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3화
512화-전가(錢家) (2)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혼란에 휩싸인 장원.
말단 무사인 오휼은 한숨과 함께 타 버린 벽의 잔해를 수습했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순찰 업무를 왜 선임들이 가져가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던 적은 없었을 텐데, 이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직감 뭐 그런 건가.
“에휴.”
뭐, 나는 알고 있었어도 못 뺐겠지.
한숨과 함께 미련을 털어 낸 오휼은 빗자루를 가로막는 큼지막한 돌을 끙끙대며 들어 올렸다.
무인이라고 돌을 부수고 벽을 타는 괴물들만 있는 건 아니다.
이 꼴을 만든 건 그런 괴물들이지만, 치우는 건 오휼 같은 평범한 무인들이었다.
삼류를 겨우겨우 벗어난 이류.
그야말로 이런 대문파의 말단 중 말단에 겨우 합격한, 무인과 잡부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런 난장판을 치우는 역할을 맡는 법이다.
지금도 봐라. 이 꼴을 만들고 도망쳤다는 인간은 이 가문의 소가주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인데, 그 인간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 인간을 잡기 위해 가주님이 직접 움직였다는 소문까지 들리던데…….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닌가.’
대륙을 종횡하는 원대한 무인의 꿈을 꾸며 강호로 나왔지만, 현실은 겨우 전가의 하급 무사.
이제는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한다.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무인의 자존심?
그런 건 일류 이상 되는 괴물들한테나 있는 거고.
반평생을 수련해 이류 초입에 간신히 턱걸이한 자신이 으스댈 수 있는 곳이라곤 고향밖에 없었다.
그러니, 삶의 목표를 바꿨다.
가늘고 길게.
전가의 말단 무사라고 하면 무시당하기 십상이지만, 전가는 돈으로 일어선 가문이다.
말단 무사의 봉급만 해도 웬만한 표국의 표사 안 부러운 수준이니 최대한 오래 붙어 있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됐다.
선임들이 가는 기루나 도박장 같은 곳만 멀리하면 차곡차곡 돈을 모아서 참한 여인이랑 결혼도 하고,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사치 좀 못 부리면 어떤가?
참한 여인이랑 함께 조용한 산길만 산책해도 그게 인생의 낙이자 행복 아니겠는가.
“헤헤, 헤헤.”
“또또 쓸데없는 생각이지. 이 새끼는 뭐만 하면 머리가 돌아.”
이어지는 망상에 헤실헤실 웃고 있는 오휼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동기는 빗자루를 거꾸로 쥐었다.
이런 상태가 된 오휼을 깨울 땐 때리는 게 가장 좋았으니까.
요 두툼한 빗자루로 엉덩이를 그냥……!
“끄륵!”
갑자기 숨이 막힌다.
쥐고 있던 빗자루가 스르르 손에서 떨어지고, 두 눈의 검은자위가 사라진다.
“뭐, 뭐야!”
기어코 기절한 동기가 쓰러지자,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오휼이 몸을 돌리는 순간.
“아.”
눈보다 먼저 피부가 눈치챘다.
다만, 피부로 무언가를 읽어 내는 것이 익숙지 않아 두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오휼은 자신이 느낀 것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아아…….”
공포.
말조차 제대로 내뱉을 수 없는.
심장을 움켜쥐고, 숨통을 조이는 절대적인 공포.
“사, 사, 사, 사…….”
살려 달라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부서진 잔해의 틈바구니에서 다리가 풀린 오휼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땡땡땡!
미친 듯이 울리는 경종과 함께 가문 전체가 들썩인다.
“구, 굳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필요가 있, 있습니까?”
스멀스멀 다가오는 공포 속에서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고생한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던 사내의 목소리.
선임들에게 밀려 후임끼리 서 있어서 누구인지 모르고 그냥 고개만 숙였던 가문의 높은 사람.
그 목소리에 담긴 걱정을 느끼며.
“공포는 최고의 대화 수단이죠.”
끝내 오휼의 눈동자마저 돌아갔다.
* * *
“이, 이게 대체 무슨…….”
가주를 제압한 곳에서 그대로 직진해 가문으로 돌아온 전무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손을 떨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가문의 무사들이, 나름 정예라고 자부하던 자들이 왜 적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냥 픽픽 쓰러진단 말인가?
