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508화 (508/624)

제508화

507화-준동 (1)

“당가는 임시 폐문, 맞아요?”

“응.”

성도의 한 객잔.

그 2층을 통째로 차지한 설천위와 일행 사이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건 상당히 의외인데요.”

“오라버니가 결정했어. 당가는 지금 외부로 힘을 돌릴 때가 아니야.”

“가주님은 무림맹에 계시잖아요?”

“내가 가서 보고할 거야. 애초에 가문의 일을 오라버니에게 일임한 것도 아버지이시니 할 말도 없으시겠지.”

그 명예욕 강한 양반이 그냥 순순히 넘어갈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일단 맹으로 돌아가지.”

“서하영 부단주님은요? 같이 나가셨잖아요.”

“걔들은 일 좀 더 보다가 돌아올 거야.”

경지도 올랐으니, 둘이서 싸돌아다닌다고 문제 될 것 없겠지.

부하들 챙겨 줄 영약도 좀 챙겨야 하니까.

둘이 데이트도 하고 좋지 뭐.

기억을 더듬어 몇 군데 지도에 대충 표시해 줬으니 찾으려면 시간 좀 걸릴 거다.

“지금 중요한 건 맹을 뒤집어엎는 거야.”

“……굳이 그래야 하나요?”

“상황에 따라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그럼 최대한 평화롭게 가는 것이…….”

“상황에 따라서 말이야.”

조심스러운 각려의 목소리에 혀를 쯧쯧 찬 설천위는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며 웃었다.

“일단 만독단이 우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알겠네.”

만독단주의 성격으로 보아 술사로 이름을 날리는 연화를 가문에 붙들어 두고, 겸사겸사 이런저런 시비도 털어서 문제를 일으킬 생각이었겠지.

죽일 생각이 있었는가…… 까지는 잘 모르겠군.

만독단주가 아무리 가문의 일에 소홀했다고 하지만 원로원주가 혈교와 손을 잡고 독을 제조하는 작업이 하루 이틀 만에 가능했을 리가 없다.

분명 그 정보를 알아챈 이들이 있었을 거고, 그 보고는 당연히 만독단주에게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보를 못 얻었다면 가주로서 무능력한 거고, 그 정보를 알고도 묵인했다면…….

“털어야지.”

섬뜩하게 빛나는 설천위의 눈동자에 각려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설천위가 털자고 말하는 사람은 만독단주였다.

즉, 당가의 현 가주이자 옆에서 동파육을 먹고 있는 당화유의 아버지다.

당화유가 있으니 단어를 순화하긴 했지만, 결국 하고자 하는 것은 내부 감찰과 응징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들쑤시겠다는 말을 면전에서 들었으니 아무리 당화유라고 해도…….

“응.”

……멀쩡하네.

우물우물 고기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인 당화유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 괜찮으신가요? 아버지이신데…….”

그런 당화유의 반응에 오히려 각려가 걱정했지만, 당화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잘못은 잘못.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져야지.”

아하, 단호하시군요.

당화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각려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너무 단호해서 조금 무서웠다.

“뭐, 그럼 일단 당가는 이렇게 일단락됐고. 문제는 다른 곳인데…….”

“다른 곳이요?”

“그래.”

다른 곳.

만독단주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으니 조력 정도는 할 거라고 생각했고, 또 당가가 움직일 거란 생각도 했다.

애초에 이번 임무 자체가 함정이었으니까.

당가를 압박할 정보만 얻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도 여기에 혈교가 등장했다.

애초에 연화와 각려, 두 사람의 술사만 보내고 요려를 은밀하게 붙인 이유가 뭐겠는가.

여차하면 설천위가 직접 개입해서 현장 증거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혈교의 등장으로 넘치는 현장 증거를 잡았지만, 그것이 예상했던 일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이유는 당가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파일방, 오대세가.

