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2화
511화-전가(錢家) (1)
‘이, 이럴 순 없다!’
축축하다.
식은땀인지 전신의 피부가 갈라져 흐르는 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전이홍은 온몸을 짓누르는 축축함을 느꼈다.
아니, 온몸을 짓누르는 건 달라붙는 옷이 아니라…….
‘아니! 내가! 내가 겁먹었을 리가 없다!’
공포?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털어 내며, 전이홍은 양팔을 몸에 붙였다.
여태껏 분노에 휩싸여 무식하게 주먹을 휘둘러 댔지만, 전이홍도 나름 경지에 이른 무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먹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단지 머릿속에 지식의 형태로만 있어서 바로 떠올리지 못했을 뿐.
완전히 방어로 기세를 돌린 전이홍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주 머저리는 아니었군요.”
그 모습에 가볍게 혀를 찬 유예린은 허상을 흔들었다.
근육을 웅크린 채 유예린을 주시하고 있던 전이홍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늘어난다.
숲의 나무가 만들어 내는 어둠조차 흐려진 지금, 훤히 보이는 유예린의 몸이 늘어나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
동시에.
까득!
자신이 여태까지 속아서 놀아나고 있었음을 깨달은 전이홍의 가슴속에서 다시금 분노의 불길이 크게 솟구쳤다.
“아까 말했듯이, 저는 지금 기분이 안 좋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늘어트린 유예린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둘은 곧 넷으로.
넷은 곧 여덟로.
순식간에 사방(四方)을 넘어 팔방(八方)을 점령당하게 생긴 전이홍은 이를 악물며 더욱 내공을 끌어올렸다.
어차피 방어나 회피는 욕심이다.
그냥 몸으로 받아 낸다.
그리고.
‘진짜 공격의 끝에는 반드시 본인이 있을 터!’
그 순간을 노려 죽인다!
일격.
딱 일격이다.
고작해야 인간의 육체다.
자신의 주먹이 제대로 들어가면 죽이진 못하더라도 분명 중상을 입힐 순 있다.
몸이 망가진 저년을 인질로 잡으면, 다른 것들도 떨쳐 내고 이 자리를 피할 수 있다.
딱 한 방.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성공시키면 된다.
각오를 굳힌 전이홍의 눈이 살벌할 정도로 가라앉고.
“정말, 조잡하군요.”
비웃음과 함께 전이홍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허?”
어깨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
늘어난 환영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의문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다만, 질긴 것 하나만큼은 인정해 드리죠.”
유예린의 목소리와 함께 어깨에 난 상처가 벌어졌다.
다른 곳에 난 상처와는 깊이 자체가 다른, 왼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 만큼 깊디깊은 상처.
그곳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전이홍의 이성마저 날아가 버리려는 순간.
“창린 소저.”
유예린이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그 몸짓에 전이홍의 이성이 기어코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크오오오오오! 네년이! 네깟 년이 감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분노로 가득 찬 포효.
그리고 뛰쳐나오는 그 순간.
몸이 꼬꾸라졌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지면과 얼굴이 부딪친다.
뺨에서 올라오는 묵직한 통증과 함께, 전이홍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대체?
“독…… 인가?”
전이홍과 달리 무림의 경험이 풍부한 창린이 먼저 원인을 읽어 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창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어느새 완전히 숨긴 소검의 끝을 살짝 소매 사이로 드러냈다.
“마비독입니다. 적을 제압하기 위한 용도로 많이 쓰죠. 몸이 워낙 튼튼해서 피를 대량으로 뺀 뒤에야 효과가 제대로 돌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만.”
아무리 유예린이라고 해도 화경급 고수의 이목을 전투 내내 완전히 속일 순 없었다.
결국 상황을 읽고 적응할 테니까.
그 적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독이다.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몸의 반응을 느리게 만드는 독.
적을 제압하기에도 좋고, 무엇보다 은신이라는 특성상 첫 공격을 성공시킬 확률이 매우 높은 유예린에겐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다.
정파의 무림인.
그 이름값 때문에 대부분의 전투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았지만…….
‘흑룡이 때가 타는 걸 두려워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선택한 길이 있으니, 고작 그런 것에 얽매여 독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군.”
그리고 낭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긴 창린은 빠르게 수긍했다.
