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9화
498화-사존(邪尊) (3)
단숨에 자신을 땅에 처박은 철백의 손에서 빠져나온 사존의 눈은 여전히 흐리멍덩했다.
전투의 한복판에 있는 인간이라곤 볼 수 없는, 완전히 망가진 눈동자.
그 눈동자에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겼다.
기이할 정도로 해진 옷 사이로 선명하다 못해 거대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철백.
웃통을 벗어 재껴 꿈틀거리는 근육을 뽐내는 설천위.
근육의 크기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근육의 질.
과연 인간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 갈라진 근육들은 그들이 얼마나 혹독한 수련을 해 왔는지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빠르네?”
제압하려다 보니 꽤나 시간을 질질 끌긴 했지만, 약을 전부 흡수할 정도로 시간을 끌진 못했는데.
기도가 확연하게 변한 철백의 모습에 설천위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하긴, 자신도 전투 중에 화경에 올라 환골탈태를 했는데.
철백이라고 빨리 못 하리란 법은 없지.
애초에 무공의 궤 자체가 다르니 환골탈태의 방식도 다를 수도 있고.
철백의 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세에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트는 사이, 사존을 살피던 철백이 의문을 던졌다.
“천위, 누구지?”
“사존.”
“과연.”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세를 뿜어내는 건가.
‘그리고 나는 이런 괴물이 접근해 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던 거군.’
나약한 수준이 아니었네.
고개를 끄덕인 철백은 망설임 없이 자세를 고쳤다.
왼발은 앞으로, 오른발은 뒤로.
왼손 주먹은 앞으로, 오른손 주먹은 허리춤에.
호흡이 안정적으로 가라앉고, 두 눈은 오로지 사존만을 담는다.
“안 죽일 거다.”
“확인했다.”
설천위의 한마디에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은 철백이 한마디를 남기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쾅!!
진천뢰가 터진 것 같은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마구 치솟았다.
그와 동시에 치솟는 열기.
단숨에 강해진 열풍에 순식간에 먼지구름이 흩어지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사존과 철백이었다.
허리와 하체, 상체의 회전을 부드럽게 담아낸, 정석에 가까운 정권 지르기.
허리춤에서 시작된 일격은 정확하게 사존의 가슴 한가운데를 노렸고, 사존은 그 일격을 받아 냈다.
뿌득! 뿌드득!
양손으로 철백의 주먹을 움켜쥔 사존의 손과 팔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얼굴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지만, 전신에 들어간 힘은 사존이 지금의 공격을 결코 가볍게 막아 낸 것은 아니란 점을 증명했다.
다만.
“강하군.”
고작해야 반걸음 정도밖에 밀려나지 않았단 점이 마냥 막진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줬다.
그렇기에 철백은 거침없이 주먹을 거뒀다.
오른손을 당기고.
허리를 비튼다.
다른 거창한 술수는 섞지 않는다.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쓸데없는 낭비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철백이 유일하게 사존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
쾅!!
단순함에서 나오는 속도와 파괴력!
비틀어 낸 허리로 뻗은 왼손 주먹이 다시금 사존에게 막히는 것을 확인하고 철백은 움직였다.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쾅!! 쾅!!
주먹을 뻗고.
발차기를 날린다.
필요하다면 박치기도 하고, 어깨로 들이받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사존의 몸을 휘감은 열기와 벼락에 옷은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피부는 붉게 달아오르지만.
“흐으으읍!”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몰아붙이고, 또 몰아붙인다.
쏟아 내는 공격이 사존의 손발을 묶었다.
막거나 피하는 것에 무리는 없으나, 막거나 피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 파괴력과 속도를 갖춘 공격은 설천위가 영력을 끌어올리고 흑관으로 된 말뚝을 쏟아 내는 것보다 훨씬 위력적이었다.
그렇기에.
“잘했어.”
철백이 벌어 낸 시간으로 설천위는 또 다른 결계를 완성했다.
