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525화 (525/624)

제525화

524화-오존회담(五尊會談) (5)

“황실이라…….”

설가의 별채.

그곳에 방을 배정받은 맹주는 오후에 있었던 회의를 떠올렸다.

설천위는 간략하게 목표를 제시했다.

단순하게, 이렇게 해야 한다.

오존을 모아 놓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담력이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설천위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내용이다.

황실.

최근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무림인이 나서서 지켜 줘야 할 정도인가?

과연 그럴까?

황실의 강함은 무림에 절대로 공개되지 않는다.

형왕(衡王)?

황실의 대외적인 무력을 상징하는 인물이지만, 그가 황실의 최고수냐 묻는다면 글쎄…….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황실은 언제나 힘을 감추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당연히 암살을 막기 위해서다.

암살의 핵심은 상대방을 아는 거다.

어떻게, 얼마나 전력을 투입해야 적을 죽일 수 있는가.

그것을 아는 것이 암살의 시작이자 끝이다.

설령 천의 전력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적을 명확하게 알 수만 있다면 암살은 성공할 수 있다.

황제의 자리다.

몇이나 되는 전력을 쏟아붓더라도 쟁취할 수 있다면 암살을 시도할 이는 많았다.

그렇기에 황실은 절대로 전력을 공개하지 않는다.

금의위의 숫자와 편성이 전부 공개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고.

그 외의 수많은 조직들이 황제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낮추고 숨어 있는 곳이 바로 황실이다.

정치적 싸움에 의해 황제가 흔들릴 수는 있어도 차가운 칼날이 황제에게 닿을 일은 없었다.

물론, 현 황제는 어린 만큼 정치 싸움에서 밀려 혼란스러울 순 있겠지만…….

그것이 무림인이 개입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설천위는 왜 황실을 지켜야 한다고 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그 정치 싸움에 혈교나 사혈천 같은 벌레들이 끼어든 거다.

그것도 황실의 철통같은 방어를 뚫을 정도로 깊숙이.

주술에 의한 암살은 고대부터 두려워했던 불가해의 죽음이다.

당연히 그것을 막기 위해 황제는 최고의 술법들로 지켜지고 있다.

그럼에도, 혈교나 사혈천이 파고들었다는 것은…….

‘끔찍하군.’

황실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가 됐다는 소리다.

아마 거의 마비에 가까운 형태가 되어 버렸겠지.

본래도 넓은 땅 때문에 황실의 영향력이 제한되어 있던 중원이지만, 근래 들어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황실의 마비가 그 원인이겠지.

그리고 아직까지 짐작만 하고 있던 것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피바람이 불겠어.”

권력에 눈이 먼 괴물들이 일제히 일어설 거다.

괴이 따위가 아니다.

인간.

황실의 피를 조금이라도 나눠 받은 인간들이 스스로를 천자라고 주장하며 병력을 일으킬 거다.

전국시대가 또다시 펼쳐지는 거다.

그렇게 되면 이젠 무림이고 뭐고 없어진다.

권력에 눈에 먼 권력자들은 무림인을 닥치는 대로 끌어들일 거고, 거부하는 무림인들에게 칼날이 향할 거다.

이런 상황에서 구파일방, 오대세가라고 버틸 수 있을까.

또, 휘말린 싸움에서 패배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독할 정도의 피비린내가 벌써부터 코를 찌르는 것 같았다.

“총군사.”

“예. 맹주님.”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흑룡단주의 말은 거의 대부분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총군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맹주는 찻잔을 어루만졌다.

“이미 무림맹에 담을 수준은 넘어선 것 같군.”

“솔직히 말해서, 그렇습니다. 특히…….”

“그래, 알고 있네.”

총군사는 확신하지 못해 말끝을 흐렸지만, 맹주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확신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거다.

“흑룡단주의 술(術)이 이미 아득함[玄]에 도달했어.”

* * *

“그래서, 오존회담은 끝났나요?”

“거의.”

늦은 밤.

자신의 방에 들어온 유예린과 나란히 침대에 앉은 설천위는 부적을 끄적거리던 붓을 내려놓았다.

“눈치가 빠른 양반들이니까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짐작했겠지.”

“다른 사람들도 좀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게 관건이지.”

머리는 설득했는데 몸이 안 따라 주면 그건 그것대로 심각한 문제니까.

