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4화
503화-사천당가 (4)
결심한 연화와 각려는 즉시 움직였다.
각려가 품에서 꺼낸 조각상에 각자 피를 묻혀 분신을 만들어 낸 두 사람은 분신을 방에 두고 은밀하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각려의 술법을 통한 은신.
기척을 감추는 건 웬만한 무인의 은신술보다 뛰어나지만, 문제는 시야에서 숨는 게 안 된다는 점.
무인이 아니라 시종에게도 걸릴 정도로 겉모습을 숨기지 못하니, 썩 좋은 은신술이라고 할 순 없지만.
샤샤샤샥!
연화가 함께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애초에 무인 출신이고, 술사가 된 뒤에도 설천위에게 철저하게 단련된 연화에게 각려를 등에 업고 지붕에 매달려 기어 다니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무, 무겁지 않아?’
‘문제없어요! 밥 좀 더 먹으세요, 언니!’
자신의 목과 허리에 손발을 휘감은 각려와 함께 지붕을 타고 이동하며 연화는 연신 주위를 면밀하게 훑었다.
당화유와 세운 계획은 간단했다.
두 사람이 당가로 들어간다.
조력자들을 구출한다.
당화유가 합류해서 조력자들을 규합한다.
원로원을 몰아내고 당가를 정상화시킨다.
참으로 간단한 계획이었다.
문제는.
‘느껴져?’
‘아뇨. 전혀 감이 안 잡혀요.’
당화유도 그 조력자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조력자.
원로원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어 혹은 방해가 될 거라고 예상해 누명을 씌워 가둬 놓은 이들.
사천당가.
외부에서 들어온 데릴사위나 무인, 높은 분가의 비율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당가(唐家)가 아닌 당문(唐門)이라고 불리는 이들도 있지만, 사천당가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가문이다.
즉, 일단은 옅든 짙든 피로 이어진 가족이라는 소리다.
천륜이란 건 대단한 힘이다.
인륜을 저버리고 힘을 손에 넣으려는 자들까지 머뭇거리게 만드는 힘이니까.
당화유조차 탈출할 때 원로에게 사경을 헤맬 순 있어도 죽을 정도의 치명적인 독은 쓰지 않았다.
피를 나눈 존재를 해치기 싫다는 무의식이 낳은 결과다.
그리고 그건 원로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추악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인륜을 저버렸지만.
사천당가라는 이름 아래 결국 모두가 모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결국 가문의 모든 이들이 지신들의 뜻에 따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대하는 자 혹은 반대할 자들을 죽이진 않았다.
그들도 가문의 일원이니까.
당화유가 노리는 것은 그들의 협력이다.
갇힌 상태로 긴 시간을 보내며 쇠약해진 이들이라고 해도 모두 한가락 하는 강자들이다.
거기다 그들을 당화유가 이끄는 것으로 가문을 휘어잡을 정당성을 얻는다.
무엇보다.
‘정말 협력해 주는 거 맞겠죠?’
‘……믿어야지.’
그 갇힌 이들 중에서 가문의 흐름을 크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이 포함돼 있었다.
당화유보다 더 가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물.
소가주.
당화유의 오라버니이자 사천당문 가주의 장남.
그가 당가의 어딘가에 갇혀 있다.
* * *
“……지독하군.”
당가 내부에 존재하는 은밀한 지하 감옥 중 하나.
그곳에서 허리를 꼿꼿이 편 상태로 앉아 있던 사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지독할 정도로 악취가 나오. 원로원주.”
“허허, 소가주. 가문의 어른에게 말이 짧구나.”
“어른? 지금 내 귓가에 개소리가 들린 것 같소만.”
원로원주를 향해 이죽거리며, 사내는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내 눈에 가문의 어른은 보이지 않소만? 세상을 모르고, 추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마구 날뛰는 짐승만 보일 뿐이지.”
“여전히 혓바닥이 활기차군. 소가주.”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는 소가주의 모습에 히죽 웃은 원로원주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이제 그 소가주라는 이름도 곧 자네의 동생에게 갈 걸세.”
“무림맹에 있는 화진이에게?”
“그야 두고 볼 일이지. 소가주란 가문을 이끌 다음 세대의 젊은이니, 능력을 보고 뽑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그렇군. 당신의 어린 손자 놈에게 맡길 생각이군.”
