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7화
526화-흑룡(黑龍)은 암운(暗雲)을 먹는다 (2)
동시에 사라졌던 맹주와 흑룡단주가 무림맹으로 귀환했다.
애초에 그 두 사람이 사라졌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이들이 대다수였으나, 그래도 단주급 이상의 인물들은 알 수밖에 없었다.
지금 곳곳에서 무더기로 일거리가 쏟아지고 있는데, 중심을 잡고 통제해 줘야 할 사람이 부재중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단주들은 애초에 흑룡단주의 거취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던 터라 알 수밖에 없었다.
그 둘이 동시에 사라졌다가 동시에 귀환했고, 더불어 소림의 방장 또한 움직였었다는 정보까지 들어오자, 사람들은 빠르게 사태를 파악했다.
맹주와 불존, 흑룡단주가 손을 잡았다.
이건 정치적으로 흑룡단주와 좋지 않은 관계에 있는 이들에게는 썩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일단 맹주는 정치적으로 매우 미묘한 위치를 고수하는 인물이다.
중립을 표방하며 특정 조직이 뭉치는 것을 막고, 한쪽으로 힘이 쏠리는 것을 견제하는 식으로 무림맹 내부의 정치 구도를 조율했다.
구파일방이 무림맹의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최소 두 개 이상의 단(團)을 거느리고 있는 것도, 오대세가 각자가 구파일방과 비슷하거나 더 많은 단(團)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맹주가 총군사와 함께 내부 정치를 절묘하게 조율한 덕에 나온 결과물이었다.
동시에, 이 미묘한 균형이 이루어 낸 평화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암묵적인 동의로 만들어진 결과물이기도 했다.
맹주가 제아무리 뛰어나고, 총군사가 제아무리 명석해도 한계는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들의 암묵적인 동의는 당연히 이익으로 인해 성립된 것이었다.
명예 혹은 금전적 이득을 바탕으로 현세대의 무림은 지금의 평화에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평화를 마구 헤집는 미꾸라지 같은 흑룡단주와 맹주가 손을 잡았다?
정치적으로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엄연한 배반 행위였다.
당연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 거센 항의가…….
“……오지 않는군.”
오지 않았다.
정근각의 총군사 집무실.
그곳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총군사, 제갈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오대세가의 반발이 적을 거란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남궁세가는 대놓고 흑룡단주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있었고, 당가는 지금 외부의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또한 팽가는 원래 무림맹의 일에 별로 관여하지 않는 가문이었고, 제갈세가는 자신이 가주이니 논외였다.
그나마 불만을 제기할 만한 곳은 황보세가인데…….
‘상황이 심상치 않나 보군.’
최근에 받은 보고로 미루어 보아 이쪽도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구파일방이다.
점잔 빼는 척 물러나 있지만, 착실하게 인재를 무림맹에 보내서 영향력을 조금씩 강화하면서 이득을 취하고 있는 이들.
세상사에 초탈한 선인의 흉내를 내면서 그 누구보다 술병과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있던 이들.
흑룡단주의 과격한 행보는 그들에게 손해를 끼칠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그들이 반발해야 함은 당연한데…….
“무림의 상황이 말이 아니군…….”
소림? 불존의 동의하에 맺은 동맹이다.
당연히 아무런 불만도 없으리라.
곤륜은 망했고, 공동파도 거의 망했다.
남은 곳은 개방, 화산, 무당, 아미, 종남, 점창, 청성이다.
개방은 거지들이 모인 곳이고 현 방주는 물욕이 없는 인물이니 넘어가고, 아미파도 비슷하니 넘어가면 남은 곳은 다섯이다.
구파일방의 절반이다.
그들이 서로 의견을 맞춘다면 충분히 견제가 들어올 만한데…….
“늙은 말코들이 눈치가 빠르구나.”
그들의 의중을 읽어 낸 총군사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영산의 높은 봉우리에서 술이나 홀짝이는 말코들이 알아챈 거다.
지금 무림은 그들이 지금껏 겪지 않았던 괴이의 위협에 직면해 있음을.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무림맹을 위협하던 적을 홀로 제압한 술사의 가치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한 것이다.
“매화가 자존심이 좀 구겨지겠어.”
