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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516화 (516/624)

제516화

515화-공동파 (1)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올라 입으로 튀어나오기도 전에 설란은 이변을 눈치챘다.

자신의 어깨너머에서 스멀스멀 뻗어 나온 보라색 기운.

어디선가 본 듯한 기운이다.

대체 언제?

그런 의문을 머릿속에 품은 것도 잠시.

설란은 그대로 성화린을 놓고 손을 뻗었다.

불끈 쥔 주먹을 뻗는다.

쾅!!

손이 박살 나는 것 같은 강력한 충격과 함께 날아온 철구와 부딪힌 손이 튕겨 나왔다.

어깨가 통째로 뜯어질 것처럼 크게 뒤로 밀린다.

하지만.

까득!

버틴다.

이를 악물고, 설란은 두 다리에 힘을 더해 자리를 지켰다.

본능이 외쳤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

성화린이 하는 일이 방해를 받아선 안 된다.

그런 확신이 들었기에 설란은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됐…… 다!”

그녀의 등에서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성화린의 한마디와 함께 허공에 멈춰 있던 철구가 다시 한번 설란을 향해 쏘아졌다.

부서지진 않았지만 금은 확실하게 간 주먹을 움켜쥐며, 설란은 악물고 있던 이를 한 번 더 깨물었다.

이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설란은 몸을 비틀었다.

한 번.

딱 한 번만 막아 낸다.

성화린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됐다는 말은 준비가 끝났다는 소리와 같다.

그러니.

‘딱 한 번!’

막아 낸다!

그 뒤엔 술사인 성화린에게 맡긴다!

자신의 수십 배는 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철구와 마주하며, 설란은 주먹을 뻗었다.

닿는 순간, 손은 처참하게 망가질 거다.

어쩌면, 다시는 왼손을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오른팔의 부상 때문에 반사적으로 왼팔을 휘둘렀는데,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오른팔로 밥은 먹을 수 있겠네.

그런 생각 끝에 주먹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운 철구와 닿는 그 순간.

쩡!!

강렬한 소음과 함께 설란의 몸이 튕겨 나왔다.

거칠기 짝이 없는 충격에 몸이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지만, 설란의 정신은 오히려 멀쩡했다.

그도 그럴 것이, 끔찍한 고통을 각오했던 왼손이 완전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멀쩡했으니까.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데 통증이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

그것만으로 손이 박살 나진 않았음을 확신한 설란이 고개를 드는 순간.

‘아!’

그녀는 왜 성화린이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했는지 깨달았다.

약간의 분노,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몹쓸 누나네.’

안도감.

자신과 성화린을 짓밟기 위해 날아오던 철구를 한 손으로 막아 낸 동생의 뒷모습에 설란은 자조적인 실소를 지었다.

“누나, 어서 백화단주님을.”

“……응.”

동생의 부탁에 기력을 쥐어짠 듯 기진맥진해서 쓰러져 있는 성화린을 조심스럽게 챙긴 설란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후우.”

깊은 한숨을 뱉어 낸 설천위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상대방을 바라봤다.

“곤박인가.”

[……네놈, 설천위로구나. 허나 어찌 나를 아는 것이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철구를 잡아당겨 회수한 곤박의 눈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눈깔 적당히 떠라. 그렇게 째려본다고 답 안 나오니까.”

진짜, 확 마! 눈깔을!

치솟는 분노를 속으로 씹어 삼키며, 설천위는 영력을 풀었다.

공동파.

혹시나 했지만, 초생단주와 백화단주까지 움직였다는 말에 일단 가만히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음지의 놈들이 예상보다 일찍 준동하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여러모로 부하들을 다독이고,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응 방법을 알려 주긴 했지만.

‘이러면 유 매 쪽도 안심 못 하겠는데…….’

설천위가 알고 있던 게임 속의 정보와 너무 틀어져 버렸다.

예상치 못한 적이 나올 경우 알려 줬던 정보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좀 바쁘게 움직여야겠네.”

이곳에서 질질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새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철구를 보며 설천위는 손을 뻗었다.

“곤박이라.”

철컥!

철구와 연결되어 있는 쇠사슬이 허공에 걸린 듯 요동치고, 그 반동으로 경로가 틀어진 철구가 공중에서 회전했다.

회전하는 철구가 만들어 내는 풍압에 주위에 있던 나무들이 뿌리째 뽑힐 듯 휘청거렸지만.

