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1화
520화-오존회담(五尊會談) (1)
오존회담(五尊會談).
있을 수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라고 몇 년 전까지는 생각했으나, 이번만큼은 무림맹주도 무턱대고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작금의 상황을 파악하고,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자는 의견이 담긴 그 서신에는 마냥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살존과 북존, 사존은 참석한다.]
살존? 사천맹주의 스승으로 꽤나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니 애초에 참가할 인간이고.
북존? 대체 어떻게 꾀었는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사존.
그까지 참석한다는 것은 조금 얘기가 다르다.
그는 사파의 전설이자, 지금 사천맹주를 맡고 있는 백유의 스승이다.
그가 합류한 사천맹의 백유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사파를 개편해 나갈 것이고, 개편될 사파를 북존이 긍정한다면?
구파일방 중 하나가 날아가고 한쪽은 개판이 된 무림맹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살존과 사존이 나오는 곳에 북존이 나오면 무림맹주인 정존은 반드시 참가할 수밖에 없다.
최소 머릿수는 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다.
‘이런 상황이라면 불존도 움직일 확률이 높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최대한 빠르게 의견을 조율해서 모이자.
까딱 잘못하다간 이런 모임엔 연 단위의 시간이 걸리니 그걸 감안해 최소 석 달 안에 만나자는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원한다면 사존과 살존이 정파의 영역을 밟겠다는 내용도 함께.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거절할 명분도 없다.
거기다.
“좋은 기회로군.”
“냉정하게 말해서…… 그렇습니다.”
맹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총군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파와 손을 잡는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질 이들도 있겠지만, 그 불존조차 나서서 사파와 평화조약을 맺고 혈교 등 무림의 숨은 악과 싸우려 한다는 소식은 지금 뒤숭숭한 맹의 분위기를 일시에 바꿀 수 있습니다.”
집단과 집단의 싸움은 기세가 5할은 먹고 들어간다.
싸우기 위한 명분이, 그 과정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지금 무림맹은 미지의 적의 등장에 한껏 긴장해 어디로 칼을 겨눠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는 중이다.
그나마 흑룡단이 아예 대놓고 배신자, 혈교 그런 자들을 노리고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지만, 아직도 정치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의미도 없는 견제를 반복하며 맹의 전력을 까먹을 것이고, 그 결과는 결코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참석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예. 그렇게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이건 추가로 긴급하게 보고드릴 사항입니다.”
총군사에게 넘겨받은 서신을 살피던 맹주는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이건……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공동파의 문제 해결.
전가의 실체와 멸문.
굵직하기 그지없는 서신의 내용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맹주는 확신했다.
“흑룡단주와 흑룡단이 없었다면, 정파 무림은 반 토막이 났겠구먼.”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군요.”
깊은 한숨을 토해 낸 총군사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먼저 알아내고 밝혔어야 하는 일인데…….”
“괜찮네. 자네가 앉은 자리에서 다 알아챌 수 있는 일이었다면 낭괴 그 인간이 직접 발로 뛰며 알아내지도 않았을 테니.”
하물며 아끼는 제자마저 동원해 겨우 밝혀낸 일인데, 전가와 수만 리는 떨어져 있는 무림맹에서 그 실체를 읽어 냈다면 제갈공명도 한 수 배울 놀라운 혜안일 것이다.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여파를 최소화할 방법을 고민해 주게. 상황이 이렇게 됐다고 한들, 맹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는 않을 테니.”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맹주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만독단주의 처벌 내용도 고민해 주게.”
“……예.”
* * *
“후, 힘들었다.”
마차에서 내린 설천위가 기지개를 쭉 켜자 뒤에서 따라 내린 설란이 고개를 저었다.
“마차 안에서 쉬는 게 그리 힘들었니?”
“누이, 내가 노력만으로 무의 경지를 올린 인간인데 그럼 좀이 쑤시지 안 쑤시겠어?”
그건…….
“설득력이 있구나.”
음.
하긴, 그러니 그렇게 수련해서 강해졌겠지.
