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7화
506화-사천당가 (7)
“개판이군.”
전이문을 넘어 나타난 설천위의 한마디에 혈귀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네놈은 누구냐?]
누구냐.
그 물음에 설천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상황에서.
전이문을 열고 나올 사람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정보를 통제당한 거야, 아님 멍청한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설천위는 손을 움직였다.
흑관이 아무리 높은 물리 간섭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근본은 술법.
독에 당해 날뛰는 무인들 중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 흑관을 부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급하게 만든 거라곤 하지만, 역시 당가.
“실력 좋네.”
다시 날뛰는 원로들이나 당주들을 다시 흑관으로 묶어 내며 설천위는 주위를 훑었다.
‘주독. 그것도 상당히 이질적인 놈.’
냄새는 없다.
둘 중 하나다.
독 제조 과정에서 냄새를 지웠든가, 아니면 술법으로 가렸든가.
혹은 둘 다 섞었든가.
뭐가 됐든 상당히 위험한 독임이 틀림없었다.
독(毒)의 명가(名家)라는 사천당문의 무인들도 제정신을 못 차리고 암기를 뿌려 대고 있으니, 절대 약한 독일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독은 전장에서 가장 위험했다.
자고로 전장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칼을 든 적이 아니라 비수를 숨긴 아군이니까.
독에 의한 것일지라도 아군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만으로 완전히 전열이 흐트러진다.
특히, 인간이 아닌 놈들을 상대로 싸우는 상황에서 이런 독은 그야말로 치명적이다.
상대방은 자신들에겐 안 통할 테니 마음껏 뿌리지 않겠는가.
“전부 지워야겠네.”
그렇기에 결심은 빨랐다.
목표를 정한 설천위는 연화에게 눈짓했다.
옆에서 기다리다가 눈짓에 고개를 끄덕인 연화는 즉시 움직여 혈귀에게 돌진했다.
자신은 이대로 혈귀를 죽인다.
그리고 설천위는 사방에 퍼진 주독(呪毒)을 해주(解呪)한다.
그 뒤에 실질적인 독의 처리는 당가에게 맡긴다.
사건의 해결 과정을 간단히 정리한 설천위는 곧바로 움직였다.
“당 소저.”
“응.”
빠르게 다가온 당화유가 망설임 없이 옷을 걷어 올렸다.
그 과감한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새하얀 배와 그 배에 박힌 끔찍한 상처.
그런 당화유의 맨살을 바라보는 설천위의 눈동자는 놀라울 정도로 덤덤했다.
“흠.”
거침없이 당화유의 상처에 손을 올린 설천위는 손을 타고 올라오는 독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조잡한데?”
생각보다 더 조잡했다.
독으로서의 완성도까진 잘 모르겠지만, 술법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지자면 아주 조잡한 수준이다.
억지로 얼기설기 기워 놓은 꼴을 겨우 면할 정도의 수준.
균형은 위태로울 정도로 조잡하게 맞춰져 있었고, 힘의 발산은 들쑥날쑥했다.
이러면 유지력과 안정성에서는 상당히 처참한 수준의 완성도를 보일 터.
혈교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조악했다.
‘……나중에 생각하자.’
깊은 속사정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일단 지금 중요한 건 이 독을 서둘러 지워 내는 거다.
당화유의 상처에서 주독의 성질을 읽어 낸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주독을 빨아들였다.
“너…….”
순식간에 사라지는 독기에 당화유가 드물게 두 눈을 크게 떴다.
단순히 주력뿐만 아니라 독기까지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리 술법과 섞기 위해 틈을 만들어 놓은 독이라고 해도 살상을 위해 만든 당가의 독이다.
그렇게 빨아들이면 당가의 무인은 몰라도 보통 사람에겐 치명적…….
“……멀쩡하네.”
“뭐, 전에도 그랬잖아요?”
그랬지. 얘는 학관 시절부터 독에 강했었지.
그러고 보면 그것 때문에 관심을 가졌었고.
무림학관을 졸업하고 고작 몇 년.
사는 게 바빠서 그런 것도 잊고 있었나.