애초에 정파라고 독을 안 쓰는 것도 아니고, 마비독 정도면 정말 양반이었다.
낭인들은 너무 과하게 써서 상대를 죽이거나 하지만, 뭐 무슨 상관인가.
목을 베어 죽이나, 제압하려다 실수로 독을 많이 써서 중독으로 죽이나.
비슷비슷하지.
“일단 구해 줘서 고맙다.”
“저야말로 고맙죠. 낭괴께서 주신 제보 덕택에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스승님은?”
“다른 곳을 조사 중이신 것 같더군요. 창린 소저를 많이 믿으시나 봐요.”
믿기는 개뿔.
한숨을 내쉰 창린은 빙긋 웃고 있는 유예린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 이게 무슨…….”
전이홍을 따라 쫓아 온 병력을 쓸어버리고 있는 이들의 무위에 놀라서 떨고 있는 전무곤이 보였다.
“전가의 소가주 전무곤. 맞으신가요?”
“마, 맞소.”
“잘됐군요. 당신은 아직 적아가 판단되지 않았다고 해서 직접 고ㅁ…… 아니, 심문할 생각이었거든요.”
‘지금 고문이라고 말하려 하지 않았나?’
유예린에게서 반걸음 물러선 창린은 헛기침을 하고 유예린을 바라봤다.
“일단 시내로 가지. 그곳에서 한 번 정비한 이후에 다시 전가를 압박…….”
“아뇨. 후퇴하지 않습니다.”
창린의 말을 끊고 고개를 저은 유예린은 성큼성큼 전무곤에게 다가가 억지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뒷덜미를 잡아 그대로 들어 올린 유예린은 억지로 선 전무곤의 등을 밀었다.
“이대로 전가로 갑니다. 그리고 오늘 밤 전가를 지웁니다.”
‘……그거 진심이었던 거야?’
전이홍을 도발하려고 했던 말이 아니고?
유예린의 섬뜩한 선언에 창린이 재빨리 전무곤과 유예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이대로 전가를 공격하면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라고요?”
“그…….”
말을 잇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창린.
그녀를 바라보던 유예린은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물러서면 더 죽습니다. 사람을 도구로 쓰는 자들과 거래를 튼 상인이에요. 살려 두는 매 순간이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래도 지금 전가는 전력이 거의 그대로야.”
전가(錢家).
그들이 강한 이유는 간단했다.
화경에 오른 금검(金劍) 전이홍?
분명 그의 역할이 큰 건 사실이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신흥삼가라고 불리진 못한다.
권왕이 가주로 있는 서하영의 집안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무인의 명성만으로 따지면 권왕이 금검보다 압도적으로 위다.
그러니 중요한 건 가세(家勢)다.
신흥삼가는 각자 이유가 있어서 신흥삼가라고 불린다.
설가는 북존이라는, 말도 안 되는 괴물 밑에 모인 소수 정예의 병력.
유가는 암은단이라는 무림맹의 정보 조직을 장악한 가주와 그에 버금가는 가문의 독자적인 정보력과 암행이 특화된 무력대.
그리고 전가(錢家)는 돈[錢]을 이용한 어마어마한 규모.
당장 이 상황만 해도 그렇다.
지금 유예린과 창린 등이 있는 이곳은 무려 전가의 장원이다.
산 몇 개를 통째로 사서 관리하고 있는 전가의 뜰.
그 안에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그곳에서 시내까지 이어지는 길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의 금력.
돈의 힘은 단순히 땅의 크기만이 아니라 고수까지 불러 모은다.
대부분이 돈에 궁한 혹은 사치를 누리고 싶은 반푼이들이지만, 그런 자들이라고 해도 모이면 상당한 전력이 된다.
심지어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까지 심심치 않게 묵고 있는 곳이 전가의 본가다.
그런 곳에 고작 이 인원으로?
전무곤을 제외하면 고작 다섯인데?
설령 제압을 포기하고 학살을 벌이더라도, 고작 다섯으로 이만한 규모의 가문을 지운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애초에 실현이 불가능한…….
“단주 대리님, 정리했습니다.”
순간, 자신의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흠칫 놀란 창린은 자신도 모르게 도를 쥐었다.
‘언제?’
