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9화
518화-공동파 (4)
[‘아’는 무슨 ‘아’냐! 이놈아!]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느냐며 자신을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설천위를 향해 소리친 신의가 고개를 저었다.
[수혈을 짚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상처를 도려내고 봉합하는 치료 중에 깨어나서 발버둥치면 그게 더 문제니라!]
“아하, 에이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씀해 주시지…….”
하긴, 현대에서도 마취는 따로 전공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심오한 학문이었는데, 음음.
무림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렇게 만능일 순 없겠지.
……끔찍한 고통에 쇼크사를 할 거냐, 자다가 더럽게 아파서 깰 거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후자겠지만.
의사는 환자가 아닌 환자의 생명을 살펴야 하는 직업이니까. 음음.
아무튼.
“일단 목숨은 건졌으니, 부단주님을 부탁할게요.”
“부탁? 지금은 손이 하나라도 부족할 터인데.”
“그렇긴 한데요.”
구목의 말에 멋쩍게 웃은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느낌상 또 괜찮을 것 같거든요.”
처음에는 어설픈 자신감이었지만.
전이문을 타고 넘고 몇 번의 전투를 거치는 사이에 그건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는.
“강해진 것 같아서요.”
확실하게 강하다.
* * *
공동파에서 일어난 전투는 순식간에 격렬해졌다.
진법을 뚫고 들어온 적들과 초생단이 맞붙고, 괴이한 술사를 몰아붙이는 공동파 장문인의 검은 더더욱 거칠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기절해 있던 공동파의 문인들도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의 변화.
아니, 적을 눈앞에 두고 허무하게 기절한 순간 이미 목숨은 없었던 것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이 너무 많아서 처한 상황을 미처 따라가지 못할 때.
“정신 차려라!”
익숙한 장로의 목소리가 그들을 깨웠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검을 쥐고 전투에 나선다.
어린 제자들은 공포에 떨면서도 서로 뭉쳐서 사방을 경계했다.
그리고.
‘많아.’
전장의 중앙, 술법을 이용한 지원을 더하며 전장 전체를 관조하던 성화린은 진법 밖에서 느껴지는 적의 기세에 입술을 깨물었다.
많았다.
입구를 좁혀 놓은 덕에 그 많은 적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찌 됐든 물리쳐야 할 적의 수가 많다는 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
‘……원화의 술을 펼치면?’
5할, 조금 더 무리하면 7할 정도는 쓸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문제는 그 뒤였다.
술사로서 가장 높은 역량을 지닌 자신이 무너지면?
과연 부하들이 적의 술법을 견뎌 낼 수 있을까?
적들 사이에 얼마나 술사가 끼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거기다 악귀 중 상급 귀(鬼)가 섞여 있다면 부단주도 없는 지금은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이대로 버티는 것에 의미가 있나? 희망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성화린은 고개를 들었다.
희망?
있다.
있고말고.
자신이 원화의 술을 펼치고 쓰러지더라도 뒤를 이어 술사들을 지휘해 줄 인물이 이곳에 있지 않은가.
지금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지령지언(至靈智言)…….”
원화의 술의 주언을 외우기 시작한 성화린의 주위로 영력이 들끓는다.
‘설천위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그렇게 확신한 성화린이 다친 몸을 끝까지 쥐어짤 방법을 실천하기 위해 원화의 술을 발동시키려는 그 순간.
“그만.”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이 그녀의 영력을 진정시켰다.
“그거, 체력 없으면 생명력을 깎아먹는다니까.”
난전이 펼쳐지고 있는 이 공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설천위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거, 무리하게 쓰지 말라니까.”
“……언제?”
대체 언제 내 등 뒤까지 접근했지?
익숙한 영력이라 감지가 늦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접근할 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차오르기 무섭게 성화린은 또 다른 의문에 빠졌다.
‘내 술법을 해제했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해제한 건 아니었다.
단지 발동의 흐름을 뒤틀었을 뿐.
약간의 뒤틀림에 본능적으로 자신이 힘을 거뒀을 뿐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설천위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하지만, 자신이 고작 이 정도의 방해로 술법을 멈췄다고?