그 가문들은 스스로 부패할지언정 혈교나 사혈천 같은 무리와 손을 잡았다가 그 사실이 드러난 순간 제 살을 깎다 못해 목이 베일 수 있는 위험천만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거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무림맹을 어떻게든 끌고 가려고 했던 것이다.

무림맹의 뿌리가 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적어도 최소한의 선을 지키는 아군일 거라는 계산 때문에.

거기다 전국적으로 시작되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선 무림맹의 힘이 필요하기도 했고.

그런데 무림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당가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

하물며, 당가불의(唐家不疑)를 외치는 자들이 그런 짓을 벌였으니.

“다른 곳이라고 방심할 수 없어.”

구파일방, 오대세가.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만약, 혈교에 넘어간 녀석들이 문파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무림맹을 정리하는 것으론 부족할지도 몰라.”

* * *

“이건…….”

무림맹, 흑룡단의 집무실.

단주 대리로 업무를 보고 있던 유예린은 지금 막 올라온 보고서의 내용을 보고 놀라 얼굴을 굳혔다.

“아미타불…….”

유예린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다가온 무해는 보고서의 내용을 살피자마자 두 눈을 감고 불호를 외웠다.

슬픔이 섞인 무해의 중얼거림과 함께 유예린은 보고서를 내려놨다.

[곤륜파 멸문]

간단하기 그지없는 제목.

그 밑에 상세한 정보들이 몇 가지 적혀 있었지만, 골자는 간단했다.

곤륜파에 주화입마에 빠진 장로들이 나왔고, 그들의 손에 곤륜이 무너졌다.

또한, 겨우 탈출한 무인의 보고에 따르면 외부에서 들어온 조력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곤륜파가 멸문했다는 것.

무림의 서쪽.

그 끝에 자리 잡은 곤륜파는 옛날 마교가 있었을 당시에는 마교의 발호를 막는 교두보 역할을 해 왔던 곳이다.

사명감과 희생으로 무림의 서쪽을 지키던 거악(巨嶽).

그런 곤륜파가 고작 며칠 사이에 멸문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으니…….

“이미 끝났겠군요.”

씁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선 유예린은 외투를 걸쳤다.

설천위가 입는 장포가 아닌, 그녀의 장포.

단주 대리를 맡을 때 입기 위해 만든 옷이다.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수놓은 난초.

그리고 등에 수놓은 흑(黑)이라는 글자.

흑룡단을 상징하는 그 옷을 입고 유예린은 무해를 대동한 채 정근각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정근각.

안내를 받아 도착한 회의실은 아직 텅 비어 있었다.

‘이런 순간에도 자존심 싸움인가요.’

하나둘 들어오는 단주들.

창천단주, 초생단주, 백화단주가 들어오고,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른 단주들이 들어왔다.

늦게 오는 것이 자신의 권위를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머저리들.

‘역시, 전부 쓸어버리는 게 편할 텐데.’

설천위가 무슨 생각으로 무림맹에 남아서 이들을 품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이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권위 의식에 매몰되어 자신의 손에 쥔 것들만 생각하는 머저리들.

그러면서도 더 많은 것을 손에 쥐려고 발악하는 벌레들.

백유라는, 시대를 만들어 가는 괴물이 사파를 장악하고 세를 불리고 있는데도 그 위험성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무뇌아들.

이런 사람들이랑 일을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아니.

사실 답답하진 않았다.

만약 혼자 일을 했다면, 암은단에서 일을 했다면 답답함 따위는 느끼지 않았을 거다.

가슴을 짓누르는 갑갑함의 원인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의 원인은 이들이 설천위의 발목을 잡을 거라는 우려 때문이다.

저 무능한 걸 넘어 썩어 버린 인간들이 사랑하는 천위의 발목을 잡는다면.

그때 나는 과연 냉정할 수 있을까?

‘……후우.’

차마 그렇다고 말할 수 없기에 속으로 한숨과 함께 생각을 털어 낸 유예린은 회의실로 들어오는 맹주를 바라봤다.

권위 의식.

다른 단주들이 헛짓거리를 하는 걸 지적하고 나무라도 모자랄 판국에 맹주까지 저러고 있으니…….

