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3화
522화-오존회담(五尊會談) (3)
불존(佛尊).
설천위가 육도의 세계에 떨어져 직접 대면할 수 있었던 다른 오존(五尊)과 달리 유일하게 지금껏 보지 못한 인물이다.
애초에 오존(五尊)이란 존재들은 무림에서 고작 다섯밖에 없는 인간들이다 보니 웬만한 사람들은 그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설천위가 불존을 아예 보지 못한 건 언뜻 보면 특이한 일이긴 했다.
사파의 명숙인 사존과 살존을 둘 다 만나고 친분까지 쌓았는데, 불존은 아예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니까.
나름 무림의 명숙인 인물인데, 불존은 어째서 그렇게 보기 힘들까?
뭐, 단순했다.
소림사에서 도통 나오질 않으니까.
그리고 이건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설천위의 아버지인 북존만 해도 설천위가 집에 돌아왔을 때를 빼고는 얼굴 볼 일이 거의 없지 않은가.
오존(五尊) 정도 되는 존재라면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특히, 불존의 경우 소림의 방장이기도 하니 당연히 쉽사리 소림사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현재 무림맹에서 소림을 대표해 단주를 맡고 있는 무진이 그 불존의 제자이니 무림맹의 면을 세워 주기 위해 무림맹에 들를 필요도 없었다.
철저하게 소림이라는 울타리 안에 몸을 뉘고 기다리는 와룡(臥龍).
그게 불존이라는, 무림의 태산(太山)이자 소림의 거악(巨嶽)이다.
사존과 살존은 설천위가 의도적으로 사파와의 연결 고리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면서 만날 수 있었던 거고, 정존인 무림맹주는 뭐 당연히 만나야 했고, 북존은 설천위의 아버지이니 만날 수밖에.
다른 넷을 만난 것이 운이 좋았던 거지, 운이 나빠서 불존을 만나지 못한 게 아니었다.
거기다.
“……만나고 싶지 않네.”
“불존 어르신 말인가요?”
“응.”
운이 좋아서 여태까지 안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 애초에 오존회담은 예전부터 한 번쯤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만날 각오를 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만나려고 하니 영 달갑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해 대사께서 아쉬워하겠네요.”
“그…… 렇겠지?”
무려 무해의 스승이니까.
불존 법신은 소림의 일대제자인 무자배에 두 명의 제자를 두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무자배의 대사형인 무진이고, 나머지 하나가 무자배의 막내인 무해다.
대가리가 깨져도 불살을 고수하는 그 스님의 스승이란 소리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스승이란 무슨 의미인가?
단순히 지식과 지혜를 전달하는 걸 넘어서서 가치관과 상식을 심어 주는 자이기도 하다.
즉.
“이 무림에서 불살을 가르치는 스님이라…….”
무해의 불살을 향한 집착에 그 불존의 영향이 없을 수가 없단 소리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는 소윤혜의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처형인의 가계를 이어서 그런가, 소윤혜는 때때로 무해와 죽음에 대해 심도 깊게 논하곤 했다.
서로 믿고 있는 신념이 달라서 언제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지만, 소윤혜도 무해도 서로의 뜻을 깊게 존중하고 있었다.
소윤혜는 차별 없는 자비의 극치인 불살에 감탄했고.
무해는 최후의 자비인 순살에 감탄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그런 따뜻한 모습…….
‘인가? 그게?’
뭐 입만 웃고 있지 서로 의견 나누는 모습을 보면 거의 칼싸움이나 다름없던데.
존중은 하지만 살벌한, 뭐 그런 느낌?
아무튼.
그런 무해의 스승이 불존인데, 불존에 대해선 설천위도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애초에 게임에서도 오존회담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무해로 플레이할 때뿐인데…….
‘그때도 거의 모습은 안 드러내지.’
가끔 나타나서 인자한 얼굴로 조언이나 해 주고 이내 사라진다.
전투 장면은 가끔 보이지만, 그가 나타날 때쯤엔 보통 무해가 그와 맞먹거나 그보다 강해져 있을 때가 많아서 별다른 활약을 못 보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무해 대사는 어때?”
“어떠냐고 하시면?”
“무공. 많이 늘었어?”
