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6화
505화-사천당가 (6)
뭔가 잊고 있지 않나?
그 물음에 연화와 각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전투의 공기에 휩쓸려 모두가 자연스럽게 잊어버렸다.
독에 내성을 지닌 당가의 무인들뿐만 아니라.
독을 그 무엇보다 경계하면서 싸워야 할 자신들마저.
‘독이다!’
‘피독주를 입에 물어라!’
누군가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자 곁에 있던 이들이 소리치던 것을 잊었다.
하물며, 지금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 중 피독주를 입에 물고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거침없이 호흡하며, 암기를 뿌리고, 권각술을 펼치고 있었다.
마치 독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연화와 각려는 깨달았다.
이 공간에 흐르는 미묘한 영력.
그것은.
‘……주독(呪毒)!’
단순한 영력이 아님을.
“전원 물러나세요! 공간에 주독이 흐르고 있습니다!!”
연화의 외침과 동시에 당가의 무인들이 멈칫한다.
그러나.
“우아아아! 적을 쓸어버려라!”
금세 그런 일 따위 없었다는 듯이 전투를 재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연화와 각려는 확신했다.
‘술법……!’
‘정신 지배의 일종인가!’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도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상당한 고위 술사가 이곳에 있다는 소리다.
[역시 술사는 그리 길게 속지 않는군. 확실히 아직 미완성이야.]
그런 연화와 각려의 반응에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혈귀는 담담하게 주위를 살폈다.
[당가의 무인들을 보니 무인에게는 잘 통하는군.]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독을 풀었냐고? 우문(愚問)이로군. 대체 언제부터 독을 풀지 않았다고 생각한 거지?]
딱딱한 어조로 장난스러운 수준의 답을 내놓는 혈귀의 모습에 연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장난질은 그만두세요. 이게 대체 무슨…….”
[당가의 원로원주란 놈은 전에 없던 독을 원했지.]
과거에 없던, 그 누구도 대처하지 못할 극독.
하지만 그런 독은 결코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설령 만들었다고 해도 쉽게 사용할 수 없다면 의미가 없다.
즉,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치명적인 독이되 사람이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런 조건을 충족하며 과거에 없던 새로운 독을 만드는 게 어디 쉬울까?
무언가 혁신적인 변화가 없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고민하고 고민하던 원로원주에게 혈교가 손을 뻗었을 때, 원로원주는 그 손을 잡았다.
단순히 독으로 전에 없던 독을 만들 수 없다면.
‘단순한 독이 아니면 된다.’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지만, 독의 틀을 조금만 벗어나면 그 한계는 끝도 없이 넓어진다.
그렇게 원로원주와 혈교가 찾은 답.
[망아독(忘我毒). 우리는 이 독을 이렇게 이름 지었다.]
인체에 치명적이면서도 환각, 환청 등의 효과를 지닌 마약성 극독에 술법을 섞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독은 실체를 가진 극독이면서도 실체가 없는 주독(呪毒)이 됐다.
연기처럼 뻗어 나가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다.
약하게 들이마시면 감정 조절과 이성이 망가지고.
강하게 들이마시면 환각과 환청 등에 빠져 무너진다.
그리고.
[심장이 터지며 죽음에 이르지.]
“……비열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아주 저열한 독이군요.”
[죽는 순간까지 그리 나쁜 기분으로 죽진 않을 테니, 괜찮은 독이라고 생각한다만.]
혈귀의 대답에 각려의 얼굴은 점점 더 딱딱하게 변해 갔다.
“당신, 설마 술사입니까?”
[호오, 감이 좋군. 대주급 정도로 보이는데, 훌륭하군.]
혈귀의 대답에 각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위급 혈귀.
그리고 그와 융합한 술사.
혈교에서도 드문, 벽을 넘은 혈귀다.
그것도 혈교에 충성하던 술사와 섞인 혈귀.
그런 혈귀를 상대로 과연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까?
단주급은 와야 겨우 상대가 될 수 있는…….
‘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각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도 부단주다.
단주에게는 미치지 못하나, 나름대로 벽을 넘은 적조차 상대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부단주.
그리고 무엇보다.
‘이 거리라면 우리가 유리해……!’
