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4화
523화-오존회담(五尊會談) (4)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네.”
무려 한 시진 동안이나 혹한진에 갇혀 있다가 나온 불존은 축축하게 젖은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웃었다.
“이리 뛰어난 술사가 무림맹에 있었을 줄이야. 솔직히 전대 백화단주보다 더 뛰어난 것 같구려.”
“과찬이세요.”
“허허, 과찬이라니.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웃으며 시원스럽게 손을 휘적거리는 불존의 모습은 소림의 방장이라기보다는 호방한 호걸을 보는 것 같았다.
불가의 스님들 특유의 모두에게 존대하는 일 없이, 나이와 배분에 따라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는 것도 특이했다.
“땡중 놈, 네놈은 속세를 멀리한다는 핑계로 숨어 살아서 몰랐던 것뿐이다.”
“속세를 멀리한다는 것은 숨어 산다는 말과는 다른 거다. 멍청한 사파 놈아.”
“……또 싸우시게요?”
“흐하하하, 이런, 그만하지. 또 갇혔다간 진짜 얼어 죽을 수도 있을 테니.”
다음에는 쉽사리 갇히지 않겠지만.
설천위가 펼친 술법이 처음 보는 것인 데다 살기가 없었기에 그냥 당해 줬던 것일 뿐 벗어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었을 거다.
다만, 그걸 감안해도 가둔 순간 꼼짝없이 한 시진이나 붙들려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만한 힘이 있었다는 소리니까.
“마침 잘됐어. 상황이 상황인 만큼 술사의 의견도 필요했으니까.”
“그도 그렇지.”
그렇기에 오존들 모두가 회의에 설천위를 포함시키자는 말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설천위를 처음 보는 불존마저 동의했고, 정존 또한 동의했다.
그렇게 오존회담은 빠르게 진행됐다.
“일단, 오늘은 가벼운 화제부터 시작하지.”
진정된 분위기 속에서 사존이 가장 먼저 안건을 제시했다.
“사파와 정파 간의 갈등, 아니, 서로 협력을 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감정의 골을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 * *
“천위가 그쪽으로 불려 갈 줄이야.”
“그러는 당신은 왜 안 가고 여기에 있죠? 사천맹주잖아요.”
“에이, 오존회담이잖아. 나야 세부적인 조율에 들어갈 때 그쪽에 있는 총군사랑 떠드는 역할이지.”
사천맹주이긴 하지만, 엄연히 사존이 살아 있으니 당연했다.
백유가 사존과 막 권력을 두고 다투는 사이도 아니고, 사존의 배려로 사천맹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거니 이런 일에 고집을 피울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불존, 그 땡중 눈빛이 장난 아니더라고.”
“살벌했죠.”
“듣자 하니, 사파에 대한 원한이 상당하다고 하네요.”
지금은 정파와 사파가 꽤나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둘이 살벌하게 싸웠던 시대도 당연히 있었다.
애초에 지금 머물고 있는 설가부터 그런 싸움에서 세를 키운 가문이기도 하고.
불존은 그런 투쟁의 시대를 살았던 무인 중 하나로 사파에 대한 원한이 컸다.
그의 사제들 중 사파와의 전투로 목숨을 잃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사존과는 거의 직접적인 원한 관계가 있었다.
사존이 직접 죽이진 않았더라도, 그가 이끄는 부대와 충돌하면서 죽은 이들도 있었으니까.
괜히 사존과 마주치자마자 싸움이 붙은 게 아니었다.
거기다.
“불존께서는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시고 있는 것 같지 않던데요.”
“그냥 오존들이 모인다기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지.”
소림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애초에 움직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 그런지, 불존은 지금 무림의 턱밑까지 다가온 위협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유예린과 백유의 평에 고개를 끄덕이던 다른 이들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단주가 알아서 잘 설명하겠지.”
“그것도 그러네요.”
소윤혜의 말에 구석에서 경전을 읽던 문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위 형님이라면 어떻게든 해 주시겠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문율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차마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던 소윤혜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자신이라고 다르지 않으니까.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나 집중하자.”