“벽을 깼습니다. 수습할 시간이 필요해서 전가의 임무엔 참여시키지 않았지만요.”
“아하.”
백유와 바둑을 두던 유예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나름대로 만족했다.
무해는 원래 철백만큼이나 성장에 시간이 걸리는 캐릭터다.
지금 시기에 화경이면 상당히 빠른 편이니…….
‘충분히 도움이 되겠어.’
이제 본격적으로 난세가 시작된다.
전투 경험을 빠르게 쌓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소리다.
무해나 철백을 비롯해 모두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시기가 왔다는 의미다.
게임처럼 레벨링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전투 경험이 쌓이고 몇 번이고 강적을 쓰러트리다 보면 반드시 강해진다.
‘역대급으로 쉬워질지도.’
솔직히 이 정도로 전력이 모일 줄은 예상 못 했는데.
생각보다 더 수월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건 참 만족스러운 성과다.
설천위가 혼자 만족에 빠져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그때.
“도련님, 불존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알았어.”
밖에서 들린 시종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존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사회적 위치가 있으니 이상한 짓은 안 할 터.
무해의 스승이라는 사실만으로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무해의 스승이면서 무진의 스승이기도 하다.
무진은 무림맹에서도 상식적이고 인덕이 있는 단주로 통한다.
실제로 만나 본 바로도 그랬고.
그런 인물의 스승이니 분명 제대로 된…….
쾅!!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땅이 흔들릴 정도의 강한 충격에 몸이 비틀거렸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 정확히 말하면 설가의 정문쯤에서 강렬한 기파가 충돌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놔.”
정신 나간 영감탱이들.
* * *
설천위가 불존에 대해 착각하고 있었던 건 두 가지였다.
하나, 불존은 과격하지 않다.
게임 속에서 오존회담은 여는 것이 힘들었지 내용 자체는 별거 없었다.
오존들이 모여서 서로 살벌하게 눈빛 좀 주고받고 대충 무림의 정세가 혼란스러우니 서로 손을 맞잡고 움직이자.
딱 이 정도의 이야기만 오가고 끝이 난다.
애초에 게임 속에서 등장도 잘하지 않던 거물들이 모이긴 했지만, 플레이어 입장에선 낯선 이들일 뿐이다.
그들이 모여서 막 서로 눈치 싸움을 하고, 정치질 좀 하고 그러는 게 뭐가 재미있겠는가?
그냥 호로록 넘겨 버려야지.
무엇보다 오존회담이 열릴 때는 진짜 상황이 심각해서 정파와 사파가 서로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분쟁이 일어날 여지 자체가 없었다.
그렇기에 오존회담에서 충돌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설천위는 당연히 오존회담은 순식간에 끝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니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날 거다.
그것이 설천위가 한 첫 번째 착각이었다.
두 번째 착각은 불존이 이상하지만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일 거라고 생각한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불존(佛尊)이다.
부처라는 글자가 별호에 떡하니 들어간 인물인데, 그 성격을 인자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거기다 설천위가 게임 속에서 봤던 불존은 허허롭게 웃으며 무해에게 조언이나 던져 주던 인물이었다.
막 선문답이나 하고, 조용히 불호나 외던 인간이란 소리다.
그러니, 당연히 온화한 성품의 인물일 거라고 예상할 수밖에.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란 사실을 설천위는 정문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미타불……. 여전히 사이한 기운을 뿜어내는구나! 사파 놈!”
“아직도 성질을 못 죽였나! 땡중!”
막강한 내공을 뿜어대며 주먹을 휘두르는 불존에 맞서 사존 역시 주먹을 휘둘렀다.
콰콰가가강!!
백색의 옥구슬 같은 기운과 검은 벼락이 서로 충돌하며 땅이 뒤집히고, 담벼락이 무너진다.
실시간으로 집의 정문이 개판이 되어 가는 모습에 설천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인간들이…….”
유예린과 백유마저 상황을 감안해 내공 없이 대련을 치렀건만,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싸워?
짜증이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고개를 돌렸다.
“뭐 하세요? 안 말리고.”
“무인의 싸움에 끼어들어서야 되겠느냐?”
“난 저 둘을 말리다가 피 볼 생각이 없는데.”
