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500화 (500/624)

제500화

499화-사존(邪尊) (4)

철백과 서하영에게 주변 경계를 맡긴 설천위는 얼음 속에 갇혀 있는 사존의 앞에 섰다.

“흠.”

일단 어떻게든 봉인하는 데에는 성공했는데.

‘문제는 어떻게 제정신을 차리게 하냐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이 썩 좋진 않았다.

철백과 서하영에게는 이 이상 전력을 쏟아붓진 않았을 거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확신은 없었다.

사존을 이렇게 만들고 함정을 판 놈들이다.

사혈천인지 혈교인지는 모르겠지만, 능력이 있는 녀석이 움직였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어쩌면 조직에 속한 녀석이 아니라 언여휘나 비후처럼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녀석의 소행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비후라면 괜찮겠군.’

비후(悲吼).

무려 제천대성이 직접 봉인한 지상의 악귀 중 하나.

당연히 그 힘은 강력하기 그지없으나, 제천대성에게 당한 봉인이 풀리지 않았기에 실질적인 무력은 크게 위협이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특유의 능력으로 악귀를 조종하고 제어하는 데 특출 난 면이 있어서 이리저리 활약하고 다니는 것 같긴 하지만.

철백이나 서하영이 지키고 있다면, 비후 개인의 능력으로 두 사람을 뚫을 순 없다.

다만, 비후가 아닐 경우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사존을 이렇게 만든 게 강력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라면 당연히 제어와 감시를 위해 대규모 인원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럴 확률은 낮을 것 같긴 한데…….”

사존을 집단이 이렇게 만들었을 거란 생각은 안 드니까.

동급의 괴물이 아니라면 이렇게 만들기 힘들었을 거다.

고민은 깊었지만, 행동은 빨랐다.

“좋아.”

움직이자.

지금은 위험부담을 짊어져야 할 때다.

이대로 사존을 방치했다가는 봉인이 풀릴 테고, 한 번 겪었던 봉인을 사존이 또 당해 줄 리 만무했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그렇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지금 해결을 보는 수밖에.

가볍게 호흡을 고른 설천위는 사존에게 다가갔다.

사지를 꿰뚫고 상체에도 몇 개나 박힌 자신의 말뚝 사이로, 원래부터 박혀 있던 쇠말뚝이 보였다.

단순한 법구는 아니다.

고문의 흔적.

아마 사존이 이렇게 되기 전부터 박혀 있던 물건이겠지.

‘내공을 완전히 틀어막으면 늙은 육체만 남으니 고문의 과정에서도 내공은 어느 정도 풀어 줬겠지.’

그렇다면, 고문하는 사람이 현경급 고수를 상대로 위협 없이 고문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짧게 고민한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뻗었다.

위험부담 없이 고문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당연히 멀리서 고문하는 거다.

그리고 이 쇠말뚝은 그걸 가능케 해 주는 도구겠지.

멀리서 쇠말뚝을 때려서 내부를 휘젓거나 열로 달궈서 내부를 익히는 종류의 고문이 행해졌을 거다.

심후한 내공 덕에 쓸데없이 단단한 육체와 불굴의 정신은 그런 고문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해 줬을 테고.

아무리 고통에 내성이 있다고 해도 인간이라면 지칠 수밖에 없는 고문.

그 고문에 쓰인 물건을 술법의 매개체로 쓰는 건 꽤나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다.

대상의 피를 한껏 머금은 쇠말뚝인데, 당연히 술법에 도움이 되겠지.

그러니.

“일단 뽑아 볼까.”

설천위는 얼음 사이로 손을 박아 넣었다.

마치 얼음이 물렁해진 것처럼 설천위의 손은 가볍게 얼음을 통과해 쇠말뚝을 붙잡았다.

“흡!”

그리고 뽑아낸다.

뿌드득!

엉겨 붙어 있던 근육이 뜯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설천위는 과감하게 쇠말뚝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혈기(血氣)와 사기(邪氣)를 가득 머금은 쇠말뚝이 뽑혀 나와 바닥을 나뒹군다.

쇠말뚝을 전부 뽑아내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설천위의 손은 얼음을 통과했으니까.

“후우.”

상처 부위가 열기에 타들어 가며 아무는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훌륭하네.

육도(六道)의 파편이 가진 공통된 특징 중 하나다.

회복력 상승.

파편 하나로 불사(不死)의 영역을 만들어 내는 [수라(修羅)]만큼은 아니지만.

지옥은 지옥.

끊임없는 고통에는 재생이 수반되어야 하기에 육도(六道)의 파편에는 대부분 재생력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아무튼, 사존은 예외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 이젠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나 시작할 테니까 부탁 좀 할게.”

“맡겨 둬라.”