연화는 술사답지 않게 근접 전투에 뛰어나다.
그리고 상대는 혈귀에 술사가 깃든 존재.
그렇다면 이렇게 접근한 상황에서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희망은 있다.
그렇게 생각한 각려는 연화를 보조하기 위해 움직였다.
술법의 매개체가 될 조각상을 소매에서 꺼내고, 자신과 연화를 지킬 방어막을 펼친다.
동시에 앞으로 달려 나가 혈귀의 안면에 주먹을 꽂는 연화.
완벽에 가까운 호흡.
마치 미리 짠 것 같은 움직임에 절로 감탄이 나왔지만.
[자꾸 잊는군.]
연화의 주먹은 혈귀에게 닿지 못했다.
아니, 어느새 멀어진 혈귀는 조소를 머금은 채 연화와 각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했을 터인데, 독은 조금 전에 푼 것이 아니라고.]
독.
그 한마디에 다시금 정신이 번쩍 든다.
“말도 안 돼……!”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고, 절망적인 현실이 다가온다.
이 주독(呪毒).
단순히 환각이나 환청을 일으키는 것이 증상의 다가 아니었다.
망각.
잊어버리는 것이다.
독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정신착란을 이용해 술법으로 끊임없이 독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우는 거다.
언제 독에 중독되었는지도 모르고.
언제까지 독에 중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중독되어 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심장이 터져서 죽음에 이른다.
망아(忘我).
망각 속에서 자신을 잊어버리고 끝내 목숨조차 잃기에 망아독(忘我毒).
사천당가와 혈교가 손잡고 만들어 낸 인류 최악의 극독(劇毒).
“……인지했습니다.”
각려가 절망스러운 독의 위력에 자신을 찾지 못하는 그 순간.
허공을 갈랐던 주먹을 거둔 연화의 두 눈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인지했다면, 먹어 치우지 못할 것도 없지요.”
은은하게 연화의 몸을 휘감고 있던 기운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괴연천식(傀然天食)]
연화의 몸을 휘감은 회색의 연기는 마치 용과 같은 형체가 되어 똬리를 튼다.
꼬리와 몸체로 연화를 휘감고, 그 머리는 꼿꼿이 세워 적을 응시하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연화는 정말로 오랜만에.
주문을 외웠다.
“나는 구름 속에 숨은 암룡이니.”
회색의 연기는 뚜렷해지고.
“내 이빨은 악을 물어뜯는 송곳이오.”
선명한 용의 송곳니가 번뜩인다.
“내 비늘은 악을 막는 방패이고.”
솟구치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비늘이 요동친다.
“내 두 눈은 악을 꿰뚫는 창이니.”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용의 눈이 완성되는 것과 함께 회색의 연기는 칠흑으로 물든다.
위기를 감지한 혈귀가 술법을 펼쳤다.
땅에서 솟구치는 바위 송곳.
허나.
[으음.]
막힌다.
칠흑의 용을 뚫지 못하고 막힌 바위가 파편이 되어 흩어지며.
은밀하게 다가가던 독은 더 이상 연화의 몸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전신을 휘감은 용과 함께 연화는 나아갔다.
“나는 모든 것을 씹어 삼키는 거악(巨顎)이니라.”
요동친다.
비명을 지르는 영력 속에서 혈귀는 깨달았다.
술사로서의 그의 역량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똑바로 주시할 수 있게 만들어 줬다.
[키아아아아아아!!]
[나는! 나느으으으은!]
[끄아아아아아!!]
휘몰아치는 영혼들.
그것들로 빚어 만들어 낸 흑룡.
참혹하다 못해 아름다운 힘.
괴이를 불태우고[傀然].
하늘을 집어삼킨다[天食].
이 무림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설천위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설천위가 가진 힘과 가장 근접한 종류의 힘.
혼을 먹어 치워 자신의 것으로 삼아서 천지를 집어삼키는 힘.
한 발자국만 삐끗해도 절대악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불러오는 힘.
연화는 그런 절망으로 흑룡을 빚어내어 맹세했다.
자신의 흑룡은 악(惡)을 물어뜯으리라.