고고함을 상징하는 꽃도 진창이 된 눈에 처박히면 추해지는 법이다.
* * *
“눈치 빠른 새끼들.”
흑룡단 건물에서 나와서 길을 걸어가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참에 건드리면 기강을 좀 잡으려고 했는데…….”
돌아오자마자 애들을 모아 놓고 대놓고 쇼를 했는데, 의미가 없어져 버렸네.
사기 진작은 된 것 같지만.
아직도 훈련장에서 열심히 구르고 있을 단원들을 떠올리면서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뭐, 그것만으로도 그런 낯 뜨거운 연설을 한 의미는 충분하지.
원래 투쟁이란 건 분위기니까.
이걸 연료로 한참은 더 굴릴 수 있겠지.
“이번엔 무슨 일이길래 저희를 데리고 가시나요?”
한창 구르고 있을 단원들을 떠올리며 히죽히죽 웃던 설천위는 서하영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그야, 너희는 연이 깊으니까?”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뭐, 사실 너희가 할 일은 딱히 없어. 그냥 머릿수 맞추려고 데려가는 거지.”
혼자 가는 것도 괜찮지만, 철백도 그렇고 서하영도 그렇고 이젠 꽤나 분위기가 좋아서 병풍으로 쓰기 딱 좋았다.
남을 협박할 때 제 키보다 큰 창을 든 무인과 그런 창과 비슷한 신장의 거한은 충분한 위협이 되니까.
“뭐, 대충 뒤에 서서 분위기만 잡아 주고 있으면 돼.”
어차피 금방 끝낼 거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서하영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준 설천위는 어느새 도착한 목적지 앞에 걸음을 멈췄다.
큼지막한 대문, 유려한 검술로 새겨 넣은 현판.
현 선검단 단주, 현성이 직접 새긴 현판이다.
그리고 이곳에 온 이유는.
“청곤 나와라!!”
길고 길었던 인연의 청산을 위해서다.
* * *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습니다!”
선검단의 장원.
발악하는 청곤의 외침이 크게 울려 퍼졌지만, 선검단의 단원들은 얼굴을 찡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에헤이, 뭘 이럴 수 없어. 네가 흑도랑 붙어먹어서 주머니 채운 거 다 드러났는데.”
히죽히죽 웃으며 청곤의 뺨을 두들기고 있는 사내의 기세에 짓눌려서만은 아니었다.
사내가 하는 말에 제대로 반박조차 하지 못하는 청곤의 모습에 크게 낙담했기 때문이다.
“많이도 해 처먹었더군. 전시 횡령은 참수인데, 이건 뭐 적이랑 해 처먹었으니.”
쯧쯧, 혀를 차면서 청곤의 뺨을 툭툭 때린 설천위는 속으로 백유에게 감사했다.
붙어 다니는 동안, 백유는 의외로 혼들과 자주 대화를 나눴다.
심안을 얻은 이후로는 설천위의 은밀한 비밀을 듣겠다는 이유로 자주 달라붙어 혼들과 떠들어 댔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선검단 부단주였던 정백을 죽이고 약간 부드러워진 현태중에게서 직접 사정을 들었던 백유다.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 하는 식으로 넘기더니, 사파를 장악한 뒤에 여러모로 뒷조사를 한 모양이다.
‘단순히 뒷조사만 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요 근래에 늘어난 횡령 규모를 보면 아예 부추긴 것 같기도 했다.
즉.
‘이래서 함정수사를 하나.’
지금 청곤이 앞에서 울고불고하면서 빌고 있는 건 함정에 걸린 거란 소리다.
전혀 모르는, 사천맹의 대빵이 함정을 팠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보상은 탐스럽고, 주머니는 헛헛하니 홀랑 넘어가 버렸겠지.
화산의 제자인 주제에 욕심이 많아도 너무 많은 인간이다.
그 욕심에 비해 실력은 미천했지만.
청유와 같은 청자배이지만, 나이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자신과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위 배분에 불만을 품고, 정작 자신의 실력은 기를 생각도 하지 않고 일탈만을 일삼던 왈패.
그 실력은 일류에 올랐지만, 정신 상태가 썩어 빠져도 너무 썩어 빠졌다.
삼류 그 이하다.