자신보다 어린, 해맑게 웃는 미소가 인상적인 친척 동생을 떠올리며 소가주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 아이가 지금 당신의 꼴을 보면 참으로 좋아하겠어. 좋아하는 조부가 혈교와 내통한 배신자라니, 아주 기뻐서 춤을 추다가 숨넘어가겠군.”
“놈! 말을 가려서 해라.”
이죽거리는 말에 반응한 원로원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지만, 소가주는 웃으며 주먹을 뻗었다.
공격 같은 건 아니다.
“이거나 먹어라.”
절그럭거리는 사슬 소리와 함께 감자를 날린 소가주는 원로원주를 비웃었다.
“혈교의 잡종들이랑 손잡고 무엇을 만들려는 건지 몰라도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지옥뿐이다. 이 머저리 같은 늙은이야.”
“당가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이 노구 따위는 얼마든지 지옥 불에 던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애송이.”
“영광? 세상천지의 영광이 다 뒈졌나. 개소리도 참 활기차게 하는군.”
원로원주를 비웃으며 소가주는 다시 한번 감자를 먹였다.
“네놈은 수백 년을 쌓아 온 가문의 영광을 똥통에 처박고 있는 거다.”
이제는 최소한의 격식조차 치워 버린 소가주는 원로원주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그런 소가주의 모습에 화가 나 눈썹을 꿈틀거리던 원로원주는 귓가로 들려온 전음에 몸을 돌렸다.
“일이 생겼군. 또 들르마. 그때는 마음을 바꿔 먹길 바라마.”
“꺼져라. 나이를 헛처먹은 노인네야.”
사라지는 원로원주의 뒷모습에 시원스레 욕을 갈긴 소가주는 이내 씁쓸함이 담긴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지독한 독을 만들고 있나 보군.’
소가주의 자리에 자신의 손자를 앉힐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죽이지 않는 이유야 뻔했다.
새롭게 만든 독을 쓸 사람을 찾고 있는 거다.
아마 너무 지독해서 사용하는 사람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극독이겠지.
그걸 손자한테 쥐여 줄 순 없으니, 자신에게 쥐여 주고 무기로 써먹으려는 거다.
순순히 받아들이면 온갖 주술로 옭아맬 테니 독을 가문에 뿌리는 것도 불가능할 테고.
‘……쓰군.’
입안이 너무 썼다.
가문의 어른이니까.
결국 당가의 일원이니까.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넘어가고 용서했던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자진해서 상황을 바꿔야 할 가주인 아버지는 가문의 영광이라는 허명에 취해 무림맹에서 그저 정치놀음에 바빴다.
그 빈틈을 어떻게든 메워 보겠다고 자신이 이곳에 있었지만, 결국 제대로 일을 못해서 상황은 최악에 이르렀다.
설령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아닌 것은 아니고 쳐낼 것은 쳐내야 했는데.
당가는 독과 암기를 쓰는 가문.
사파의 종자들이 쓸 만한 수법으로 정파에 뿌리를 박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당가불의(唐家不疑).
당가는 의심받을 짓을 하지 않는다.
사람의 숨통을 끊는 극독을 몇 개나 가지고 다녀도 정파인끼리의 다툼에서는 절대 쓰지 않는다.
독을 이용한 사건이 일어나면 목을 걸고 객관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정파인끼리의 대련과 비무에서는 치명적인 암기를 쓰지 않는다, 등등.
독과 암기라는 수법을 쓰기에 당가는 오히려 떳떳함을 무기로 내세워 지금껏 살아왔다.
정파인으로서,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그런데, 그런 당가가 혈교와 손을 잡고 극독을 만들고 있다.
천하 제일의 고수를 죽일 수 있는 극독이든, 수천 명을 단숨에 학살할 수 있는 극독이든.
뭐가 됐든 간에 당가의 미래는 이제 하나로 귀결될 거다.
무림공적(武林公敵).
믿음을 배신한 추악한 변절자들로 남아 이 무림에서 완전히 쫓겨날 거다.
어떤 극독을 손에 쥐더라도 무림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독으로 만민을 죽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를 죽인 뒤에 남는 건 폐허뿐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결국 무림에서 쫓겨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혈교와 손을 잡고 만들어 낸 극독이 천하를 뒤덮을 수 있든 없든, 사천당가는 망한다.