“십이군 따위에 시간을 쓸 생각은 없는데.”

쩍!

철구에 금이 가는 것을 시작으로, 설천위의 주위에 차올랐던 영력이 요동쳤다.

존재 자체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은 힘.

그것이 설천위가 학관 시절부터 사용하던 패기라는 것을 직감한 곤박은 필요 없는 호흡과 함께 배에 힘을 줬다.

버틴다.

고작해야 인간의 기세.

그분께 힘을 받은 자신이라면 견뎌 내지 못할 리가…….

[컥!]

한쪽 무릎이 땅에 닿는다.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 몸이 꺾인 곤박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를 악물고 제대로 소리조차 내뱉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떠는 곤박의 모습을 보며 설천위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더럽게 강해졌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자신을 굴복시켜 흡수해 놓고 강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건 그것대로 참으로 치욕적이군.

불만을 표하는 흑암지규군의 투덜거림을 가볍게 무시한 설천위는 공간에 가득한 기세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만들어 낸 패기지만, 확실히 달랐다.

사존이랑 싸울 땐 상대가 워낙 괴물 같아서 체감하지 못했고, 당가는 정리하는 데 별 힘도 안 들었으니 몰랐지만.

“강해졌네.”

확실히 강해졌다.

이 정도라면.

‘그 영감탱이랑 싸울 만하겠어.’

이기진 못하겠지만, 죽지 않을 자신은 확실하게 생겼다.

하긴, 애초에 자신보다 강한 적들을 상대로 이겨 왔다.

삼류 때는 기어코 일류를 잡았고.

초절정일 때는 화경의 고수를 죽였다.

영적인 재능에 천마와의 인연으로 얻은 혼원패공이라는 알 수 없는 무공의 힘까지.

솔직히 말해서 이게 주인공 버프가 아니면 뭔가 싶을 정도로 기연을 잘 먹었다.

괜히 게임 속 정보로 다른 기연을 얻으려고 목매지 않았던 이유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도 소화하기 힘드니까 굳이 건드리지 않은 거다.

그렇기에 솔직히 말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현경이라면.’

진짜 할 만할 것 같은데.

아니, 뭐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몸뚱이로 현경에 오르는 건 무리인 것 같지만, 만약 오를 수만 있다면 연옥에서 넘어올 그놈들도 충분히 상대할 만할 것 같았다.

다만.

‘전부 넘어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답이 없지.’

그러니, 아예 넘어오는 걸 막아야 했다.

혈교의 혈신도.

사혈천의 신도.

혈사련의 련주도.

모두 하나같이 괴물들밖에 없다.

지금 허울만 인세에 두고 움직이고 있는 놈들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연옥에 갇혀 있는 본체가 올라온 순간 답이 없는 존재가 된다는 건 확실했다.

그러니.

“막아야겠지.”

그런 일들이 생기기 전에 막아야 했다.

강해진 거?

좋다, 이거야.

그러니 그걸 써먹어야지.

현경에 도달하는 것이 요원하다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서 그 경지에 도달할 필요가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면 된다.

애초에 그걸 목표로 움직이고 있기도 했지만.

“뭐, 일단.”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로 기어코 일어서려고 발악하는 곤박을 보며 설천위는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너부터 처리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네.”

[크어어어어어어!!]

기어코 억압을 끊어 내고 일어선 곤박의 포효와 함께 설천위의 손에 들린 흑도가 사라졌다.

베고, 베고, 또 벤다.

곤박의 몸을 휘감고 있는 쇠사슬도.

그의 무기인 거대한 철구도.

두껍다 못해 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몸도.

흑도의 날에 베어진다.

쇠사슬이 끊어지고.

철구가 조각나고.

육체가 갈라진다.

곤박이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과격한 폭력의 폭풍이 지나가고.

“십이군. 이제 쉽네.”

곤박의 목을 잘라 낸 설천위가 몸을 돌렸다.

구석진 곳, 설천위가 만들어 낸 흑관 사이에서 상처를 돌보던 설란은 다가오는 동생을 보며 웃었다.

“천위야…….”

“어휴.”

설란의 부름에 대답할 생각도 없이, 한숨과 함께 설란의 손을 잡은 설천위는 조잡하게 감겨 있는 천을 풀어내고, 품에서 약을 꺼내 발랐다.

