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5화
514화-전가(錢家) (4)
[아?]
떨어지는 시야.
자신이 어떻게 된 건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는 거인의 뒤에서 나타난 소윤혜는 한숨과 함께 유예린에게 다가갔다.
“상처 봐 봐.”
“전 괜찮…….”
“너 흉 지면 내가 설천위한테 혼나.”
손을 거부하는 유예린을 억지로 잡아챈 소윤혜는 한숨과 함께 곳곳이 붉게 물든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다른 사람들 전원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데, 가장 회피 능력이 좋은 유예린만 상처가 가득한 이 상황.
한숨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은신이란 의식의 인지 범위를 벗어나는 기술.
그것이 눈을 속이는 것이든, 청각을 속이는 것이든 일단 상대의 감각을 속이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유예린은 반대로 상대의 시선을 확 끄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뿌려 낸 기세로 상대의 기감을 헝클어트리고, 지독할 정도로 선명한 살기를 풍겨 적의 시선을 완벽하게 자신에게로 유도하는 기술.
솔직히 말해서 유예린 정도나 되는 인물이 시선을 끌어서 방금 세 사람의 기습이 홀린 듯 들어간 거지, 아니면 어림도 없었다.
꽤나 격렬한 전투를 거쳤어야 확실하게 마무리 일격을 넣을 수 있었겠지.
“누님 이거, 재생하는데요?”
“정말?”
거, 독하네.
유예린의 상처를 살피다가 들린 주현운의 목소리에 한숨을 내쉰 소윤혜는 손을 멈추고 일어섰다.
“육체는 없잖아?”
“아무래도 본체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음.”
설천위와 백화단주에게 여러모로 영적 존재에 관한 수업을 들었던 세 사람은 섬세하게 거인을 살폈다.
목이 잘렸음에도 반응하는 몸. 실체를 가진 듯 만져지지만, 그 안에 생기는 없었다.
“이건 아무래도 본체를 찾아 마무리하지 않으면 못 끝내는 종류 같은데.”
“제물이 몇이나 들어갔을지 모르니 힘을 깎아서 소멸시킨다는 선택지도 힘들겠는데요?”
“쯧.”
가볍게 혀를 찬 소윤혜는 한숨과 함께 도를 휘둘렀다.
“일단 썰어 놓고, 두 명이 감시하고 나머지 둘이 찾으러 가자.”
“그거라면 전무곤의 기척을 찾으시면 될 겁니다. 창린이 함께 움직였거든요.”
“아, 그래요?”
유예린의 말에 밝게 대답한 문율은 별다른 말 없이 주현운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자연스럽게 남게 된 소윤혜와 유예린.
그리고.
“언니.”
“왜?”
“요즘 진도는 어때요?”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게 왜 궁금한데?”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도중에 그게 왜 궁금한데.
쓰라린 거 참기도 힘들지 않니?
“그야 언니는 뻑하면 나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니까?”
“누누이 말하지만, 그건 네가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해서잖아!”
여자들끼리 있을 때 했던 그, 그 망측한……!
“문 소협은 뭐라 안 해요?”
“걔는 무공을 이상하게 익혀서 그런지 머릿속에 꽃밭만 있어.”
문율은 애초부터 순한 녀석이었는데, 설천위 덕에 재능을 개화한 뒤로는 정말 무공에 미쳐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도 없다는 것 같던데.”
“언니를 좋아하는데 숨기는 건 아니고요?”
“그랬으면 같이 움직이겠어?”
“흐음.”
“아니다.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유예린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에 한숨을 내쉰 소윤혜는 약을 바르는 손에 힘을 더했다.
물론 그렇다고 유예린의 표정이 고통으로 물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진짜 아니야. 그리고 만약 삼각관계라면 셋 중 하나는 단을 떠날 텐데, 단주 대리로서 막을 생각을 해야지.”
“전 언제나 사랑을 응원하는 사람이라.”
“…….”
차마 정말 너랑 안 어울린다는 말을 하지 못한 소윤혜는 묵묵히 약을 바르며 화제를 돌렸다.
“단주는 왜 안 불렀어?”
“설 공자요?”
“오는 길에 당가에 들렀어도 됐잖아.”