싸워야 할 때 싸우는 거.
그게 핵심 아니겠어?
* * *
“시시하게 끝났네.”
오존회담 첫날.
해묵은 원한을 먼저 해결하고 가자는 취지로 시작된 논쟁은 그야말로 격렬하기만 했다.
뭐, 거의 불존과 사존이 떠드는 형국이었지만, 다른 오존들도 한 마디씩 던졌다.
심야가 될 때까지 이어진 논쟁 끝에 겨우 마무리된 회의.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가렸느냐, 하면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애초에 가릴 수도 없는 문제였고.
그냥 뭐.
-너 뭐뭐 잘못했고 내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너도 뭐뭐 잘못했잖아! 나도 기억하고 있어!
-그럼 샘샘이네! 일단 잊고 이번엔 협력하자!
이 세 줄을 아주 길고, 아주 상세하게 풀어냈을 뿐이다.
이 무림에서 거의 최고 수준의 인물들이 나눈 대화치고는 참으로 유치찬란했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일단 지적은 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니까.
대충이라도 짚고 넘어가야 어느 정도 감정을 털어 낼 수 있다.
아마 각자 돌아가면 대충 이런저런 사건들을 언급하며 화해하기로 했으니 일단 협력하라.
뭐 이런 지시를 내리지 않을까?
“……구체적인 논의는 내일에서야 겨우 시작하겠네.”
뭐, 구체적인 논의라고 해 봐야 별거 없다.
어떻게 구역을 나누고 대응할 것인가.
그게 핵심이다.
서로의 땅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음지의 조직들을 억누를 수 있도록 하는 것.
병력이 움직이는 순간, 한껏 긴장해서 괜한 힘 빼지 말고 서로 할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게 이번 회담의 최우선 목표다.
그 외에는…….
‘대응 방법 정도를 알려 주는 것인가?’
마침 잘됐다.
회담에 낄 수 있게 됐으니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어.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성과에 흡족해하며 방으로 돌아가던 그 순간.
“흐음.”
갑자기 몸을 돌린 설천위는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설가의 부지 안에 있는 작은 야산에 오르자, 반대쪽으로 앉아 달을 구경하던 불존이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었네. 시주.”
“무슨 일이십니까?”
기세로 자신을 부른 불존을 살짝 경계하며 설천위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작은 돌 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 그대로 몸을 돌린 불존의 깊은 눈동자가 설천위를 응시했다.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깊고도 날카로운 눈동자.
이것이 자비를 말하는 불가의 법을 평생 갈고닦은 이의 눈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설천위를 훑고 지나갔다.
“……허허. 참으로, 참으로 신기하구나.”
눈을 몇 번 깜빡일 시간 동안 설천위를 응시하던 불존은 이내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예기(銳氣)를 거뒀다.
어느새 불가 특유의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눈빛으로 돌아온 불존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설천위를 바라봤다.
“어린 시주의 몸으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있소. 그러면서도 어찌 그리 담담한 것이오?”
낮에 말하던 것과는 다른 말투.
그 안에 담긴 의도는 정확히 몰랐으나.
설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해야 하니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담담한 대답.
그것이 대답이 되었을까.
불존은 부드럽게 웃었다.
“무해, 그 아이가 따르는 인물이라 하기에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는데, 정녕 대인(大人)이구려.”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허나, 그렇기에 시주는 박명할 것이오.”
그렇지 못한 대화 내용.
담담하게 설천위의 이른 죽음을 예언하는 불존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언행이었으나, 설천위는 오히려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거야 하늘도 모르는 일이죠.”
“허허, 자신감이 가득하구려.”
“그야 고작 박명할 정도로 운명에 질 생각이었으면, 이렇게 아등바등 안 살았죠.”
재능이라곤 쥐뿔도 없는 설천위로 살아가는 생.
포기하고 조용히 은거하는 게 나았을 수도 있었다.
유예린에게 다가가 사랑을 속삭이고 서로 손잡고 어느 깊은 오지에 숨어들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이런 고생 같은 거 안 하고도 충분히.