“문제없어요.”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확인을 받고, 설천위는 사존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쿵!

설천위는 회색의 세계에 떨어졌다.

* * *

“이건 좀 흥미롭군요.”

설천위가 떠나고 석 달.

밖으로 나도는 단주를 대신해 업무를 보던 유예린은 오늘 올라온 보고서 하나에 붓을 멈췄다.

“이거, 어디에서 올라온 거죠?”

“연 부단주입니다.”

“흐음.”

호운의 대답에 가만히 책상을 두들기던 유예린은 은은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그대로 진행하라고 하세요.”

“예? 하지만…….”

위험합니다.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호운의 모습에 유예린은 빙긋 웃으며 양손을 모아 턱 아래에 깍지를 꼈다.

“위험하기에 진행하는 겁니다.”

“그……. 알겠습니다.”

“후후, 걱정 말아요. 호 학사님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망설이는 호운을 안심시키며, 유예린은 가볍게 손끝을 움직였다.

일 년간 설천위는 괴물처럼 발전했다.

그리고 그건 그 밑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 또한 그러하고.

“정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네요.”

그렇기에 기다리던 기회가 와서 유예린은 조금 기뻤다.

이 일 때문에 벌써 석 달이나 그 사람과 떨어져 있었으니까.

조금 정도는 화풀이를 해도 되겠지.

* * *

“끙차!”

자기 덩치만 한 짐을 짊어진 연화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엄살은.”

그런 연화의 모습에 대주직을 내려놓고 부단주의 부관으로 자리 잡은 각려가 혀를 찼다.

고작 저 정도 크기의 봇짐을 짊어지고 끙차, 라니.

엄살에도 정도가 있지.

“언니, 요즘 들어 말투에 가시가 있어요!”

“얘가 뭐라니! 아니거든!”

“화내는 거 보니까 맞는데…….”

“흠흠, 아니라니까.”

어제 맞은 눈두덩이의 멍이 아직도 안 빠져서 투덜거리는 건 아니다.

진짜로.

어째 이 어린 상관의 부하가 된 뒤로는 면사(面紗)를 벗고 다닌 게 손에 꼽을 정도다.

심지어 눈두덩이에 멍이 생기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아예 얼굴 전체를 가리는 면사를 쓰니 가끔 벗고 다니면 자신인 줄 몰라보는 신입도 있을 정도였다.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강해지든가 해야 하는데…….’

저 괴물 같은 녀석을 어떻게 이기냐.

술사로서의 역량을 떠나 연화는 강했다.

그냥, 진짜로 강했다.

흑룡단의 부단주급 이상은 화경(化境) 이상의 강함을 가져야 한다.

그 말을 실천이라도 하려는 건지 지독하게 연화를 몰아붙인 설천위의 덕에 연화는 무서울 정도로 강해졌다.

술사 간의 싸움?

술법이고 식령이고 간에 다가오는 연화를 막아 내지 못하고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처맞기 일쑤였다.

대련이 끝나고 바닥을 굴러다니느라 흙먼지 범벅이 되어도 멍 자국이 없으면 칭찬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진짜 손이 더럽게 매웠다.

그리고 틈틈이 다닌 임무에선 어땠나?

악귀?

각려가 자신보다 어린 상사한테 쥐어 터지면서도 얌전히 일을 하는 덴 다 이유가 있었다.

악귀도 처맞다 보면 성불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사람이 상사인데,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그런데 이번 임무, 진짜 가는 거야?”

“응. 가야죠.”

“……이거 명백히 이상한 건 알지?”

무려 사천에서 온 의뢰.

그것도 사천당가에서 온 의뢰다.

그리고 이건 명백히 이상했다.

일단, 사천에는 아미파가 있다.

소림과 더불어 무림에서 불가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들 중 하나.

여승(女僧)들이 모인 금남의 성지.

거기에 아미파만 있나?

아니다.

사천에는 청성파와 점창파도 있다.

둘 다 무림에 발을 깊숙이 담근 무문(武門)이긴 하지만, 일단은 도문(道門)이기에 당연히 도사들도 있다.

사천 안에서 일어나는 악귀의 퇴치는 이 세 문파만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수준이기에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건 흑룡단 내부에 있는 청성파 출신의 술사에게 확인까지 받은 정보다.

즉.

“무조건 함정이야, 이거.”

무림맹 곳곳을 들쑤시고 있는 흑룡단을 위협하기 위한 함정이다.

정파 무림의 떳떳함?

그딴 게 마음속 깊이 뿌리박혀 있는 인간들만 있었다면 사파 따위는 진즉에 밀어 버렸을 거다.

자기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선봉에 선다면 정파 무림은 사파 무림 정도는 진즉에 짓밟을 수 있었을 테니까.