성화린이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아까 왔는데요?”
언제냐고 물으면 대답할 거리가 궁한데.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당황하는 성화린을 설득하길 포기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개판.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그리고.
‘익숙한 듯 낯서네.’
괴이와 인간이 뒤섞여 싸우는 전장.
앞으로는 흔해 빠진 전장이 될 거다.
무림인과 무림인 사이의 격돌이 오히려 드문 경우가 되겠지.
무인도 괴이를 상대할 줄 알아야 하고.
괴이도 무인을 상대할 줄 알아야 성립하는 전장이 온다.
아니, 왔다.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여태까지처럼 천천히 움직일 수 없게 돼 버렸다.
이제 무림맹을 챙긴다는 안일한 방침은 치워 버릴 때가 됐다.
어차피 제대로 된 녀석이 전장에 나타나면 그놈에 의해 깔리는 영역만으로 일반 무인들도 능히 괴이를 보고 만질 수 있게 된다.
학관 시절에 철백과 서하영이 현태중을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각자 생존할 최소한의 조건은 전장에 서면 어떻게든 해결된다.
하나라도 더 살리겠다고 영감과 영안을 개안시켜 공격에 영력이 깃드는 법을 가르치고자 했지만.
이제는 다수의 약자에 집중할 때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설천위가 시작부터 원했던 것.
그리고 지금도 원하는 것.
“슬슬 때가 됐네.”
강자.
압도적인 괴이에 대항할 수 있는 진짜 강자들을 모아 움직일 때가 됐다……만.
“뭐, 그건 다음에 생각하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일단 전가로 향한 유 매가 돌아오고 난 뒤에 상의해 봐도 늦지 않겠지.
거기다 철백과 서하영도 맹으로 복귀해야 하고.
핵심 전력들이 뭉치면, 그때 회의를 해서 앞날을 정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일단, 여기부터 정리하죠.”
지금은 여길 정리하고 돌아갈 생각을 하는 게 맞겠지.
다행히 아직 사망자는 보이지 않았다.
난전이라고는 해도, 진법으로 들어오는 적의 수를 확 줄이고 철저하게 준비한 대로 진형을 짜서 대응했으니까.
거기다.
“숙여라!”
부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분전해 주는 누이도 있었고.
다리를 꿰뚫려 비명을 지르는 공동파의 무인을 구하며 적을 베어 버린 설란이 재빨리 주위를 훑었다.
조금이라도 더, 한 명이라도 더……!
전투가 길어지면, 반드시 죽는 사람이 나온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 최대한……!
“누나, 그만.”
“……아.”
이를 악물고 날카롭게 집중력을 끌어올리던 설란은 설천위의 한마디에 자신도 모르게 검을 내렸다.
따뜻하다.
설가(雪家)와는 어울리지 않는 따스함이구나…….
“뭔가 더운데…….”
“앗, 뜨거!”
……따스한 수준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순간 주위에서 느껴지는 반응에 고개를 갸웃한 설란은 이내 천천히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무림맹에서 봤던 그 괴이의 능력!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에 설란의 눈이 설천위를 향하고.
“역시 다수를 상대로 이것만 한 게 없지.”
어느새, 끓어오르는 용암의 기둥 위에 선 설천위가 양팔을 뻗었다.
비현실.
말도 안 되는 그 모습에 냉철하기로 유명한 설란의 입마저 살짝 벌어지는 그때.
[대분화(大噴火)]
활짝 펼친 설천위의 양팔 아래에서 치솟은 용암이 하늘을 뻗어 나간다.
어느새, 하늘 위를 메운 먹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용암.
이게, 이게 술법?
술사란 이런 이적을 벌이는 게 가능한 존재였단 말인가?
경악스러운 광경에 설란은 자신의 의문에 답을 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을 바라본 순간.
설란은 깨달았다.
‘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그 성화린조차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니까.
일단, 이게 아무나 할 수 없는 건 확실해 보였다.
“역시, 주먹으로 쏘아 올리는 게 좀 더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멋을 따질 때냐.