엇갈릴 확률이 높긴 하지만, 어차피 경공으로 이동하면 그리 긴 시간을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덕분에 늦지 않게 창린과 전무곤을 구할 수 있긴 했지만.
설천위가 합류했다면 두 사람이 없어도 전가 정도는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거다.
물론.
“어차피 생각도 없었으면서 화제 돌리기는.”
“……아니거든?”
소윤혜의 반응에 피식 웃은 유예린은 어느새 약이 다 발린 상처를 천으로 감싸 주는 소윤혜의 손길을 만끽했다.
“짐이 되기 싫으니까. 천위가 없어도 우리끼리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하니까.”
“걔한테 누나라고 불리는 건 죽어도 싫어하면서 용케 그런 생각을 하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연상 취급을 받는 건 달라요.”
“그건 그렇긴 하지.”
자신은 워낙 나이 차가 확실해서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나이도 비슷하고, 어리광도 부리고 싶으면 나이 차를 인정하지 않는 편이 정서적으로 좀 더…….
“아쉽다는 표정인데요?”
“아니거든.”
장난스럽게 웃는 유예린에게서 손을 떼고 일어선 소윤혜는 괜히 도를 휘둘러 꿈틀거리는 거인의 몸을 베어 냈다.
스멀스멀 재생하려는 것이 참으로 지독했다.
이쪽은 죽음을 담은 일격으로 베어 냈는데, 죽지 않고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려고 한다는 게 참…….
적의 지독함과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하며 고개를 저은 소윤혜는 유예린의 옆에 앉았다.
“초생단이랑 백화단은 어찌 됐으려나?”
“다들 잘하고 있겠죠.”
초생단과 백화단은 공동파를 구하기 위해 출정했다.
구파일방의 하나인 공동파에서 무림맹으로 급하게 지원 요청을 보냈을 정도다.
상황은 심각할 것이고, 최악의 경우 무림맹의 전력을 외부로 끌어내기 위한 함정일 수도 있다.
다만.
“백화단주님도, 초생단주님도 강하니까요.”
강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초생단은 무력을.
백화단은 술법을.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고 병력까지 끌고 갔으니 피해가 아예 없을 순 없겠지만, 임무 수행에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그러니, 저희도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면 될 거예요.”
“그러네.”
유예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소윤혜는 자리에서 일어서 도를 쥐었다.
“슬슬 만났을 것 같은데.”
어떤 반응이 올까?
전투태세로 돌입한 소윤혜와 유예린의 시선이 쓰러진 거인을 향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거인의 잔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후욱, 후욱.”
거친 호흡을 몰아쉬면서 달리는 설란은 끊임없이 생각했다.
‘공동파, 공동파가 배신한 건가?’
머리가 쉽사리 돌아가지 않았다.
사고가 막혀서 부드럽게 이어지질 않았다.
충격.
심리적 충격이 사고의 흐름을 막고 있었다.
스스로의 문제를 자각한 설란은 볼살을 씹었다.
살점이 뜯겨 나올 정도로 강하게 씹은 탓에 느껴지는 아찔한 통증 때문에 흔들렸던 정신이 균형을 되찾는다.
그리고 빠르게 상황을 인정했다.
그래.
인정하는 게 먼저다.
‘공동파가 배신했다.’
그것이 협박에 의한 것이든, 자의에 의한 것이든 명확한 사실은 공동파가 배신했다는 것이다.
기습.
적과 함께 싸워 전우애가 고취된 상태에서 진행된 뒤풀이.
간부들끼리 모인 식사 자리에서는 술도, 독도 없었기에 오히려 긴장을 풀고 상대와 마주했다.
그 빈틈을 찌른 기습.
반응이 늦은 백화단주는 중상을 입었고, 늦게 반응했지만 백화단주를 지키기 위해 무리한 초생단주 또한 중상을 입었다.
무엇보다.
‘단주님을 잃었어…….’
동시에 기습을 당했지만, 그나마 부상이 적었던 설란이 백화단주를 데리고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 초생단주가 남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 탓에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단주.
본래라면 그 목이 붙어 있는 걸 기대하는 것조차 사치겠지만.
‘심장과 목을 노리지 않았어.’
죽일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기습에서 심장과 목을 노렸을 거다.
그랬다면 자신과 단주님이라면 몰라도 백화단주는 무조건 목숨을 잃었을 거다.