흑룡단은 단체로 은신술이라도 익힌단 말인가?
“문율, 오는 사이에 알려 준 은신술을 그새 익혔군요.”
“과찬입니다. 아직 부족해요.”
“그 부족한 걸 채우면, 저와 같은 경지이니 당연히 부족해야죠.”
……뭘 익혀?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정신이 아득해진 창린의 시선이 허공을 맴도는 순간.
“됐습니다. 창린 소저. 당신에게 동의를 구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으니까요.”
“동의가 아니라! 너무 위험한 선택이야!”
다급하게 외치는 창린에게 손을 뻗은 유예린은 가볍게 손을 저어 그녀를 말렸다.
“흑룡의 짝이 삼귀와 함께 왔습니다.”
……그건 또 뭔?
순간 웬 헛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던 창린의 안색이 빠르게 변했다.
삼귀(三鬼).
무림맹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흑룡단의 별동대.
전원이 화경급 이상의 고수이면서…….
‘영력까지 다룬다고 하는 재능의 괴물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을 만나 본 적 있는 창린은 그제야 깨달았다.
“너, 너 문율이라고?”
“아, 창린 소저. 오랜만이네요.”
강아지처럼 해맑게 웃는 문율의 모습에 창린은 그만 헛숨을 삼켰다.
아니, 정보로 접하긴 했었고 혹시나 하긴 했지만.
‘진짜로 화경에 올랐다고?’
흑룡학관과 친선전에 아득바득 싸웠던 그 애송이가?
그리고 여기에 왔다고? 다른 두 사람까지 데리고?
손을 흔드는 문율의 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한 창린은 눈을 감았다.
“……따라가지.”
“자신의 몸은 스스로 챙겨 주세요.”
어느새 쓰러진 전이홍을 어깨에 걸친 주현운마저 합류하고, 전무곤을 문율에게 맡긴 유예린은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며 창린은 문율의 손에 들린 전무곤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저 머저리는 알까.
지금 진짜로 자신이 나고 자란 가문이 사라질 위기라는 것을.
무인 다섯이 전가를 습격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오만이지만.
화경급 고수 넷이 습격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폭력이다.
일당백. 막아서기 위해서는 몇 명의 초절정 고수가 필요하다는 화경급 고수가 넷이나 가문을 습격하면…….
‘……오대세가도 힘들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폭력이 전가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 * *
“……이건 또 무슨 개판이래.”
당가의 일은 당화인에게 맡기고, 당화유를 데리고 맹으로 복귀한 설천위는 어수선함을 넘어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맹의 상황에 그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곳곳에서 올라오는 보고.
대형 문파의 멸문 소식은 물론이고, 곳곳에서 일어나는 실종과 살인.
심지어 몇몇 살인은 학살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대문파를 돕는다고 단주들이 직접 움직인 곳을 뺀 나머지는 정말 발에 땀이 나도록 움직여 그런 사건들을 해결해 가고 있었다.
“……뒤집어엎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이래서야 난리를 쳐 봤자 아무도 관심을 안 가져 줄 것 같은데.
만독단주를 건드리는 일은 무조건 큰 관심을 받은 상태에서, 그리고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해야 했다.
그래야 여론도 움직이고, 정치적 움직임도 취할 수 있으니까.
다만, 지금의 상황은…….
“우리 애들은?”
“임무를 받아서 각지에 파견 중이에요! 단주 대리를 맡은 마님이 삼귀를 데리고 전가 쪽으로 향했습니다!”
“흠.”
전가라…….
거기 가주가 은근 빡센데.
내공을 덕지덕지 칠해 놔서 이건 뭐 정말 잡으라고 만든 보스인가 의심스러웠지.
나중에 여러 가지 아이템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그냥 허수아비 취급을 했지만.
화경에 오른 세 사람도 따라갔고, 후속 지원부대도 조금 보냈다고 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나.
“……이런 생각을 하면 꼭 무슨 일이 생기던데.”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유 매에 한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과한 걱정을 털어 낸 설천위는 자신에게 보고한 청아를 뒤에 세우고, 거침없이 복도를 나아갔다.
그리고.
“오랜만입니다.”
거침없이 문을 연 설천위는 안쪽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깊은 눈동자를 직시하며 씨익 웃었다.
“패력단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