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2화
521화-오존회담(五尊會談) (2)
“그…… 진정하는 게?”
“딱히 흥분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나도 평온해.”
아니, 너희들 눈빛이 안 평온해.
나를 사이에 두고 검이라도 휘두를 것 같은 살벌한 눈빛이잖아.
“흐응?”
다만, 한껏 긴장한 설천위와 달리 여유롭게 웃고 있던 백유의 눈꼬리가 미묘하게 휘었다.
유예린과 두 눈을 마주친 채 지그시 시선을 교환하던 두 사람은 마치 서로 합의했다는 듯 동시에 몸을 돌렸다.
“들어가요.”
“어, 응.”
담담하게 자신의 뒤에 서서 말하는 유예린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오랜만이네.”
“오랜만이군요.”
그런 설천위의 뒤에서 백유와 유예린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로 안부를 묻고 웃는 모습이 썩 자연스러웠으나.
‘아으, 속 쓰려.’
도저히 눈뜨고 봐 줄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기에 소윤혜는 속으로 설천위의 명복을 빌었다.
일단 저쪽은 무시하자.
그렇게 눈을 돌린 소윤혜는 이번에는 아예 두 눈을 감아 버렸다.
“허허, 젊은이들의 사이가 좋구먼.”
“젊은이의 장점이지.”
대체 언제 모였는지 모르겠지만, 무림맹주와 처음 보는 노인이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사존……!’
유예린에게서 미리 들었던 정보를 떠올리며 노인의 정체를 짐작한 소윤혜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저쪽은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면 지는 거야.
무림맹주와 사존이 있는 곳을 외면한 소윤혜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설란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언니.”
“전가까지 갔다 왔다며? 고생 많았네.”
“고생이라고 할 것까지 있나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죠.”
아, 이 안도감.
설란이 풍기는 은은한 든든함에 얼굴이 풀어진 소윤혜는 동생들과 함께 그녀에게 붙었다.
“언니, 같이 가요!”
“응? 그래. 들어가자.”
동생 놈은 이미 끌려가듯이 들어가고 있으니까.
어머니가 눈빛을 반짝이며 백유와 유예린을 살피고 있는 모습은 나도 좀 부담스럽네.
소윤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란은 피식 웃는 오라버니에게 손을 흔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허허, 불존의 소식은 있소?”
“오는 중이라고 하니 이틀 안에는 도착할 거요.”
맹주의 물음에 대답한 건 어느새 다가온 북존이었다.
그 곁에서 하품을 하는 살존은 묘하게 아쉬운 얼굴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 늙은 땡중이 용케도 사문을 나왔군.”
사존의 이죽거림에 맹주는 별말 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불존(佛尊).
아마 지금 천하제일인에 가장 가까운 인물일 거다.
소림이라는 무림의 거악(巨嶽) 속에 스스로를 감춘 거인.
속세와 최대한 얽히지 않으려는 그조차 움직여야 할 정도로 지금의 상황은 심각했다.
“일단 쉬도록 하시오. 자세한 내용은 어차피 불존이 오고 나서 논의해야 할 터이니.”
“그렇게 하겠소.”
북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맹주는 어느새 사라진 젊은이들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
딱딱하고 고지식한 조직이라는 말이 도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사는 이들의 피는 끊임없이 젊어지고 있다.
세상의 순환은 무림맹이라고 해서 빗겨 가질 않는다.
당장 맹주인 자신이 있음에도 어린 녀석들끼리 후다닥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약간은 불편했으니까.
“꼰대 같은 눈빛 그만하고 좀 들어가지?”
사색에 잠겨 있던 맹주는 살존의 이죽거림에 고개를 저었다.
……나잇값 못 하는 아줌마 같으니라고.
* * *
“그래서, 두 분만 오신 건가요?”
“그렇지?”
“백 소저도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마침 임무에 나가 있던 상황이라.”
단주가 부재중이라고 해서 부하들이 임무를 나가지 않는 건 아니다.
굵직한 임무야 단주가 직접 받아 오지만, 자잘한 임무들은 적당히 분배되니까.