그 정도로 자연스럽고, 그 정도로 완벽한 기습이었으니까.
이미 수십의 제자들이 죽고, 필사의 항전을 이어 가고 있는 공동파가 배신을 할 거라고 그 누가 생각했겠는가.
심지어 그 자리에 있던 장문인과 장로 전원이 배신하다니.
아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상황이다.
그렇기에.
희망은 있었다.
사로잡을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의미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행동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구할 수 있다.’
살아만 있다면 구할 수 있다.
살아만 있다면, 또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억지로 자신에게 희망을 심어 주며 설란은 미친 듯이 달렸다.
다행히 더 이상 추적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게.”
살짝 안도감이 드는 순간,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설란의 얼굴이 밝아졌다.
“백화단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설, 란…….”
호흡이 끊기는 목소리.
기습의 순간에 찔린 복부의 통증 때문이겠지.
성화린의 상태를 어림짐작하며 설란은 계속해서 발을 움직였다.
“공동파가 배신했습니다. 전체가 배신한 것인지 수뇌부만 배신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배신으로…….”
“아아……!”
절규와 같은 신음 소리가 성화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기습의 대부분은 단주들에게 쏠려 있었지만, 설란에게도 기습이 가해진 것처럼 부단주에게도 기습이 있었다.
그리고 설란과 달리 순수한 술사인 백화단의 부단주는 기습을 피하지 못했다.
자신의 복부가 찔렸을 때, 그 옆에서 가슴이 꿰뚫렸던 부단주의 모습을 떠올린 성화린이 설란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대, 체…….”
“백화단주님, 공동파에서 술법의 기척은 느끼지 못하셨다고 하셨는데, 맞습니까?”
“……맞아.”
“그렇다면 술법에 의한 조종은 아닐 겁니다. 협박 혹은 회유.”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공동파의 수뇌부는 적에게 넘어갔다.
문도들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문파 전체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초생단과 백화단을 적에게 팔아넘겼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니.
“맹으로 복귀하겠습니다.”
“……단원들은?”
“부상을 입은 저희로서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희망에 집착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냉정하기 그지없는 설란의 말에 입술을 깨문 성화린은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바지를 느꼈다.
어째서?
배를 찔리긴 했지만, 바지가 이렇게 젖을 일은…….
‘아아.’
설란의 팔에서 흐르는 피가, 자신을 받치며 닿은 바지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설란은 그 상황에서 자신의 상처를 지혈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자신을 업고 달리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정작 자신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면 분명 자신은 지혈해 줬을 터.
자신의 무능함에 입술을 깨문 성화린은 두 눈을 감았다.
“설란…….”
“예.”
“술법이, 야. 미혹진의 일종인 것 같아.”
“……그렇군요.”
성화린의 말에 즉시 걸음을 멈춘 설란은 주위를 둘러봤다.
확실히 풍경이 계속해서 바뀌고 있긴 했지만,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일부러 도시가 있는 방향과 반대로 향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작은 길조차 만나지 못했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파훼하는 순간, 위치가 들킬 확률이 높아. 부수지 않고 빠져나가는 길을 알려 줄게.”
“부탁드립니다.”
성화린이 정신을 차렸음에 감사하며 설란은 조심스럽게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차근차근 진법을 지나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어떻게 할지를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정리하며 움직이던 그때.
[찾았군.]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에 설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본인은 십이군의 곤박(困迫)이라고 하오.]
진법의 끝.
생문 앞에 선 괴물은 육중한 덩치를 가진 거한이었다.
한 손에는 거대한 철구를 들고, 그 철구와 연결된 사슬을 몸에 칭칭 감은 거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 외형을 보고 웃을 새도 없었다.
[우공의 말대로군. 백화단주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거라고 하더니.]
‘애초에 길을 찾을 줄 알고 생문에 병력을……!’
정신없이 도망치는 와중이라곤 해도 또다시 적의 손아귀에 놀아나다니.
설란과 성화린, 두 사람 모두가 이를 악무는 그때.
훙! 훙!
거칠게 철구를 돌리기 시작한 곤박의 기세가 두 사람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안해, 란아.”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사죄.
그 사죄에 설란이 부정하려는 그 순간.
‘이건?’
보라색 무언가가 설란의 어깨에서부터 스멀스멀 뻗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