천위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거, 우리 패력단주님은 역시 머리가 좋으시네.”
계산이 아주 빨라.
아예 팔짱을 끼고 자리에 선 설천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패력단주는 말없이 자신의 등 뒤에 있던 사내의 어깨를 붙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우리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놈이다. 그 사죄를 위해 찾아왔다.”
“호오호오, 그래서요?”
더 말해 봐라.
그런 설천위의 신호에도 패력단주는 표정의 흐트러짐 하나 없이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내려다봤다.
감정이라곤 담겨 있지 않은 차가운 시선에 사내는 바들바들 몸을 떨며 무릎을 꿇었다.
“화, 황보세건이오. 내, 내가 이 자리에 오, 온 건…….”
바들바들 떨면서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는 그의 모습에 설천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 그 순간.
뿌득!
“끄으아아아아악!”
“얼버무리지 마라.”
패력단주가 밟은 사내의 정강이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내장을 쏟아 내는 것 같은 끔찍한 비명과 함께 눈물과 침을 질질 흘리던 황보세건이 땅에 고개를 처박았다.
“예, 예전에 무림학관을 다니던 시절에 학우를 핍박해 죽음으로 내몰고…….”
몸을 비틀면서 자신의 죄를 뱉어 내는 황보세건을 가만히 지켜보던 설천위는 최근에 저지른 횡령의 죄까지 고하는 것을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패력단주님.”
“필요하다면, 어떤 보상이라도 하겠다. 속죄는 불가능하지만, 사죄라면 가능할 것이다.”
당당하게, 하지만 오만하지 않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패력단주를 보던 설천위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보다 더 물렁한 양반이었네요. 당신.”
사람이 너무 착해.
바닥에서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울고 있는 저놈이 그 마음을 알까 몰라.
* * *
패력단주가 끌고 온 황보세건은 지하 뇌옥으로 끌려갔고, 설천위는 패력단주와 함께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흑룡단 정문.
“왜 물렁한 거지?”
“엄청 살벌한 거 아닌가?”
본인의 손으로 자신의 친척을 붙잡아다가 넘긴 거 아닌가.
냉정하다 못해 피도 눈물도 없는 선택인데, 대체 왜 물렁하다는 걸까?
누군가의 그런 의문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진짜로 그러니까.
앞으로 술사들의 필요성이 강조될 테니 흑룡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혈족도 넘겼다.
냉정하다 못해 비정하고, 살벌한 선택이다.
그런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면서 제 손으로 그 혈족의 다리까지 으스러트리는 인간이 대체 왜 물렁하다는 거지?
“에휴, 아는 만큼 보이는 거지.”
그런 부하들의 반응에 혹시 몰라 나와 있던 연화가 뱉은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뭐, 왜요?”
“부단주님, 단주님이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고 계신 거예요?”
“알면 좀 가르쳐 주세요!”
“가르쳐 주긴 뭘 가르쳐 줘요. 이런 건 단주님이랑 좀 지냈으면 누구나 알 수 있…….”
단원들의 시선을 분산시켜 줄 동료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연화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쓱 돌리는 삼귀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아니, 진짜로 몰라요?”
“흠흠, 아는데. 그래도 우리 동생이 설명해 주는 게…….”
“이럴 때만 동생이지. 으휴, 답답이들. 무공만 더럽게 강해선.”
얘가 대련 때 너무 처맞아서 머리가 돌았나?
은근슬쩍 자신들을 까는 연화의 언행에 소윤혜의 눈빛이 변하려는 순간, 연화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언니가 그리 말하니 제가 설명해 드리죠!”
‘아, 피했다.’
‘피했네.’
희미하게 드러낸 소윤혜의 살벌한 기세를 재빨리 감지한 단원들이 허허롭게 웃든 말든 연화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간단해요. 자수해서 광명 찾은 거죠.”
“광명?”
“에이, 생각해 봐요. 단주님이 직접 가서 잡아 오면 어떻게 돼요?”
직접 가서 잡아 오면?
“단주님이 직접 처벌하겠지?”
“정답. 그걸 피하려고 일부러 가문의 이름까지 깎아내리면서 이런 짓을 한 거예요.”
“응?”
“단주님이 적한테 좀 잔인해요? 단주님이 직접 손을 쓰는 순간, 폐인 확정. 아니, 그 수준을 넘어서서 혼 자체가 피폐해지겠죠.”