흑룡단의 경우, 시간 여유가 있는 무인들은 스스로 임무를 선택해서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살존의 딸인 백수아의 경우, 자신의 출신을 감춘 채 활동하고 있었고…….
“술사조랑 친해지더니, 자진해서 호위에 나서고 있어.”
“……좋아해야 할지 어이없어해야 할지.”
백수아의 근황을 듣고 백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천위 좋다고 따라간 주제에 왜 다른 애들이랑 친해져서 개별 활동을 하는 중인 건데.
어떻게든 설천위에게 따라붙어서 호감을 쌓아야지.
사천맹으로 가는 자신을 따라오지 않고 굳이 설천위를 따라갔던 백수아가 유예린을 견제해 줄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백유는 가볍게 미련을 털어 냈다.
투병 생활이 꽤 길었던 녀석이니 친구가 그리웠나 보지, 뭐.
“그나저나.”
자잘한 인연(?)을 가볍게 털어 버린 백유는 한껏 굳어 있는 설천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우리 천위는 왜 그리 긴장하고 있어?”
“너희들이 내 방으로 들어와서?”
“어머, 무슨 상상을 했길래 그것만으로 긴장을 해? 아주 음흉하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따라오면 당연히 긴장을…….”
“신경 쓰지 마. 난 괜찮으니까.”
내가 안 괜찮아, 이것아.
여전히 뻔뻔한 것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백유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설천위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백유가 주기적으로 자신의 흉부를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건 놀랍게도 유예린이었다.
다만.
‘반야바라밀다…….’
반대쪽도 흉부 어필이 장난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특히 이쪽은 상상이 구체적으로 되는 만큼 타격이 더…….
“했네! 했어!”
눈을 감고 속으로 불경을 외우던 설천위는 백유의 외침에 망설임 없이 꿀밤을 먹였다.
“못 하는 소리가 없어!”
“헹! 다 알거든! 눈빛만 봐도! 냄새만 맡아도 다 알아!”
“냄새는 무슨 냄…….”
“맞아요.”
으아아아! 뭐가 맞아!
누가 들으면 같이 온 줄 알겠네!
당당하게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유예린의 앞에 백유가 섰다.
“밖으로 나와! 이번에야말로 승부를 가리자.”
“좋죠.”
“어허! 그만! 너희 둘이 싸우면 연무장이…….”
“흐하하하하! 천위야, 고생이 많구나.”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온 설천운의 외침과 함께 설천위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랜만입니다. 아주버님.”
“신세를 지고 있어요. 아주버님.”
“야!”
너까지 왜!
아니, 왜 다소곳해지는 건데.
유예린의 태도에 맞추는 백유의 모습에 설천위가 고개를 저을 때,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 설천운이 밖을 가리켰다.
“우리까지 딱딱하게 지낼 필요는 없지. 밖에서 가볍게 어울리면서 이야기나 합시다. 제수씨들.”
제수씨들?
히죽 웃는 설천운의 모습에 설천위는 그만 눈을 감았다.
……누님도 나오겠지?
* * *
“허허.”
설가의 연무장.
그곳에 선 설천운은 허허로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화경이 하나, 둘, 셋……. 이제 세는 것도 힘들군.’
막내부터 해서, 제수씨들 둘 다 화경에다 함께 온 세 사람도 화경이라.
여동생의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모두가 자신의 기운을 능숙하게 감추고 있었다.
아마 직접 손을 섞어 보기 전까지는 몰랐겠지.
이 나이 먹고 이제 반쯤 경지를 벗어났건만.
‘재능이란 참.’
불공평하기 그지없구먼.
고개를 저은 설천운은 이내 가볍게 마음의 잡념을 털어 냈다.
그런 사소한 질투에 휩싸여 있을 정도로 수련이 얕진 않았다.
“그럼, 가볍게 대련을…….”
“제가 하죠.”
“저도.”
기다렸다는 듯 나서는 유예린과 백유의 모습에 설천위는 눈을 감았다.
‘……연무장 수리비는 내가 내야 하나?’
유 매야 싸움의 방식이 잔잔하고 치명적이니 기물 파손은 없겠지만, 백유는 다르다.