“금이 갔네. 못해도 사흘을 쉬어야겠어.”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못 싸우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쉬기나 해. 누나.”

무인, 그것도 경지가 높은 무인이니 사흘이지 평범한 사람 같으면 잘못 관리하는 순간 평생의 장애를 걱정해야 할 중상이구먼.

신의의 특제 연고를 꼼꼼하게 상처에 발라 준 설천위는 움직이려는 설란을 억지로 잡아 누른 뒤 성화린에게 다가갔다.

“이 누님은 또 왜 이러고 계신대.”

전이문을 만들어 내며 힘을 어찌나 쥐어짰는지 아예 의식을 잃어버린 성화린은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다행히 죽은 건 아니지만…….

“못해도 이틀은 잠에서 못 깰 것 같은데.”

아니, 잠이 아닌가.

이런 건 의식상실이라고 불러야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쯧쯧, 혀를 차며 내공과 영력을 조심스럽게 성화린에게 집어넣던 설천위는 자신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왜?”

“어떻게……?”

“어떻게라니? 봤잖아. 전이문으로 온 거지.”

“너…… 그거 네 권속을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다며?”

“그야 그렇지.”

축지(縮地)가 아니니까.

신선들이 쓰는 축지는 말 그대로 땅을 줄여 공간 자체를 접어서 이동하는 방식인지라 방향을 정하고 초고속으로 이동하는 개념이다.

남들이 한 걸음으로 30cm를 전진하는 걸 3km를 전진하는 느낌?

이것도 공간 이동이라면 공간 이동이지만, 설천위가 사용하는 전이문은 엄밀히 말하면 축지와 달랐다.

이쪽은 공간과 대상을 지정해 말 그대로 통로를 여는 거다.

물질계를 벗어난 통로.

당연히 열고자 하는 곳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성립하는 방식이기에 설천위는 그 인식의 방법으로 권속을 사용했다.

다만.

“백화단주쯤 되면 술식을 알려 준 것만으로 열 수 있지.”

성화린은 명색이 천재 중 천재라고 불리며 젊은 나이에 단주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전이문의 술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익힌다면, 전이문을 여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도착점을 지정하고 설천위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걸 할 수 있도록 설천위가 자신의 힘을 담은 도구를 넘겨주기도 했고.

물론, 이 도구는 유예린도 가지고 있다.

그쪽은 아예 술식까지 전부 새겨져서 그냥 부르면 부를 수 있는 거로.

설천위가 괜히 유예린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최종적으로는 식신을 완성해서 청랑을 붙여 주는 거지만.’

그럼 청랑이 알아서 상황 판단을 하고 문을 열 수 있으니 한층 더 안전해진다.

유예린이 의식을 잃어도 설천위를 부를 수 있다는 소리니까.

뭐, 아무튼.

“그래서 불러서 왔지.”

“……그래.”

불러서 왔다니.

너, 무림맹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아니?

애초에 무림맹에서 온 건 맞나?

다른 곳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낀 설란은 꼬이기 시작하는 사고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상황부터 설명해 줄게.”

첫날의 상황, 전투의 승리, 이어진 공동파의 배신까지.

설란의 설명을 전부 들은 설천위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독이네.”

“독?”

“아마 높은 확률로 고독일 것 같은데.”

백화단주가 못 알아챘다는 점에서 일단 술법은 아니다.

사람의 심리를 조종하는 술법을 대규모로, 그것도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에게 펼치면서 백화단주가 아예 눈치도 채지 못할 정도로 힘을 감추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럼 이제 남는 건 회유되었거나 협박당했거나.

둘 중 하나인데, 공동파는 나름대로 콧대가 높은 인간들이다.

웬만한 회유에는 넘어갈 이유가 없을뿐더러 웬만한 협박은 무시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물며 무림맹에서 무려 두 개나 되는 단이 지원군으로 합류했는데 어중간한 협박에 배신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남는 건 독.

“……높은 확률로.”

“제자들에게 퍼져 있고, 또 본인들도 중독됐을 가능성이 높지.”

설천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란은 미간을 찡그렸다.

만약 고독이라면, 공동파의 무인들을 구할 방법이 없다.

거기다 단주님이나 단원들도 중독됐다면?

아찔한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

“조금 과격한 방법을 써야겠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사람이든 벌레든 기절하면 못 움직이는 건 똑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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