하지만.
“저는 행복한 결말이 좋아요.”
주인공 둘이 세상을 등지고 오지에 처박히는 건 관점에 따라 해피엔딩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모두가 행복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거.”
내가 바라는 해피엔딩은 오직 하나뿐이다.
“저는 오래오래 살다 갈 겁니다.”
오래오래 살 거다.
설천위의 그 대답에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불존이 입꼬리를 올렸다.
“시주께서는 참으로 힘든 길을 가는군.”
“아뇨. 그냥 소박한 꿈인데요.”
“허허, 그 소박한 꿈이 본래 가장 이루기 어려운 법이지.”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난 불존은 부드러운 미소로 합장했다.
“시주의 꿈이 꼭 이뤄지길 바라겠네.”
* * *
오존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첫날 사존과 다툼을 벌였던 불존은 이어지는 회담에선 놀랍도록 순순히 협력했다.
맹주의 이름값이 통하지 않는 구파일방을 설득하고, 임시적인 협력 체계를 굳건히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정파 무림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으니 그가 반대하는 것만으로 회담은 질질 늘어지며 결론이 나지 않았을 거다.
여하튼, 불존의 협력과 애초부터 서로 손을 잡을 생각이 있었던 다른 오존들로 인해 회담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대략적인 기준을 정하고, 총군사와 백유가 만나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했다.
그리고.
“굵직굵직한 것들은 전부 막아야 합니다.”
“으음, 사천맹에서 벌어졌던 일 같은 경우를 말하는 거지?”
“맞아요. 그때도 꽤나 위험했죠. 무림맹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고요.”
연옥을 여는 의식이 반드시 연옥의 괴물을 불러오진 않는다.
흑암지규군처럼 연옥의 존재가 그대로 현신하는 의식은 오히려 드문 편이다.
대부분 연옥의 존재들이 뿌린 파편이나, 연옥에 새롭게 들어갈 자격이 있는 씨앗들이 소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환이라는 말보다 탄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경우가 많지만.
여하튼.
“중요한 건 놈들의 세력이 곳곳에 퍼지지 않도록 막는 겁니다.”
“까다롭군.”
“까다롭죠. 중원 땅이 좀 넓은 게 아니니까요.”
좀 넓은 게 아닌 수준을 넘어서 더럽게 넓지.
하지만.
“그럼에도 해내야 합니다. 해내지 못하면 인간의 시대는 끝이에요.”
괴이가 판을 치는 시대.
신화가 살아 숨 쉬는 시대가 도래한다.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몇몇 재능 있는 자들은 그럼에도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일반인은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말 그대로 지옥에 떨어진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럽고, 말을 내뱉는 것조차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그런 지옥.
무엇보다 천계는 옛날에 신화의 시대를 접고 문을 닫았다.
천계의 힘이 지상을 흐트러트리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연옥의 놈들이 올라와서 깽판을 치면 바로 대응할 수가 없다.
거기다 천계 놈들이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그게 꼭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아니었다.
천계는 언제나 대의(大義)를 좇으니까.
천계의 무신들을 욕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널리고 널렸었지.
아무튼.
“인간의 힘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인세(人世)를 지킬 수 있는 건 인간뿐이에요.”
인간끼리 해내야 한다.
인간이 해내야 한다.
“사천맹의 술사들에게 줄 정보를 정리해 드리죠.”
“알겠다.”
“무림맹도 본격적으로 백화단, 흑룡단과 협력해 주세요.”
“그러지.”
사파와 정파의 동의.
그리고.
“퇴마승과 도사들을 움직여야 합니다.”
“아미타불, 연락을 넣도록 하겠네.”
“살수들 또한.”
“말해 볼게. 내 말을 들을지 모르겠지만.”
“직접 찾아가서 두들겨 패서라도 움직여 주세요.”
“그래, 그러지 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살존.
그렇게 넷을 설득한 설천위는 깊은 한숨과 함께 가장 깊숙이 담고 있던 말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황실을 지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