“적이 아니라 다행이군.”
“지금 이 상황을 저분들이 만들고 있단 말입니까?”
옆에서 들린 창린의 목소리에 전무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내서 물어봤지만, 이상한 대답만 돌아오지 않았던가.
전무곤은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아서 미칠 것 같았다.
“아, 당신은 흑룡단을 본 적이 없나?”
“소문으로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무식할 정도로 과격한 젊은 강자가 단주로 있는 곳이라고.
무림맹 안에서도 몇 번이나 사고를 일으켜 기존의 단주 중 절반 정도가 이를 갈고 있다는 소문은 듣긴 했는데…….
“흑룡단주는 미친 녀석이지. 나도 단주가 되기 전의 모습밖에 보지 못했지만…….”
설천위를 떠올린 창린은 실소를 지었다.
설천위는 강함을 떠나 보통의 사람에겐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위압, 기세, 위엄.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좋을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설천위에게는 사람을 짓누르는 특유의 기세가 있었다.
그런 기세를 뿜어내는 인간은 솔직히 설천위 정도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괴물 놈들.’
전무곤은 모르겠지만, 창린은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앞서 걸어가는 네 사람이 자신들은 철저하게 영역에서 배제시킨 채 뿌려 대고 있는 기세를.
지금 전가의 무인들은 그야말로 죽음이 걸어오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있을 거다.
화경급 고수 하나의 기세만 해도 웬만한 무인들은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다.
당장 자신의 스승님이 그렇게 하는 걸 몇 번이나 봤고, 전이홍도 기세만큼은 훌륭했다.
그런데, 그런 이들조차 무시할 수 없는 고수 넷이 살기를 줄줄이 뿌려 대고, 거기에 더해 인간을 머리부터 짓누르는 기세를 풍기고 있다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런…….”
고작 기세 따위에 전가가 짓눌리고 있단 말인가.
창린의 간단한 설명에 상황을 이해한 전무곤은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잘 어울리시네요. 세 사람.”
“……어쩌다 보니 손발이 맞는 것뿐이야.”
부끄러운지 살짝 고개를 돌린 소윤혜의 모습에 유예린은 작게 웃었다.
손발이 맞기는 무슨.
기세 자체가 아예 하나로 통일됐구먼.
소윤혜가 뿌리는 죽음을 형상화한 듯한 살기(殺氣).
문율이 설천위의 것을 베낀 패기(覇氣).
주현운이 품은 천무(天武)의 위세(威勢).
이 세 가지가 영력과 완전히 뒤섞이며 만들어 낸 무언가.
그것이 지금 전가를 그야말로 기세만으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무너진 담벼락을 지나, 수없이 달려드는 무인들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버티는 절정 이상의 고수들도 무력화되어 유예린의 암경에 픽픽 쓰러지고 말았다.
“피를 덜 볼 수 있어서 좋군요.”
세 사람이 나서기 전까진 정말로 전가를 지워 버릴 생각이었는데…….
적아를 구분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의심되는 인간들은 전부 죽일 생각이었다.
잔인하고 비인도적이지만, 적을 놓쳐 후환을 남기는 것보단 나았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워질 것도 뻔했기에 씁쓸했던 것도 사실인데 세 사람 덕에 한결 일이 쉬워졌다.
“전무곤 소협.”
“부, 부르셨소?”
“확실한 자들을 지목해 주세요.”
다만, 그렇다고 해서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고름을 째면 당연히 피가 흐르는 법.
아프고 쓰라리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 * *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전가의 깊숙한 금고.
그곳에서 사내는 이를 악물고 자루에 온갖 금품을 담는 손을 거칠고 바쁘게 움직였다.
“저딴 괴물들이 대체 왜!”
가문을 그야말로 당당하게 활보하고 있는 괴물들.
평무사들을 기세만으로 쓰러트리고, 적의를 품은 고수들은 사지 중 하나를 부러트렸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공포처럼.
마치 알고 있다는 듯 가문의 음지와 연관되어 있는 무인들만 죽이고 있었다.
‘그 배신자 새끼가……!’
그들이 어떻게 가문의 무인들을 알고 있는지 알기에 전기곤은 이를 악물고 화를 삭였다.