흑룡을 몸에 두른 연화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이미 그녀의 몸으로 파고들었던 주독(呪毒)은 괴연천식(傀然天食)의 겁화에 불타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흔들림 없이 똑바로 혈귀에게 나아간 연화는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파고드는 혈귀의 술법은 전부 용의 비늘로 받아 내고.
빠르지만 어설픈 혈귀의 팔다리는 두 손으로 전부 부러트렸다.
[이, 이런 괴물이……!]
설천위는 부단주급은 전부 화경 이상의 강함을 지녀야 한다면서 서하영을 끌고 나갔다.
무해는 유예린과 삼귀에게 맡겼다.
그렇다면 연화는?
삼귀라 불리는 주현운이나 문율에게 도전해 제대로 된 승리를 거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화경의 강함에는 턱도 없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아직 흑룡단에 합류한 기간이 짧으니까 유예기간이라서 봐줬나?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설천위가 고작 그런 이유로 예외를 둘 리가 없다.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무인(武人)으로서의 연화는 아직 반푼이였지만.
술사(術士)로서의 연화는 당당히 1인분이다.
[커헉!]
팔다리가 부러진 혈귀가 발버둥 치는 것을 그대로 무시하고 파고든 연화의 두 손이 혈귀의 어깨와 목을 붙잡는다.
그리고.
찌지지직!
인간의 몸에서 나서는 안 되는 소리와 함께 혈귀의 몸이 찢겨 나간다.
어깨에서 가슴까지.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서 피가 솟구치지 않았지만, 섬뜩하기 그지없는 광경임은 분명했다.
인간의 형체를 한 존재를 맨손으로 찢어 버린 것이니까.
하지만.
[크, 크큭! 괴물이구나!]
혈귀는 죽지 않았다.
애초에 불사의 병사를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 혈귀다.
고작 이 정도에 죽진 않는다.
그리고.
[내가 죽는다고 한들 이 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술사에게 잘 통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괴물의 뒤에 있던 술사는 몇 번 깨긴 했지만, 계속 독에 당하고 있었다.
충분했다.
무림의 가증스러운 것들을 치워 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신의 축복으로 이 독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혈귀는 만족하고 웃음을 지었다.
이미 중요한 자료는 전부 혈교로 빼돌렸다.
재료와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독은 다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독을 해독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사천당가는 거의 멸문에 가까운 크나큰 피해를 입을 거다.
그 뒤에는? 전장에서 쓰이는 독의 주범이라는 소문이 퍼져 분노한 군중에게 멸문을 당하고 말겠지.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다.
[크크크, 크하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혈귀의 모습에 그를 한 발로 밟고 지그시 응시하던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네요.”
담담한 목소리.
그 안에 절망도, 당황도 없다는 사실이 혈귀는 의아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절규하고 절망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대체 어떻게 저런 차분한 마음을 유지하지?
그럴 수가 없…….
“준비됐어.”
순간, 그들의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혈귀는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니, 있을 수 없다.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억지로 머리를 든 혈귀는 불신으로 가득 찬 눈을 크게 떴으나,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각려의 곁, 주독(呪毒)의 원액을 직접 주입받아서 이 공간에서 가장 미쳐 날뛰어야 할 당화유가 담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네, 네년이 대체 어떻게?]
당황으로 가득한 목소리.
그리고.
“제가 도왔죠.”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당화유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여인.
사내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목소리와 함께 여인은 부채를 펼쳤다.
“고작 이 정도의 주독이라면 저도 충분히 막아 줄 수 있으니까요.”
살랑거리는 부채가 주독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러면 되나?”
의문을 품고 묻는 당화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연화는 한숨과 함께 요려에게 눈짓했다.
“시작해 주세요.”
웬만하면,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뒷수습을 위해서라도 힘을 빌려야 했다.
아쉬움이 담긴 연화의 신호에 웃음을 흘린 요려가 손을 뻗었다.
허공에 생겨나는 보라색의 문.
탁!
미닫이문이 열리고, 그 너머에서 손이 뻗어 나온다.
딱!
손가락을 튕기며 나는 소리가 퍼져 나가고.
“전원 동작 중지.”
수백 개의 흑관이 모든 당가의 무인들을 포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