설천위의 불만을 빠르게 납득한 설란은 몸을 돌려 마차에서 내리는 이들을 챙겼다.
“고마워.”
설란의 도움을 받으며 내린 정유여가 작게 웃고, 그녀의 뒤를 따라 내린 성화린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챙겼다.
“일단, 맹주님께 보고하러 가자.”
성화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설란에게 정유여를 맡겼다.
“누나는 그분 좀 의약당으로 옮겨 주세요.”
“그래. 알았어.”
설란이 정유여를 데리고 떠나고, 성화린과 둘이서 정근각에 들어간 설천위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맹주실로 향했다.
“들어오게.”
그들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들려온 목소리에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 설천위는 허허로운 웃음으로 자신을 반겨 주는 맹주와 마주할 수 있었다.
“고생 많았네. 아주 힘든 일을 해 주었어.”
“힘든 일이긴 했죠.”
공동파의 배신 때문에.
뭐, 애초에 공동파가 당한 것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었지만.
능청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맹주가 손짓한 자리에 앉았다.
“보고로 전해 들었네만, 직접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물론 해 드려야죠.”
맹주의 말에 설천위는 즉각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말해 줬다.
“……그렇게 해서, 일단 초생단주님이 남아서 잔당들을 처리하고 공동파의 안정을 돕기로 했습니다.”
“본인도 꽤나 중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고지식하기는.”
“자기는 마지막에 한 게 없으니 뒤처리라도 하고 가겠다고 하시던데요.”
“허허, 그 친구다운 말이군.”
구목 그 인간이 고지식하긴 하지.
고개를 끄덕인 맹주는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짧지만, 깊은 침묵.
그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던 설천위는 이내 입을 열었다.
“맹주님, 움직여야 합니다. 오존들을 모아서 상황을…….”
“모이기로 했네.”
“……네?”
“오존, 모이기로 했단 말일세.”
“왜요?”
“그걸 자네가 묻나? 당연히 지금의 상황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지.”
아니, 그러니까 왜요?
이 인간들이 왜 자발적으로 모이는데?
무림맹주를 어떻게든 설득하고 소림사에 짱박혀 있는 그 주지 스님을 어떻게든 끄집어내야 겨우 실현 가능한 게 오존회담 아니었나?
무슨 오존층 파괴되는 소리나 할 것 같은 이벤트지만, 현대인이라면 웃음이 터지는 이름과 달리 꽤나 중요한 이벤트였다.
오존회담을 거치는 것만으로 무림의 전체적인 대응력이 크게 향상된다.
음지 세력들의 발호로 생긴 온갖 문제들.
대량 실종, 의문의 학살 등등부터 시작해서 눈치를 보다가 한자리 해 먹으려고 난을 일으키는 놈들까지.
오존회담이 성사되고 난 뒤 정파와 사파가 손을 잡으면 그런 문제들을 처리하는 속도가 크게 빨라진다.
그리고 이건 전국 단위로 깽판을 치고 있는 놈들의 노림수를 막는 길이 되기도 하고.
하나, 제물 수급에 차질이 생기고.
둘, 전투가 줄어 원귀가 줄어든다.
셋, 가장 중요한 연옥을 여는 일에 차질이 생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라도 오존회담은 성사되어야 하고, 반드시 진행하는 것이 좋은 이벤트인데…….
‘자동으로 진행됐네?’
뭐 때문이지?
맹주가 갑자기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나?
아니면…….
‘사존 그 양반인가?’
따로 움직인다더니, 심상 세계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네.
정파와 사파가 손을 잡는 게 일 처리가 빠를 거라고 넌지시 흘렸던 말인데.
하긴, 사존 그 양반이 어떤 인간인데.
이쪽이 협력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만으로 대충 계산이 끝났을 인간이다.
그리고.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겠어.’
정말 다행이었다.
오존회담을 여는 데만 또 일 년 가까이 소모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사이에 도저히 안 되면 그냥 애들을 데리고 따로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일이 잘 풀리네.’