이렇게 무너질 순 없었다.
아직 가문의 금력을 제대로 휘둘러 본 적도 없는데!
둘째라는 이유만으로 홀대당했던 시절이 이제야 끝나려고 하는 참인데……!
이를 악문 전기곤은 재빨리 금품을 챙기고 도주를 준비했다.
아버지가 잡혔다는 보고를 들었다.
진짜인지 거짓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도주한다.
도주한 뒤에 적당한 세력에 협력을 요청해서 어떻게든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쯧쯧, 이렇게 망하는군.”
“누구냐?”
여긴 가문의 금고.
그것도 직계 가족들만 아는 곳인데!
자신도 모르다가 제 형이 도주한 뒤에야 아버지에게 위치를 들은 곳이다.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선 절대 안 되는 장소란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아쉬움이 커. 전가는 제물로 쓸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야.”
돈의 힘은 양지든 음지든 강력하다.
영약은 물론 무공이나 무인, 심지어 제물까지.
거의 모든 것들을 돈으로 구할 수 있으니.
길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전가와 거래를 튼 음지의 조직들은 전가는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를 봤다.
어떤 계획이든 실패할 가능성을 품고 있는데, 돈은 그 실패의 쓰라림을 달래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음지의 조직들이 마냥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었다.
건드리지 않기로 했지만.
그거야 걸리지 않으면 그만인 이야기 아닌가?
무엇보다 전가에서 요구한 영약에는 각 세력의 정수가 들어간다.
인간에게 갑작스레 힘을 부여하는 방법의 대부분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드는 것들이기에.
“넷 중 하나 정도는 죽여 줬으면 좋겠군.”
은밀하게 전기곤에게 접근한 사내는 손가락 두 마디 두께의 쇠말뚝을 그대로 전기곤의 가슴 중앙에 꽂았다.
“이, 이게 무슨?”
고작해야 일류.
그것도 영약을 꽉꽉 눌러 담아 억지로 도달한 경지의 전기곤은 상대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누, 누구냐…….’
모습을 보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억울함이 솟구칠 정도로 어이없게 품을 내준 것에 대한 분노가 치솟기도 전에.
“그럼 잘 있어. 아, 여기 있는 것들은 우리가 잘 쓸게. 걱정 말고.”
조롱이 담긴 웃음소리와 함께 전기곤의 의식이 끊어졌다.
* * *
“잠시!”
거침없이 가문의 중앙으로 나아가던 유예린 일행은 그녀의 목소리에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소윤혜와 주현운이 고개를 갸웃하고, 창린과 전무곤이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는 그때.
“단주 대리님, 이건…….”
일행 중 가장 영적 재능이 뛰어난 문율의 딱딱한 목소리와 함께 대지가 요동쳤다.
“과연.”
그리고 본격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하자, 단순한 감에 불과했던 것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한 유예린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전가(錢家)를 상대하게 되면 전력을 과잉 투입하라더니…….”
언젠가 서로 떨어져서 움직일 때를 대비해 이야기를 나눌 때, 설천위가 했던 경고를 떠올린 유예린은 밝게 웃었다.
“이래서였군요.”
대체 어떻게 설천위가 알고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가(錢家)는…… 원래라면 안 건드리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만약 가게 된다면 제대로 준비해서 가. 그놈들은 싹수가 노래서 터트리려고 마음만 먹으면 거하게 터질 테니까.’
무림맹 소속이 아니라서 들쑤시는 게 불가능해 아쉬워하던 설천위를 떠올리며, 유예린은 즉시 움직였다.
“끄아아아악!”
단숨에 전이홍의 사지를 잘라 버리고 단전에 비수를 꽂아 넣은 유예린은 끔찍하게 울리는 비명 속에서 손뼉을 쳤다.
맑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그어어어어어어!]
[으아아아!!]
쌓이고 쌓인 원념들이 장원으로 치솟는다.
“이, 이게 무슨!”
당황한 전무곤의 외침을 무시하며, 유예린은 한숨과 함께 양손에 검을 쥐었다.
“아쉽네요.”
살생을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유예린의 한숨과 동시에, 이미 준비를 끝마친 세 사람이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뻗어 나가는 삼귀를 보며 유예린은 전혀 아쉽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전가는 지워야겠군요.”
안타깝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