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9화
508화-준동 (2)
“일단 공동파를 구합시다.”
“해남과 곤륜은 이대로 방치하자는 말이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냥 곤륜과 해남을 버리자는 말과 같았지만, 딱히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무림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문파가 아니라서 이 자리에 곤륜과 해남을 대표해 앉아 있는 이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거리를 생각하면 지금 곤륜과 해남으로 병력을 찢는 건 너무 과한 욕심입니다.”
총군사의 의견에 단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과 해남.
말이 구파일방의 일원이고 전통 있는 강호의 문파라고 하지만, 둘 다 무림의 끝자락에 있다.
특히, 해남의 경우는 섬이라는 특징 때문에 정파라는 입장을 지키고 있지만 해남에 도착하기 위해선 사파의 영역을 넘어야 한다.
아무리 평화가 길었다곤 해도 해남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병력이 사파의 영역을 지나가면 아무래도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실질적으로 해남을 돕기란 쉽지 않은 상황.
거기다 곤륜파로 가는 길에는 공동파가 있으니 여러모로 공동파에 병력을 집중하는 게 옳았다.
심지어 그들은 아직도 살아서 지원 요청까지 보내지 않았는가.
물론, 언제까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늦게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진군해서 전투가 끝난 직후의 적들이라도 공격해야 한다.
그래야 약해진 적들을 쓸어버리고, 공동파 도사들의 명복이라도 빌어 줄 수 있을 터.
“바로 움직이는 게 좋겠소. 일단 사혈천이 적으로 지목됐으니 백화단주.”
“예.”
“부탁하오.”
“물론입니다.”
성화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맹주는 시선을 돌려 단주들을 훑어보다가 초생단주에게 시선을 멈췄다.
“초생단주, 최근 술사와의 합동훈련을 자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예. 저번 만귀단 사건 이후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럼, 이번 일을 부탁해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맹주의 지시가 아닌 부탁.
딱히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기에 초생단주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두 개 단의 출동이 정해지고, 맹주는 다른 단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오.”
혈교도, 사혈천도, 혈사련도.
그들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인 이상, 사실을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며칠만 지나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퍼져 나갈 테니까.
“공표하고, 각 문파에 본격적인 지원을 요청하겠소.”
* * *
“일이 참 어렵게 됐네.”
흑룡단 집무실.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인 단주들 사이에서 남궁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혈교나 혈사련은 그렇다고 쳐도 사혈천은 대체 무슨 깡인지…….”
곤륜과 해남은 멀다.
하지만 공동은 그렇지 않다.
꽤 거리가 있지만,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시간도 줄이려고 하면 꽤 많이 줄일 수 있다.
괜히 공동파가 문을 걸어 잠그기 전에 필사적으로 지원 요청을 보낸 게 아니다.
그리고.
“함정일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유예린의 한마디에 다른 단주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혈천이 과연 여력이 없어서 공동파의 지원 요청을 막지 못했을까?
결국 사람이 빠져나가서 무림맹에 지원을 요청한 건데.
마음먹고 틀어막으려고 했다면 영적인 능력이 없는 일개 무인은 그들의 술수에 당해서 사경을 헤매다가 죽었을 거다.
그럼에도 사혈천은 지원 요청을 하도록 허락했다.
아니.
“허락한 건지 허락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모를 일이지.”
“시선을 끌기 위한 함정일 수도 있다는 얘기군.”
백화단주 성화린의 말에 초생단주 구목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다른 곳에서 일을 계획하고 있다면…… 공동파에는 그리 많은 인원을 보내지 못했을 수도 있겠네.”
남궁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성화린은 걱정이 담긴 눈으로 유예린을 바라봤다.
“우리가 떠나고, 새롭게 습격당한 곳이 나타나면…….”
“우리가 움직여야겠죠.”
대(對)괴이전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무림맹의 무력단은 두 곳.
그중 하나인 만귀단을 흑룡단이 흡수했으니, 다른 곳에서 사혈천이 날뛰면 이번엔 흑룡단이 움직여야 한다.
술사로서 부단주의 자리를 맡고 있는 연화나, 술사로서의 역량의 끝을 알 수 없는 단주 없이.
화경급 고수인 유예린과 삼귀가 있다고는 하지만, 괴이와의 전투는 무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을 알기에 성화린은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유예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미소 지어 그녀를 안심시켰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성 단주님은 안전하게 돌아오시는 것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신감 넘치는 그 대답에 성화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걱정만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우려일 뿐인 일이니까.
공동파가 이렇게 문을 걸어 잠글 정도면 공동파를 공격한 적들도 상당히 강하다는 뜻이다.
그렇게까지 전력을 나누는 것이 사혈천이라고 쉬울 리가 없다.
과한 걱정.
자신의 우려를 그렇게 정리한 성화린은 이내 구목과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했다.
병력은 어떻게 편성하고, 출정은 언제 할지.
한 번에 움직일지 아니면 나눠서 움직일지.
여러 가지를 두 사람이 논의하고, 그 사이에 낀 남궁선과 유예린이 외부인의 시선으로 조언을 했다.
그렇게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성화린과 구목은 바로 다음 날 병력을 이끌고 맹을 나섰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출발한 거다.
무림맹의 정문, 떠나는 백화단과 초생단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예린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아미타불, 저희도 미리 준비해 놓는 게 낫겠습니까?”
“네, 미리 준비해 주세요. 어차피 이번 사태를 공표하면서 전시체제에 들어갈 테니 미리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미리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지시를 내린 유예린이 실제로 병력을 이끌고 맹을 나선 건 고작 사흘 뒤의 일이었다.