한순간에 가벼워진 몸에 놀라면서도 빠르게 냉정을 되찾은 당화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라버니마저 독에 당해서 흑관에 묶여 있는 상황.
원로나 당주들이 흑관을 끊임없이 부수고 있지만, 그에 맞춰 흑관은 끊임없이 생성되어 그들을 묶고 있었다.
가문에 퍼진 피 냄새가 옅어진다.
고작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이렇게까지 전세가 뒤바뀌다니.
흘러나오려는 헛웃음을 삼키고 당화유는 조용히 암기를 꺼냈다.
일단 계속해서 흑관을 부수는 인간들을 제압한다.
그것만으로도 설천위의 부담이 꽤 가벼워지겠지.
그렇게 생각한 당화유가 움직이려는 순간.
“잠깐.”
그런 당화유를 팔로 막은 설천위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화르르륵!
사방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치솟는 백색의 불꽃.
피를 머금은 것처럼 옅은 선홍빛을 띤 그 불꽃은 당가의 정원을 무섭게 불태우기 시작했다.
“좋아.”
그 불꽃이 주력을 태우는 것을 확인한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했다.
소령연화를 이용한 불꽃.
그 원리는 비슷하지만, 강기가 아니라 술법의 형태로 만들어 낸 불꽃이다.
자성영역을 펼친답시고 불꽃으로 만든 하늘을 몇 번 만들어 냈더니, 불꽃을 만드는 게 꽤 자연스러워졌다.
술법은 날로 일취월장하니 이것저것 시도할 맛이 나네.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타오르는 공간 속에서 당화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있었다면 지금 기회에 좀 패세요.”
* * *
[이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화에게 거의 제압돼 설천위가 직접 마무리한 혈귀는 설천위에게 빨려 들어가면서도 끝까지 발악했다.
그 비통한 외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설천위는 정적이 내려앉은 당가의 정원을 둘러봤다.
해주와 함께 거의 모든 당가의 무인들이 정신을 잃었다.
독에 대한 내성은 있어도 술법에 대한 내성은 없을 테니, 정신을 파고들었던 술법이 해제될 때의 반동을 견디지 못한 거다.
본디 술법이란 것은 정신에 큰 영향을 받는다.
영적인 역량이 부족해도 그 여파를 견디는 것 정도는 정신력의 여하에 따라 충분히 가능하다는 소리다.
지금 눈앞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서 있는 당화인처럼 말이다.
“당가의 소가주가 흑룡단주님을 뵙습니다.”
몸이 떨리고 목소리도 작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아주 강렬할 정도여서 설천위는 빙긋 웃었다.
“그리 과하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를 돕기 위해 무림맹이란 이름으로 뭉친 것 아닙니까?”
당화인의 포권에 마찬가지로 포권으로 응대한 설천위는 뒤쪽에 서 있는 당화유에게 눈짓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당화유는 자신의 오라버니에게 걸어가 그를 부축했다.
“일단 다친 사람을 수습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다음에 이야기를 이어 가죠.”
“배려 감사합니다.”
“데려다주고 올게.”
당화유가 당화인을 데리고 사라진 정원.
기절한 무인들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원로들의 모습에 설천위는 혀를 찼다.
“내 생각보다 더 버러지들이군.”
당가는 걱정의 범주에 넣지 않고 있었는데, 이런 사달이 났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혈교든 사혈천이든 그들이 대문파나 대가문을 건드릴 때는 연옥의 문을 열 때뿐이다.
무림맹을 공격했을 때처럼 흑암지규군 수준의 강자를 불러낸 것이 아니라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를 쉽사리 건드리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하니까.
무림맹으로 뭉쳐 있고, 사혈천이나 혈교가 날뛰는데도 가만히 있는 허울만 남은 것들이라고 깎아내리는 자들도 꽤 있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구파일방은 강하다.
오대세가도 강하다.
화경급 이상의 고수는 한 문파에 하나둘 정도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고, 또 실제로 그런 곳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이 명가인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화경급 고수?
재능이 있다면 나올 수 있다.
서하영과 그녀의 아버지인 권왕 서청진, 주현운, 백유, 문율 등등.