“그럼 오존회담은 어디서 열리는 거죠?”
“자네도 잘 아는 곳일세.”
“……제가 잘 아는 곳이요?”
무림맹에서 열리나?
맹주의 말에 설천위가 고개를 갸웃했고, 성화린은 짐작이 가는 게 있는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호남설가. 그곳에서 오존회담을 열기로 했네.”
* * *
“그래서 가문으로 돌아가는 거구나.”
“응.”
“……이런 식으로 돌아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마차 안, 설천위와 함께한 설란은 고개를 저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전에 봤을 땐 건강하시던데.”
“다행이네.”
두 분 다 워낙 감정 표현이 없다는 것이 동생들을 삐뚤어지게 만든 원인이었지만, 두 사람 다 심성은 착한 이들이다.
특히, 어머니는 일찍 죽은 설란과 설천위의 친모를 대신해 자신의 친자식들과 차별받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친자식에게까지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사람이다.
공명정대.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북존은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일주일밖에 못 쉬었는데 하고 싶었던 일은 했어?”
“응? 아, 조금.”
정유여를 치료하고, 공동파 장문인이 스스로 팔을 베는 것을 보고 살짝 느낌이 온 게 있었는데 아직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다.
신의는 흥미로워했지만.
아무래도 조금 실험이 필요한 일인지라 당장은 무리일 것 같았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그렇구나.”
이 괴물 같은 동생도 시간이 걸리는구나.
그것을 확인한 설란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예린이에게 연락은 했니?”
“누나는 예린이가 뭐야, 예린이가…….”
올케라고 하든가.
친한 건 보기 좋다만.
유 동생도 아니고 예린이는 너무 과하게 친한 호칭이 아닌가, 이 동생은 그리 생각합니다. 누님.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연락 보내 놨어. 아마 바로 가문으로 올 거야.”
“그래, 다행이네. 이번에도 연락 안 했으면…… 나는 토막 난 동생은 보고 싶지 않거든.”
섬뜩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네.
누가 이 사람을 빙화라고 했어?
아주 그냥 농담까지 살벌해.
차가워서 앗뜨 하고 베이겠어.
설란의 한심하다는 눈빛을 피한 설천위가 여러모로 술법의 연구에 몰두하는 사이, 마차는 빠르게 이동해 설가에 도착했다.
이동한 마차는 고작 두 대.
맹주와 총군사가 탄 마차가 하나.
설천위와 설란이 탄 마차가 하나.
이렇게 둘이다.
물론 하나로 가도 되지만 굳이 마차를 둘로 나눠 탄 건 맹주의 배려였고.
설란은 원래 일하려고 했으나, 초생단 전체가 지금 공동파에 파견 나가 있는 상태이므로 강제로 휴가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라서 가문으로 귀환했다.
“어으, 도착했네.”
“또 좀이 쑤시니?”
“조금?”
확실히 수련도 중독이야.
할 땐 죽도록 힘든데, 막상 안 하면 영 찝찝해.
헬창들이 이런 느낌인 건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가문의 정문으로 걸어가던 설천위는 묘한 느낌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어머, 왜 걸음을 멈추고 그래?”
간드러진 목소리.
묘하게 색기를 담은, 남심을 흔드는 목소리에 설천위의 동공이 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흐음, 여전히 탄탄하네. 우리 천위는.”
재능은 재능인가……!
살존 밑에서 배웠다고 어느새 은신술이 이 정도까지!
어느새 자신의 옆에 나타나 자신의 어깨를 손으로 쓸어내리는 백유의 손길에 설천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나온 큰형의 눈이 격렬하게 요동치다 못해 그 입꼬리는 지금 당장에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처럼 씰룩이고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뒤쪽에서 빙화라는 분의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이것만으로도 살벌한데…….
꿀꺽.
하나가 더 추가됐다.
“그 손 치우시죠?”
어느새, 백유의 반대쪽에서 나타나 설천위의 어깨를 잡은 유예린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은은하게 번졌다.
“제 거니까.”
내가 침 다 발라 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