“결착을 짓고 넘어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놔, 이 양반들이.
정존, 살존, 북존의 대답에 설천위는 눈을 감았다.
“그럼 누가 말려요? 오존끼리 모였으면 오존끼리 손을 맞춰야죠!”
“흐응.”
설천위의 다그침에 침묵하는 정존, 북존과 달리 살존은 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럼 네가 말리는 게 좋겠구나. 그래도 나이를 먹은 노인네들인데 어린 네 말은 듣지 않겠니?”
“그게 뭔 헛소리예요!”
어린놈의 말을 잘도 들어 주겠다.
마주치자마자 서로한테 주먹이나 휘두르는 늙은이들이 용케도 내 말을 들어 주겠다.
살존의 말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고개를 돌려 다시 사존과 불존을 바라봤다.
어떻게 말려야 하지?
그걸 고민하는 설천위의 모습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으나, 설천위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몸으로 끼어들면 그냥 연옥으로 직행할 것 같은데?’
저 괴물들 사이에 어떻게 끼어들어서 말려야 하나 고민하기에 바빴으니까.
몇 번이나 강조해도 모자라지만, 정파와 사파의 연계는 필수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결하고, 연옥이 열리는 것을 저지하지 않으면 적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기세가 커진다.
특히.
‘슬슬 황실 쪽으로 움직여야 해.’
그에게 들은 정보를 생각하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즉, 오존회담은 질질 끌어선 안 되고 무엇보다 실패해서도 안 된다.
무림에 신경 쓰지 않고, 북쪽에 처박힌 황실에 온 신경을 집중하려면 오존회담에서 반드시 성공적인 성과를 얻어 내야만 한다.
그러니.
“말려야겠네…….”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손을 뻗었다.
몸으로 끼어들었다간 그대로 곤죽이 되어 버릴 테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콱! 콱!
순식간에 생겨난 말뚝이 불존과 사존을 둘러싼 형태로 땅에 박힌다.
“음?”
“호오?”
그 움직임에 반응한 불존과 사존이 각기 표정을 바꾸는 그 순간.
“두 분 다 머리 좀 식히시죠.”
[혹한진(酷寒鎭)]
말뚝에서 치솟은 냉기가 단숨에 두 사람을 덮친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반구의 얼음이 두 사람을 가두는 순간.
“흡!”
“흐하하하!”
묵직한 금속음과 함께 불존을 감싸던 얼음에 금이 가고, 뇌성과 함께 사존을 가두던 얼음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허어.”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가는 얼음은 단숨에 그 균열마저 집어삼키고 두 사람을 또다시 가뒀다.
순식간에 얼음에 갇혀 놀란 불존과 달리, 사존은 예상했다는 듯 흥미롭게 자신을 가둔 결계를 살폈다.
어느새, 서로를 향한 공격을 멈추고 자신들을 가둔 결계를 살피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설천위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머리 좀 식으셨나요? 식으셨으면 꺼내 드리죠.”
“아미타불, 몹쓸 꼴을 보였네. 시주.”
“난 잘못이 없느니라. 저 땡중이 먼저 달려들었으니.”
“사파 놈!”
“……아직 덜 식으셨네.”
다시 살벌해지는 두 사람의 기세에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결계를 칠흑의 벽으로 덮었다.
“부수고 나오시든가 머리가 식을 때까지 기다리시든가 알아서 하세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고 몸을 돌린 설천위는 그제야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들과 마주했다.
경악한 설가의 무인들의 시선은 그렇다고 치고, 함께 지내던 동료들의 시선에도 놀람이 담겨 있었다.
거기다.
“흐응? 역시 오존회담이 아니라 육존회담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정파 넷에 사파 둘이라, 균형이 썩 좋진 않군.”
“무슨 소리야? 쟤가 어딜 봐서 정파야? 사파지. 셋 셋, 딱 맞네.”
“맞아요!”
“맞긴 뭐가 맞아요? 끼어들지 말고 이리로 오세요.”
백유를 끌고 물러나는 유예린.
그 모습에 오존은 피식 웃었지만, 다른 이들은 웃지 못했다.
무엇보다.
“예? 육존? 그게 뭔데요?”
설천위가 웃지 못했다.
대체 뭐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