애초에 그가 일류에 오른 것도 그 몸뚱이가 꽤나 재능이 있었고, 그가 익힌 무학이 무림에서도 당당히 이름을 말할 수 있는 화산의 것이었기에 이룬 경지일 뿐이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털어 내라고.”
“이건! 이건 있을 수 없는 횡포다! 나는 대화산의……!”
“두 다리를 잘라야 움직일 생각이냐? 그럼 나야 좋긴 하다만.”
백유가 이놈에 대한 정보를 가져온 날 밤, 설천위는 치열한 공방을 치러야 했다.
그 결과, 아직까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현태중의 원한에 자신의 원한까지 더해져 있었다.
다리를 자르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과한 처사 같습니다. 흑룡단주님.”
“응?”
벌벌 떠는 청곤의 다리를 자를까 말까 고민하던 설천위는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공포가 깃든 눈으로, 침착하게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내를 발견한 설천위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왜, 과하다고 생각합니까?”
“……죗값은 치러야 함이 마땅하지만, 다리를 자르는 것은 단순한 분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가 치러야 할 죗값은 사문에게 그 죄를 명확히 밝히고, 스스로 뇌옥에 갇혀 자신의 죄를 반성하는 것입니다.”
음.
“뭐, 대부분의 법이 그렇죠.”
도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삐딱한 자세를 바로잡고 웃으며 그 도사를 바라봤다.
“허나, 그건 일반 백성에 한해 적용되는 법이지.”
“무인이라고 한들 사람입니다……!”
“아니. 무인은 사람이 아니다.”
도사의 반발을 단호하게 끊어 낸 설천위는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흑도를 꺼내 청곤의 어깨에 올렸다.
“무인의 삶은 모든 것이 폭력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것이 폭력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 무슨 궤변입니까!”
“도사, 너는 네 스스로 작물을 수확해 밥을 먹나? 스스로 동물을 키워 잡아먹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만들어 거래를 하나?”
히죽 웃으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너희도, 그리고 나도 할 줄 아는 거라곤 사람을 죽이거나 패는 능력밖에 없는 족속들이지. 그건 생산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어. 그렇기에 우리에겐 두 번의 기회가 있어선 안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칼을 손에 쥔 자는 실수를 해선 안 된다. 그렇기에 군법은 지엄한 것이고, 군인은 존경받는 것이다.”
“끄아아악!”
설천위의 흑도가 청곤의 어깨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울려 퍼지는 비명 속에서 설천위는 여태껏 보였던 가벼웠던 모습과는 딴판인 싸늘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칼은 절대로 아군을 향해서는 안 된다. 이자가 저지른 죄는 그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죄야.”
지금은 횡령을 이유로 처벌하지만, 청곤의 죄는 단순히 학우를 괴롭힌 것을 넘어서서 전우를 죽인 죄다.
그것을 그저 사문의 이름으로 형편 좋게 넘어갔다는 것 자체가 설천위로서는 용납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외부에 나가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동료들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있을 테니까.
“내가 억지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나?”
“…….”
“그렇게 생각하는 표정이군. 불만이 가득해. 하지만, 나는 이 억지를 관철할 생각이다.”
“커으으윽!”
반쯤 박히다가 뽑힌 흑도에 청곤이 몸을 비틀며 바닥을 굴렀지만, 어느새 다가온 철백이 그를 집어 들어 어깨에 걸쳤다.
“흑룡의 역린은 목 뒤에 있으니 내가 경계하는 것은 오로지 등 뒤의 배신뿐이다.”
어느새 사방을 잠식한 설천위의 기세에 입 한 번 제대로 뻥끗하지 못한 도사가 이를 악물곤 고개를 숙였다.
그런 도사와 침묵하는 주변의 무인들을 한 번 훑어본 설천위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선검단을 벗어났다.
[……천위.]
“단순히 아저씨의 원한 갚기가 아니에요.”
그게 목적이지만, 억지를 써 가면서 많은 원한을 쌓으면서 이렇게 무리하게 일을 진행시키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최종전을 위해 나아갈 때, 뒤통수를 맞아 꼬꾸라지지 않기 위해서.
그건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이지 않은가?
“다음은 황보세가의 망나니군요.”
잘됐네.
그쪽 일을 처리하면서 이제 슬슬 움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