‘……지독하군.’
지독할 정도의 악취이고.
지독할 정도의 악몽이다.
이를 악문 소가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원로원주가 나가고 꽤나 시간이 지났는데, 지상이 소란스러웠다.
퉁퉁.
거칠게 달리는 발소리가 진동을 통해 지하 감옥에 닿는다.
침입자라도 있는 건가.
그러면 조금 희망이 있을 텐데.
가문의 이변을 눈치챈 누군가가 들어온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미약한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다가도 이내 꺼진다.
원로원주가 주도하고 있는 극독 제조를 대부분의 무인들은 모른다.
설령 그 일에 협력하고 있는 무인들이라고 해도 함께하는 이들이 혈교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도 있다.
단지 시체를 이용해 지독한 독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만 아는 이들도 있다.
당가불의(唐家不疑).
당가는 의심스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가를 의심하지 말라.
독을 다루고, 암기를 쓸지라도 반드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는 당가를 존중하는 믿음.
그 믿음을 배신하고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당가다.
무림의 동포들이 후세에 이 일을 얼마나 비웃을까.
살아남은 이들은 어떤 치욕 속에서 살아갈까.
절로 흘러내리려는 눈물에 소가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는 죄인이 어찌 울 수 있겠는가.
자신에겐 슬퍼할 자격조차 없…….
“……음?”
뭔가.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아니.
“……누구냐?”
눈이 마주쳤네.
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여…… 인?
아니, 여자아이?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자와 눈이 마주친 소가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천장에 여자가 달라붙어 있는 것도 신기한데, 그 여자는 등에 여자 하나를 더 매달고 있었다.
마치 거미가 새끼를 등에 업고 있는 것 같은…….
[흠흠,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아닙니다.]
순간 머릿속에 들어온 목소리에 입을 다문 소가주는 그게 등 쪽에 매달려 있는 여자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그녀도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당가의 소가주 당화인, 맞으신가요?]
자신의 신분을 묻는 물음에 당화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드디어 찾았군요. 한참을 천장을 기어 다녔네요.]
‘당신이 기어 다닌 건 아닌 것 같소만…….’
입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 삼킨 당화인은 기어 들어온(?) 연화와 각려를 보고 물었다.
‘누구시오?’
입 모양만으로 물었지만, 그 뜻을 재빨리 알아차린 각려는 즉시 대답해 줬다.
[무림맹에서 왔습니다. 당 소저와 만나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고요.]
당 소저.
이 사천당가에 당 소저는 많았지만, 당화인은 그들이 말하는 당 소저가 누구인지 금세 깨달았다.
자신의 여동생.
당화유.
그 아이가 이들을 보낸 거였다.
그렇다면.
‘무림맹에서 얼마나 지원이 왔소?’
희망이 있다.
무림맹이 지금 당가의 상황을 알아채고 움직인 거라면, 만약 그래서 아버지가 움직였다면!
충분히 희망이…….
[저희 둘뿐입니다.]
……없네.
허탈함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내뱉은 당화인의 몸에 힘이 풀리는 그 순간.
쩡!
“……음?”
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당화인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당가의 뛰어난 제련 기술을 기반으로 묵철을 다듬어 만든 쇠사슬이다. 그걸 이리도 간단히 끊어 내다니!
당화인이 놀라서 감탄하는 사이, 그의 앞에 도달한 연화는 거침없이 손을 뻗어 당화인의 혈을 짚었다.
점혈되어 막혀 있던 내공이 움직인다.
눈앞의 소녀가 상당히 뛰어난 무인임을 깨달은 당화인이 놀란 눈으로 연화를 바라봤다.
몸이 단련된 기색은 있지만, 아무리 봐도 강한 무인으로는 안 보이는데?
설마 자신의 안목을 속일 정도로 뛰어난 무인인 건가?
그럴 수가…….
감탄을 넘어 경악으로까지 감정이 확장되려는 그 순간.
‘쉿.’
입술 앞에 검지를 세운 연화는 그대로 당화인을…….
‘어, 어어?’
업었다.
천장에 매달린 채 등에 성인 여자와 남자를 업은 연화는 그대로 천장을 이동했다.
그리고.
“소, 소가주님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당가는 혼란 속에 빠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