저쪽은 뭐, 벼락을 뿌리는 게 무공의 토대이니 유예린 정도 되는 상대랑 싸우면 한바탕 난리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백유가 그런 걸 따지면서 몸을 사릴 성격도 아니고.
그러니 연무장이 꽤나 망가질 텐데…….
아니지.
일단 설가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형도 있으니까 이쪽은 내가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음음.
생각해 보니 그러네.
내가 굳이 낼 이유는 없…….
“천위야.”
“넵!”
순간, 자신을 부른 설란의 목소리에 빠릿빠릿하게 대답한 설천위가 몸을 돌리자.
“할 거라면, 확실하게 선택하렴.”
“넵!”
부드럽지만 항거할 수 없는 눈빛을 보이는 누님의 경고에 설천위는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아쉽구나.”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젓는 설란의 모습에 설천위는 식은땀을 흘리고, 소윤혜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 뭐가요?”
“내 동생이 제 감정도 정하지 못해 여자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쓰레기가 됐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워…….”
“아.”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소윤혜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쓰레기.”
* * *
“……난 쓰레기야.”
난 쓰레기야.
난 쓰레기야.
난 쓰레기……. 흑흑.
연무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던 설천위는 등 뒤에서 느껴진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우리 사위님은 뭐 하고 계시나?”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세요.”
“쯧, 딸년을 너무 순수하게 키웠나 봐. 확 잡아먹었어야 하는데.”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니까, 이 아줌마가.
살존을 향해 눈을 부라린 설천위는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백 소저는 못 왔어요.”
“아무렴, 알고말고. 아무리 그래도 내 감각을 속일 정도로 뛰어나진 않을 테니.”
그거야 그렇긴 하지.
아쉬움이 담긴 살존의 목소리에 한숨을 길게 내쉰 설천위는 합의하에 내공은 쓰지 않고 대련을 펼치고 있는 유예린과 백유를 바라봤다.
“잘 가르쳤네요.”
“재능 있지.”
한 손에 단검을 들고, 능숙하게 유예린과 공방을 펼치고 있는 백유의 모습은 솔직히 의외였다.
백유는 깊은 무학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수 싸움보다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변수를 집어삼키는 전투를 선호하니까.
동급의 무인과 내공 없이 겨루는 저런 대련에서는 불리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유예린과 거의 호각지세로 싸우는 걸 보면, 그녀가 살존의 무학을 얼마나 깊게 수련했는지 감이 잡혔다.
그리고 물론.
“난 저 아이가 더 놀랍구나.”
제대로 된 스승도 없었을 텐데.
살존과 사존이라는, 영역을 벗어난 초인들을 스승으로 둔 백유와 달리, 유예린은 거의 독학에 가까운 수준이다.
가문의 무공을 배우고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는 해도, 지금 그녀가 쌓아 가고 있는 경지는 그녀의 아버지조차 닿지 못한 영역이다.
철저하게 고독한 길.
그런 길을 걸어가면서도 백유와 맞설 수 있을 정도의 무학의 깊이를 자랑한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뭐, 주변 모든 것이 스승이라고 하잖아요?”
“환경의 차이라는 건가.”
그것도 그렇겠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련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 아이들을 살핀 살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터 궁금했지만, 대체 저런 아이들을 어떻게 모았는지 궁금하구나.”
“뭐, 어쩌다 보니 모인 거죠.”
틀린 말도 아니지.
소윤혜는 진짜 어쩌다가 합류한 거니까.
어깨를 으쓱이던 설천위는 점점 더 격렬해지기 시작하는 대련에 식은땀을 흘렸다.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응. 말릴 생각이 없는 건 확실해 보이네.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그래도 다치면 안 되니까.”
쓰레기 같은 발상인 건 알지만, 둘 다 소중했다.
……백유를 확실하게 밀어내지 않은 내 잘못이 가장 크니까.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까딱였다.
허공에서 솟구친 검은 벽이 유예린과 백유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더 하면 다치겠다. 그만해.”
“공자가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군요.”
“천위의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망설임 없이 검을 거두는 두 사람.
그 둘을 향해 다가가는 설천위의 뒷모습을 살존은 지그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