사천맹은 문제없을 거다.

패기를 두르고 사람을 이끄는 백유.

그녀의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 주는 사존과 살존.

거기다 백유는 충성도 높은 부하들까지 거느리고 있다.

성무경이나 장풍기 같은 녀석들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단주의 자리에까지 오를 거다.

물론 아직은 부족하지만, 든든한 지지 세력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백유의 권력은 굳건하다.

사파를 주무르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닐 거다.

문제는 오히려 정파다.

맹주도 동의했고, 불존도 동의했지만 정파라는 것들은 자존심이 강한 놈들이다.

거기다 명분까지 있다.

사파와는 절대 손을 잡을 수 없다.

정신머리 없는 소리지만, 정파에게는 훌륭한 명분이 된다.

현실을 모르는 머저리들이 내세우기 딱 좋은 명분.

그런 명분으로 미쳐 날뛰는 놈들이 사파를 건들기 시작하면 사파도 흔들린다.

아무리 백유라고 해도 처맞기만 하라는 지시를 사파 놈들이 언제까지 따를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러니 정파를 얼마나 잘 휘어잡느냐가 이번 일의 핵심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설득하고, 주제도 모르고 날뛰려고 하는 중소 문파들까지 제어해야 한다.

총군사는 대가리가 빠개질 거고, 맹주도 탈모를 걱정해야 할 거다.

다만.

“슬슬 정리하고 떠날 때가 되긴 했어.”

무림맹이라는 이름을 버릴 생각까진 없다.

다만, 이젠 슬슬 진짜 황실 쪽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다.

긴장해야 할 정보도 있고.

움직여야 할 때다.

그러니.

“마지막 정리만 하고 움직여야겠어. 흑룡단 애들 보고 모여서 기다리라고 연락 좀 넣어 줘.”

“네, 알겠어요.”

문제는 어떻게 마무리를 하냐는 건데…….

담담히 고민하던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리던 그때.

“흐흥? 아직 늦지 않았네.”

어느새, 창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의 목을 향해 유예린의 검이 쇄도했다.

단숨에 목을 가르려는 일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낸 백유가 담담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난 또 한창 뜨거우면 어떻게 끼어들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네.”

“당신을 끼워 줄 생각은 없는데요.”

“뜨거운 걸 할 생각은 있었구나.”

“물론이죠.”

……어? 난 없었는데?

부모님 다 계시는데?

아버지 청력이 가문 전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수준인데?

여기에 그런 고수가 넷이나 더 있는데?

아무리 가족이 공인한 사이라지만, 조금…….

부끄러움에 살짝 고개를 돌렸던 설천위는 코를 타고 들어오는 향기에 슬쩍 물러났다.

“천위, 난 슬퍼.”

“……실력이 꽤 좋아졌네.”

“스승님이 스승님이니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백유의 솜씨에 설천위는 감탄했지만, 유예린은 은은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백유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졌다지만, 설천위가 그녀를 확실한 아군으로 인지하고 무방비하게 대했기에 그녀가 저리 접근할 수 있었던 거니까.

“천위.”

“……으, 응?”

오랜만에 이름으로 부르는 유예린의 목소리에 설천위의 대답이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기억하나요? 하영이가 던졌던 창을 철 소협이 입으로 받아 냈을 때.”

……청아랑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지.

설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그의 반응에 유예린은 웃으며 그의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럼, 그때 제가 뭐라 했는지도 기억하지요?”

뭐라 했나?

그때 유 매가 뭐라 했…….

‘제 비수는 입으로 막을 수 없을 거예요.’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때 서하영은 ‘바람피우면 죽는다고 했지!’라고 소리치면서 창을 던졌으니까…….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설천위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진 그 순간.

“흐응? 뭐야? 무슨 말을 했길래 그래?”

물컹한, 유예린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거대한 부드러움이 설천위의 등에 닿았다.

그리고.

“우리 천위, 긴장하지 마. 누나가 다 막아 줄게. 저런 속 좁은 여자는 두고 나랑 가자. 내가 좋은 선물도 가져왔거든~.”

노골적으로 유혹했다.

어깨부터 가슴까지 휘감은 팔이 부드럽게 목으로 올라가고.

찰싹!

“그 더러운 손 치우시죠.”

“너무해.”

“너무한 건 당신입니다. 이…… 여자가.”