서로 손해를 감수하기 싫어서 옥신각신하다가 사파가 몸집을 키웠고, 사존(邪尊)이라는 괴물까지 나오면서 아예 손을 떼서 이런 꼴이 된 거다.

정파 무림은 누구보다 이기적이고 자기보신(自己保身)에 환장한 놈들뿐이다.

그런 놈들에게 무림맹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칼질을 하는 흑룡단은 제 주머니에 구멍을 뚫는 무뢰한으로밖에 안 보였을 거다.

흑룡단도 결국엔 무력 조직이다.

요 일 년간은 내실에 집중해서 사망자가 없었지만, 앞으로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사망자가 나올 테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은퇴하는 이들도 생길 거다.

새로운 인재의 유입이 없으면, 천천히 말라 가다가 무너진다.

흑룡단 술사들이 임무에 나가면 몇 명씩 꼭 죽어서 돌아오더라.

이런 소문이 퍼지면 신입을 데려오는 건 거의 물 건너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인들은 몰라도 술사들은 그런 정보에 민감하니까.

그리고 지금 사천맹으로 가는 임무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이런 소문을 만들어 내기 위한 함정이다.

괴물 같은 단주가 외부 임무로 완전히 단과 떨어진 기간을 이용해 파놓은 함정.

설천위라는 괴물만 없으면, 흑룡단 따위는 얼마든지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함정이다.

그러니.

“일단은 물러나서…….”

“언니.”

“……응.”

봇짐을 가볍게 흔들어 자리를 고친 연화는 걱정으로 가득한 각려를 보며 빙긋 웃었다.

“저, 흑룡단 부단주예요.”

그 괴물 같은 인간 밑에서 일 년간 지옥 수련을 한 부단주.

“흑룡의 송곳니는?”

“……악을 물어뜯고.”

“흑룡의 포효는?”

“……악을 쫓아내고.”

“흑룡의 칠흑은?”

“……분쇄한 악을 두른다.”

“정답.”

흑룡단 술사대의 복무신조와 함께 연화는 문을 나섰다.

“악(惡)이 타락한 악귀(惡鬼)든, 인간의 추악한 악의(惡意)든.”

흑룡이 할 일은 하나다.

“흑룡은 물어뜯고 생각하는 겁니다.”

* * *

회색의 세계.

그곳에 선 설천위는 익숙한 느낌에 미간을 찡그렸다.

“이건 또 뭐야.”

차오르는 열기.

곳곳에 박혀 있는 벌겋게 달아오른 철 궤짝.

그 안에 죄인을 가두고 고문하는 초열지옥의 모습을 형상화한 주제에.

대지와 하늘은 회색빛이다.

붉은빛은 흐르는 용암과 달아오른 철 궤짝에서만 일렁이고 있었다.

“후.”

다만 치밀어 오르는 열기만큼은 확실하기에 가볍게 호흡을 내뱉어 열기를 밀어낸 설천위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왔구나.”

거대한 철 궤짝 안에 박혀 있는 사존의 모습에 기어코 미간을 찡그렸다.

“영감님, 왜 그러고 계신데요?”

“내가 알겠느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러고 있었는데.”

사지를 끊어 낼 정도로 굵은 쇠말뚝에 박힌 몸.

대체 살아 있긴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로 벌겋게 달아오른 벽에 꽂혀 있는 사존의 모습은 도저히 맨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

“이게 지옥이란 건가 싶더군.”

“뭐,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제천대성도 있는데, 지옥이라고 없겠어?

빙긋 웃는 설천위의 모습에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사존은 웃음을 터트렸다.

“크흐흐흐흐, 학관에서 봤던 그 애송이가 이런 괴물이 됐을 줄이야.”

“에헤이, 저야 뭐 약과죠. 영감님의 제자는 사천맹을 꿀꺽했는데.”

“과연, 네가 도왔느냐?”

“제가 조금 돕긴 했죠.”

“대답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 아이가 널 자빠트리는 데 실패한 것 같구나.”

“제가 하체가 워낙 튼실해서.”

“남자로서 자랑할 만한 점이다.”

이 참혹한 광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만담 같은 대화가 오간다.

실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 대화가 끊기고.

“그래서.”

웃음기가 사라진 사존의 두 눈이 설천위를 응시했다.

“꺼내 줄 수 있느냐?”

치밀어 오르는 열기.

그 안에 담긴 것은 그야말로 순수한 살의(殺意)였다.

피로 사파를 씻어 내서 그 정상에 우뚝 섰던 사내의, 이제는 젊은 날과 함께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살의.

그 살의를 마주한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물론이죠.”

지옥문을 뜯어서라도 꺼내 드려야죠.

나 대신 적의 목을 물어뜯어 주실 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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