술사인 만큼 혼을 깊고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연화는 알고 있었다.
설천위가 쓰는 낙인은 사람에게 쓸 만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직접 본 건 지금 뇌옥에 갇혀 있는 청곤이라는 사람뿐이지만.
설천위는 그런 낙인을 전에도 사용한 적이 있다고 했다.
연화가 알아챈 것을 다른 술사들이라고 알아채지 못할까?
실력이 있는 술사라면, 혹은 영적인 영역까지 감지할 수 있는 강자라면.
“다리가 으스러지고 뇌옥에 처박히더라도 단주님의 손에 당하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다. 이거죠.”
“하지만…… 뇌옥에 갇히면 단주님이 손을 쓸 텐데?”
“그래서 직접 나선 거예요. 황보세가의 이름을 걸고. 직접 사죄한 거죠.”
“아.”
“가문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 가문의 이름을 걸고 가주가 나서서 무릎을 굽힌 거죠.”
연화의 설명에 그제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이름이 더해진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싶겠지만, 무림에서 가문의 명예는 아주 중요하다.
특히, 가주가 직접 나서서 사죄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과거에 묻었던 죄라면 더더욱.
가문의 이름에 먹칠한 수준이 아니라 오물을 뒤집어쓴 결과이고, 그 정도로 깊게 고개를 숙였으니 약간의 장애를 남기는 수준에서 멈춰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제야 상황을 전부 이해한 소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물렁한 양반이었네.”
나였으면 목을 잘랐을 텐데.
* * *
“참 물렁하고 속내가 깊은 사람이네요. 패력단주님은.”
다혈질이고 자존심 강한 인간이 참…….
패력단주의 앞에 놓인 잔에 차를 채우면서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뭐, 됐습니다. 그놈은 단전을 폐하고 사지근맥을 자르는 것으로 봐 드리죠.”
“고맙네.”
짧게 고개를 숙이는 패력단주를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자, 그럼 과거는 청산했으니 진짜 원하는 이야기를 꺼내시죠.”
패력단주는 결코 올바르기만 한 인간은 아니었다.
가문을 아끼고 가족을 아끼지만, 그것에만 연연하지 않으며.
정의롭고 호탕한 자를 좋아하지만, 그것만을 가슴에 품진 않는다.
그가 자신의 친지를 지키기 위해 가문의 이름을 내려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란 소리다.
“도와주게. 기어코 선을 넘었네.”
선을 넘었다.
패력단주의 그 한마디에 설천위는 감탄과 함께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야, 황보세가 역시 배포 하나는 장난 없네요.”
당가를 정리하고 돌아와 마주했던 패력단주와의 대화.
그때 들었던 혹시 하던 정보가 확신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마(魔)가 끼었네. 황제가 사라졌어.”
“그건 참, 그럼?”
“……가문의 몇몇 놈들이 그 일에 연루되었네.”
“술법에 조종당했는지, 악귀에게 홀렸는지, 아니면 자의로 그런 것인지도 모르고요?”
“자의로 그랬을 리가 없네. 그 정도의 사리 분별은 있는 자들이야.”
“그렇다고 믿고 싶은 건 아니고요?”
고개를 저은 패력단주는 앞서 정문에서 보여 줬던 것과는 다른, 힘이 빠진 눈빛으로 찻잔을 어루만졌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움직여야 하네. 이 이상 가문이 선을 넘는 것을 용납할 순 없어.”
찻잔을 쥐는 그의 손등 위로 힘줄이 솟아올랐다.
이윽고 몇 번의 호흡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가라앉힌 패력단주는 품에서 서한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어제 도착한 서한일세. 내 처가 보낸 것이지.”
부드러우면서도 다급함이 느껴지는 필체의 편지를 펼친 설천위는 침착하게 편지를 읽어 내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위험하네요.”
위험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병상에 누워 있다가 일어난 패력단주의 아들, 황보척.
지금 패력단에서 대주로 활동하고 있는 황보택의 형이자, 흑룡학관에 교환학생으로 갔다가 제대로 두들겨 맞고 쫓겨났던 그 친구다.
가문에서 치료를 받고 복학한 것을 설천위도 봤지만, 조금 조용해졌을 뿐 별다른 문제는 없었던 녀석인데…….
“얘, 이미 먹혔을 수도 있어요.”
왜 네가 악귀의 몸종 노릇이나 하고 있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