화경이란 재능이 있는 자들의 영역이다.
범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올라설 수 없고.
천재는 가벼운 노력만으로도 올라설 수 있다.
부조리한 재능의 격차가 그 무엇보다 강조되는 영역.
그게 화경이고, 그게 절대고수다.
하지만, 그 아래는?
함께 숙식하며 유대감을 쌓고, 긴 시간 합동술을 연마한 일류 이상의 무인들.
그들과 섞여 전장에서 기둥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절정 이상의 고수들.
일류 고수조차도 시골에 가면 절대고수의 취급을 받는 이 무림에서 일류 고수를 기본 병사로 부릴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바로 대문파 혹은 대가문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들은 여력이 없어서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움직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움직이지 않은 것뿐.
절대고수는 강하지만, 신이 아니다.
무림이 제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수백만의 병력을 거느린 황실을 이길 수 없듯이.
세력의 힘에서 머릿수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고, 때에 따라서는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대문파의 힘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그들이 쌓아 온 지식과 경험은 다수의 고수를 꾸준히 만들어 낼 저력이 된다.
홀로 일류 고수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은 재능의 영역이지만,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아 일류 고수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은 노력의 영역이다.
대문파는 그 노력을 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자들을 모아서 가르친다.
그렇게 거의 모든 세대에 일류 이상으로 구성된 무력대를 만들고.
그들이 나이가 들어서 점점 더 경지를 높여 은퇴에 가까운 자들은 긴 세월 쌓아 온 내공을 바탕으로 절대고수의 영역에 들어선다.
그들의 가르침은 아래로 이어지고, 그것이 반복되며 힘의 평균은 조금씩 올라간다.
이것이 대문파의 선순환이다.
선순환으로 끊임없이 부풀어 오른 힘은 강대하고, 전면전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렇기에 수많은 조직이 음지에서 활동했던 거다.
선순환의 반복으로 쌓인 숫자의 격차를 뒤집어엎을 무언가가 없으니까.
양지에서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린 대문파들을 쓰러트릴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원하는 거다.
적당히 강한 병력을 쓸어버릴 수 있는 힘을.
인간이 쌓아 올려 만든 강함이 아니라.
인간을 집어삼키는 재해와도 같은 힘.
화산이 그러하고.
태풍, 홍수, 가뭄, 벼락, 화재, 산사태 등등이 그러하다.
수많은 자연재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것을 품은 괴이들 또한 존재한다.
신(神)이되 신(神)이 아닌 거짓된 존재들.
끝내 연옥에 봉인된 신화시대의 잔재.
하늘을 열고 세상을 다시 채우고자 하는 거짓된 신들.
혈교, 사혈천, 혈사련 등등.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신들의 재림이다.
그리고 이건 거꾸로 말하면, 지금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주축으로 하는 무림은 그런 신들의 등장이 아니라면 무너트릴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하다는 의미다.
지식과 경험을 끊임없이 이어 오며 쌓아 올린 힘.
그 힘의 근간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자존심이다.
긍지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무언가.
그 무언가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가슴속에 있다.
타락을 막는다.
누군가가 유혹의 손길에 넘어가도, 그 옆에서 지켜보던 자들이 그것을 부정한다.
당가도 응당 그랬어야 했다.
아니, 설천위가 봤던 게임 속에선 대부분이 그랬다.
당가는 의심받을 짓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가의 생존 방식이자 긍지다.
이렇게 쉽게 타락할 가문이 아니란 소리다.
무림맹에서 활동하고 있는 당가의 가주가 정치 싸움에 완전히 눈이 돌아가 가문의 일을 등한시하고, 가문의 내부에서부터 곪아 썩어 들어가는 것을 제대로 도려내지 않아 생긴 일.
그리고.
‘나 때문인가.’
그 원인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자들이 무림에서 본래 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있다.
이 사달이 난 곳이 고작 당가 하나뿐일까?
조급하게 만들어진 것 같은 독의 완성도.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가 서둘러 급조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맹으로 복귀할 시간을 좀 앞당겨야겠는데.”
연옥이 열리기도 전에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