* * *
신흥삼가.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 현경의 고수가 있는 설가, 혹은 무림맹에서 암은단을 맡은 유가…… 가 아닌 전가(錢家)였다.
두 가문보다 전가가 더 많이 언급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무가(武家)이기 이전에 상업을 업으로 삼는 상인(商人)이기 때문이다.
운남의 차 무역으로 시작해 세를 불린 전가는 애초에 상인 가문이었다.
무력은 돈으로 부리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던 가문의 조상 중 하나가 사파의 영역에서 장사를 하다가 큰 봉변을 당했다.
돈으로 병력을 모아 보복하려 했지만, 그 당시 그 가문의 악명이 너무 높아서 돈으로도 낭인을 구할 수가 없었다.
결국, 쓰디쓴 패배의 설욕을 삼키며 그 상인은 억울함을 가슴에 묻…… 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돈으로 무인을 살 수 없다면, 무공을 사리라.
돈으로 강자를 살 수 없다면, 강자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사리라.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조잡한 무공을 익힌 가문의 후예들을 학관에 보내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전가는 힘을 길렀다.
그러길 수십 년.
세월이 흐르고, 끝이 보이지 않던 구덩이 속으로 마구 쏟아붓던 돈이 결국 구덩이에서 흘러넘치는 순간.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금검(金劍) 전이홍.
신흥삼가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주역이자, 자기 조부의 원수를 갚아서 그 가문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화경의 고수.
다만, 워낙 외부에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고 진짜 강자와 싸운 전적이 없기에 그의 무력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박했다.
심지어, 그가 화경의 고수라는 사실까지 의심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막대한 재력으로 수많은 무인들을 부리는 가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자체적인 무인의 수급으로 무림 전체로 수송업의 영역을 확장시킨 그들은 무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큰 부호였다.
막대한 부(富)와 그걸 지킬 수 있는 무력(武力).
그 두 가지를 손에 쥔 운남전가는 그 명성이 무림 전역으로 널리 퍼졌다.
무림인들에겐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일반 백성에게는 친숙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한 가문.
그런 가문에서 지금 연기가 피어오르고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내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대체, 대체 어떻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니, 상황을 온전히 인식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인지하고 있는 것이 제대로 된 정보인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가?
그런 일이 현실에 일어나도 되는 일인가?
아니.
까득!
‘그런 더러운 짓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자랑스러워한 가문이.
자신의 삶을 통째로 바칠 각오를 했던 가문이.
‘고작, 고작! 정신 나간 광신자들의 돈주머니였다니……!’
너무 거칠어진 숨에 감정을 토해 낼 괴성조차 지르지 못했으나, 사내는 속으로 울분을 토했다.
인자했던 아버지.
항상 여유가 넘치고, 넉넉한 인심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던 훌륭한 가주.
그리 생각했다.
‘어머니……! 어머니……!’
어느 날 겁에 질렸던 어머니가 자신에게 무언가 말하려다가 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했을 때.
슬퍼하던 아버지의 눈물은 거짓이었다.
거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짓을 하면서 자신의 아내의 죽음에 슬퍼할 리가 없으니까!
가문에서 보았던 것을 떠올린 사내는 솟구치는 구역질을 참으며 빠르게 내달렸다.
지금 당장에라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내고 싶었다.
자신이 먹고 마신 그것들이.
자신이 눕고 잠들었던 그 땅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것들을 깔고 올라섰는지.
알아 버린 지금, 메스꺼워지는 속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렸다.
달리고 달려야 했다.
잡히는 순간, 죽는다.
그것을 알기에 전무곤은 미친 듯이 달렸다.
잡힐 수 없다.
잡혀선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라!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거다!”
순간, 뒤쪽에서 들려온 외침에 오한이 올라왔다.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내공이 흩어진 탓에 육체의 힘만으로 도망치는 건 역부족이었나……!
이를 악문 전무곤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달렸다.
육체의 힘만으로 안 된다고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해?
그럴 순 없었다.
살아서, 살아서 나가야 했다.
왜?
바로잡아야 했으니까.
이 더럽고 추악한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될 테니까.
무엇보다.
‘연려!’
표적이 됐을 그녀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비정한 법.
이를 악물고 달리던 전무곤은 제대로 들지 못한 다리가 나무뿌리에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달리던 속도 그대로 땅을 굴렀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구르자 전신에서 아찔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전무곤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일으켜서.
도망을……!
“발자국이다! 이 근처에 있다!”
이젠 발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리는 적의 추적에 전무곤은 결국 두 눈을 감았다.
뒤를 돌아보지 마.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휘청거리는 걸음을 내딛는 그 순간.
“읍!?”
자신의 입을 감싼 손길에 눈을 부릅뜨는 순간, 몸이 위로 빨려 올라갔다.
단숨에 사라진 전무곤.
“발자국이 끊겼다! 주위를 훑어라!”
추적자들의 외침과 함께 그들은 주변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살폈다.
“쯧! 나무를 타고 도망쳤나! 찾아라!”
텅 빈 나뭇가지 위를 보고 혀를 찬 추적자들은 이젠 사라진 흔적을 찾기 위해 면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으, 후으.’
나무의 꼭대기, 예전부터 준비한 듯 나뭇잎으로 위장되어 있는 나무의 정상에서 전무곤은 호흡을 필사적으로 가다듬었다.
[전무곤, 맞나?]
귓가에 들린 전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전무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에게 잡히는 것보다 누군지 모를 외부인이 낫다.
이자마저 적들의 편이라면, 이미 끝난 목숨이니 구차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각오를 다진 전무곤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가고.
[다행이군. 그 미친 가문에 정상인이 하나쯤 있어서.]
전무곤의 뒤에서 창린이 입꼬리를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