마지막에 들어와 자리에 앉는 맹주를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던 유예린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옆구리를 툭툭 찌르던 남궁선 때문이다.

‘왜요?’

‘천위는?’

‘외부 임무 중입니다.’

‘아직도 안 돌아왔어?’

무슨 단주가 나갔다 하면 몇 개월씩 자리를 비우냐.

단주는 만일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최대한 맹에 머무르는 게 보통인데.

자유분방한 설천위의 행보에 히죽 웃은 남궁선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단주님들을 이렇게 모은 이유는 조금 전에 보고가 갔던 곤륜파의 멸문 때문입니다.”

“나도 대충 보고 왔소. 보고서에 담긴 것만으로는 부족한 게 있던데.”

총군사의 말에 대답한 건 황보중이었다.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는 그 모습은 곤륜파의 멸문에 분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황보중의 모습에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총군사는 부하를 시켜 새로운 종이를 단주들의 앞에 깔았다.

“새롭게 얻은 정보입니다. 단순한 멸문이 아니라…….”

“혈교의 개입? 이게 정말인가?”

“예. 혈교가 개입한 흔적이 확인됐습니다.”

혈교.

최근 들어 부쩍 자주 언급되는 그 단어에 단주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증거는…… 진술인가?”

보고서의 내용을 훑던 만독단주의 목소리에 총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탈출한 곤륜파 무인이 첫 진술 후 기절했는데, 바로 한 시진 전에 깨어나서 추가 진술을 했습니다.”

“습격한 외부의 적 사이에 혈귀로 보이는 것들이 끼어 있었다…….”

단주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곤륜파다.

도가이기에 상당히 조용한 문파이지만, 그 뿌리는 마교의 발호를 수세대 동안 막아 왔던 무문(武門)이다.

그들의 검은 자비가 없고, 살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곤륜파를 혈교가 멸문시켰다.

‘……위험하군.’

그들의 힘이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증거다.

지속된 평화에 아무리 느슨해졌다고 해도 곤륜은 곤륜이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모은 이유는 혈교의 발호를 공식으로 인정하기 위해서인가?”

초생단주의 물음에 총군사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정하고 공표할지 아니면 비밀을 유지한 채 움직일지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어디까지나 모두와 의견을 모아서 움직일 거다.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총군사의 말에 몇몇 이들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몇몇 이들은 작게 미간을 찡그렸다.

존중?

좋다.

자신들의 권위를 존중해 준다는데 어느 누가 싫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권위보다 실리를 따져야 할 때가 아닌가.

하루, 아니 몇 시진이라도 빨리 움직여서 전 무림으로 손을 뻗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할 때가 아닌가.

이대로 혈교가 발호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이들이 누구인가?

곤륜파 주위의 중소 문파다.

곤륜파를 불태운 그들은 주변에 별다른 대문파가 없는 그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할 테니까.

그러니 즉시 공표하고 병력을 모아 혈교를 압박해야 했다.

당장 전면전을 치르진 않더라도 병력을 모아 압박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을 터.

피해를 볼 이들의 숫자를 크게 줄일 수 있는 방법인데, 그걸 즉시 실행하지 않고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건…….

유예린의 날카로운 눈이 총군사를 향하자, 그녀와 눈이 마주친 총군사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

그 반응에 유예린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총군사, 부탁했던 의뢰의 결과가 나왔소.”

침묵하던 암은단주의 발언과 함께 총군사의 눈빛이 죽었다.

“해남이 멸문했소. 혈사련이라 자칭하는 자들이 해남을 차지했다고 하오.”

구파일방에 속하진 않지만, 긴 역사를 자랑하는 바다의 검문.

그들이 멸문했다.

“공동파에서 지원 요청이 왔소이다. 적은 괴이들. 사혈천의 무리로 추정되고 공동파의 도사들이 술법으로 문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수성에 들어갔다고 하오.”

세상이 빠른 속도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