정말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동생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설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의 막냇동생은 이제 이해를 요구하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저 누나로서.
믿고 곁에 있어 주는 것만 하자.
그렇게 생각한 설란은 빠르게 이해를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했다.
설천위가 무슨 생각으로 용암 기둥을 하늘을 향해 날렸는지 모르겠지만.
“전원! 전투 준비! 조금만 더 버티면 끝난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설천위가 조급해지지 않도록 부하들을 다독여 더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었다.
* * *
‘이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공동파 장문인의 검을 피하던 술사, 조인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아직도 분노하고 있었다.
고독을 해독하는 거?
가능하다.
당가의 인물이거나 혹은 뛰어난 독 지식을 가진 자라면 고독의 존재를 눈치챌 수도 있다.
특수한 약물을 이용해 고독을 마비시켜 빼내는 것도 가능할 수 있겠지.
하지만.
‘불가능하단 말이다!’
동시에 모든 고독들을 마비시켜 빼내는 건 불가능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단 말이다!
이쪽이 반응해서 고독을 조작하기도 전에 일제히 모든 고독들을 기절시키다니.
심지어, 꼴을 보아하니 고독을 전부 체외로 배출시키기까지 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거기다.
“노오오옴!!”
특히 더 강한 고독이 박혀서 그게 빠져나갈 때 꽤나 심한 내상을 입었을 문주 놈의 기세가 저리도 팔팔한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분노로 움직인다고 한들 이게 가능키나 하단 말인가.
저놈 탓에 대체 몇이나 되는 식령이 사라졌단 말인가.
복마검(伏魔劍).
영력의 영(靈) 자도 모르는 놈의 검에 항마(降魔)의 힘이 은은하게 서려 있어 상대하기가 너무 까다로웠다.
그래서 고독을 사용했던 건데……!
가뜩이나 민감한 놈들에게 사용하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노력해 왔던가!
이 일만 잘 마무리했으면 공적을 인정받아서 능히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당당하게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 터인데……!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분노에 술사는 달려드는 개운을 보며 피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좋다! 네놈이 원한다면 그 목을 잘라 주마!”
이놈은 최후의 수단이니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원한다면 꺼내 주마!
문주 놈의 뒤에서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며 퇴로를 막고 있는 장로 놈들까지 깡그리 쓸어버려 주지!
살의를 일으킨 술사는 자신의 몸에 봉인해 놓은 술식을 해방했다.
인간을 잡아먹고, 그 술사마저 잡아먹을 위험이 있어 봉인해 놓은 원귀(冤鬼).
그놈을 풀면 고작해야 초절정에 불과한 문주 놈이나 장로 놈들 따위는 얼마든……지…….
“하?”
치켜든 고개 위로 먹구름이 보인다.
눈이 뒤집혀 달려들던 문주 놈이 튀어나온 원귀에 튕겨 나갔지만, 술사의 눈에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왜.
왜.
‘이제야 눈치챘지?’
대체 어떻게?
저 하늘에 가득 찬 저 영력은 도대체.
뭐……?
슈우우우욱! 쾅!!
순간, 자신의 옆에 있는 땅이 터져 나가며 그 폭발에 휩쓸린 술사가 땅을 나뒹굴었다.
겨우 몸을 일으키는 순간, 후끈한 열기가 밀려온다.
당황해서 고개를 치켜드니 눈에 보이는 검은 것은 먹구름이요, 붉은 것은…….
“……용암?”
불지옥이 세상에 현현했다.
떨어지는 용암에 술사가 불러 낸 원귀가 터져 나갔다.
혼과 혼이 연결된 존재가 터지고 녹아내려서 소멸하는 반동에 술사의 혼이 뒤흔들렸다.
“커헉!”
피를 토해 내고 흙을 움켜쥐고 땅을 기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게…… 무슨?”
개 같은 일이?
기어이 눈을 뜬 술사가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쏟아져 내리는 용암을 뚫고 달려와 자신의 목에 검을 박아 넣는 개운의 얼굴이었다.
불지옥에서 올라온 지옥의 옥졸처럼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