“방금 욕하려다가 참았지? 아무리 그래도 창녀는 너무하지 않나? 난 천위에게 일편단심인데.”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거짓말, 전에…….”

“한 적 없다고요.”

능청스러운 백유와 은은한 미소를 잃지 않는 유예린.

그 둘 사이에 끼어서 머뭇거리던 설천위는 슬쩍 몸을 빼…… 지 못했다.

“어딜 가나요?”

“그, 그것이…… 부적을 그리던 걸 마저…….”

“아뇨. 안타깝지만,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해야겠어요.”

“예? 뭘요?”

“천위.”

설천위의 뺨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유예린이 강렬한 시선을 담아 설천위의 두 눈을 마주했다.

“첫 번째 부인은 접니다. 이 쓰레기야.”

설천위가 유예린에게 처음 들은 욕이었다.

* * *

“푸훕!”

“쯧쯧.”

어느 건물의 지붕.

술잔을 기울이던 살존은 웃음을 터트렸고, 그녀의 곁에 있던 북존은 혀를 찼다.

“쓰레기래. 하긴 맞는 말이긴 하지. 내 딸한테도 손댔으니까.”

“그건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군.”

“뭐, 내 딸은 치료 과정에서 조금 닿은 정도라 명분이 부족해.”

그런데도 적극적으로 달려들 생각은 안 하고 열심히 일이나 하고 있으니.

손주 보기는 글렀네.

“그나저나, 우리 북존의 부인께선 뭐라 안 하시나?”

외간 여자랑 술이나 마시고 있어도 되는 거야?

“녀석과는 친구였으니까.”

“……기억은 하고 있었나 보네.”

“네가 거부해서 가지 않았을 뿐이다.”

“흥, 좋다고 부인을 둘이나 둔 놈인데. 자식의 정서 교육에 뭐 좋으라고?”

혀를 찬 살존은 옛날의 북존을 떠올렸다.

더럽게 잘생긴 얼굴로 뻔뻔하게 자신을 죽이러 왔던 무인.

그 앞을 가로막았던 사내.

이제는 볼 수 없는, 그 등을 떠올리며 살존은 술잔을 털었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난 둘뿐이었다.”

“원래 시대가 지나면서 성장하는 법이지.”

쟤는 몇이나 될지 모르겠네.

듣자 하니 인기가 꽤 많다던데.

낭괴의 그 가슴 큰 제자도 호감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완전 쓰레기네. 쓰레기야.”

“부정할 수 없군.”

“너 말이야, 너.”

“나는 양심적이었다만.”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 것도 그대로네.”

어휴.

한숨을 내쉰 살존은 담담히 술잔을 기울이는 북존의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진짜, 아비나 자식이나 여자 홀리는 데는 재주가 있어.”

나 말고 다른 여자였으면 넘어갔겠네.

“흠.”

“거기선 헛꿈 꾸지 말라고 끊어 내야지. 이 쓰레기야.”

그게 문제야, 인마. 그게.

* * *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달리던 형왕은 등 뒤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빨리,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

다행히 추적은 없다.

전부 따돌렸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가면 그리 오래 버틸 수가 없다.

대체, 대체 어찌해야…….

이를 악물고 달리던 형왕은 끝내 결정을 내렸다.

“폐하, 지혈을 해야 합니다.”

발을 멈추고, 작은 바위 위에 폐하라고 부르던 소년을 앉힌 형왕은 이를 악물고 비수를 꺼냈다.

“피가 흐르는 큰 통로를 열로 지져서 닫을 것입니다.”

형왕이 끌어올린 내공에 비수는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닿는 순간, 끔찍한 고통이 찾아올 것이 분명해 보이는 그 비수를 보며 거친 숨을 토해 내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라.”

“……송구하옵니다.”

살이 익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고통을 참는 신음 소리가 들린다.

끝내 고통을 참아 낸 소년이 실신하고, 그의 잘린 어깨에서 흐르는 피가 크게 줄어든 것을 확인한 형왕은 다시 그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숨어야 했다.

어차피 폐하가 없는 한 그곳은 열지 못한다.

몸을 회복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무림맹으로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그렇게 판단한 형왕은 붉게 달아오른 비수로 자신의 얼굴을 지지기 시작했다.

용모파기 정도로는 자신을 절대 알아볼 수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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