수천 개의 흑관으로 만든 말뚝이 땅과 하늘을 빼곡히 수놓는다.
그 자체만으로 벗어날 수 없는 그물처럼 사존과 철백을 감싼 말뚝에서 강렬한 냉기가 흘러나온다.
“초열지옥이 있으니 흑암지규군의 능력이 통할 리가 있나.”
초열(焦熱)을 품은 존재가 고작 연옥의 용암 따위에 녹을 리가 없지.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지옥도로 구현되는 힘은 크게 두 종류.
팔열지옥(八熱地獄)과 팔한지옥(八寒地獄).
두 지옥은 죄에 따라 갈리는 만큼 뭐가 더 강하고 뭐가 더 약하다는 건 없지만.
게임 속에선 팔한지옥이 조금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팔열지옥은 불의 열기로 인한 대미지만 계속 들어오지만, 팔한지옥은 대미지에 속도 감소 페널티까지 걸리니까.
지금 철백이 무식하게 힘과 속도로 밀어붙이고 있는 저런 구도는 안 나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불굴이어도 얼어붙어 버리면 움직임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다만.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
철백이라고 해서 저 전투를 그리 오래 이어 나갈 순 없을 거다.
사존이 초열지옥을 품으면서 그의 벼락은 아득한 열기를 품었다.
닿는 순간, 녹아내릴 것 같은 섬뜩한 열기.
철백의 육체가 버티고는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버텨 줄지는 미지수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끝내 볼게.”
설천위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어쩌면 그냥 죽이는 게 최선이었을지도 모르는 사존.
하지만 철백의 조력으로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지옥도의 힘에 완전히 사존이 무너졌다면 살릴 수 없었겠지만…….
‘사존인데.’
그 괴물이다.
한 번 밀려서 육체는 내줬지만, 혼까지 완전히 망가지진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니 일단 제압해서 지옥도의 힘만 거둬 낼 수 있다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수천 개의 말뚝을 조종하며 설천위는 봉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쌓아 온 지식.
본능에 새겨진 감각.
그 모든 것들을 이용해 지금 이 자리에서.
멸(滅)에 다다른 마(魔)를 제압할 봉인을 만들어 낸다.
[……이런 괴물 놈이.]
[이런 놈이 인간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
손휘의 경악 섞인 감탄과 흑암지규군의 절규와 함께.
고오오오오오오!
봉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정말로 저 괴물을.”
사존과 멀리 떨어진 숲.
은밀하게 상황을 살피던 이들은 놀라서 그만 혀를 내둘렀다.
혹시 몰라서 관리를 위해 은밀하게 뒤쫓았는데, 이런 상황이 될 줄이야.
저런 괴물을 누가 막겠냐는 생각에 투덜거렸는데…….
‘진짜 괴물은 따로 있었군.’
혼자서 저런 대규모의 술법을…….
이 먼 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빼곡하게 하늘을 메운 말뚝의 모습에 술사들의 대주는 고개를 저었다.
“준비했던 술법으로 간다.”
“하지만…….”
그거 하면 무조건 걸릴 텐데?
지금은 비후가 걸어 준 술법을 이용해 모든 기척을 감추고 있지만, 이쪽에서 술법을 사용하는 순간 적의 영력에 감지될 거다.
그렇게 되면 적의 저 봉인 술식을 한 번은 막을 수 있겠지만, 그다음은?
위치를 들킨 이상 이쪽도 위험하다.
저 괴물은 이 거리라고 해도 충분히 자신들을 쓸어버릴 능력이 있는 녀석이 아닌가.
그 유명한 흑룡도 꺼내지 않았으니 분명 여력이 남아 있을 거다.
앞이 뻔히 보이는 지시에 부하들이 망설이자, 대주급 술사는 혀를 차며 부관의 뺨을 때렸다.
짝!
“저놈이 무섭다고 임무를 내팽개치면 살 수 있나? 눈앞에 드리운 공포에 처한 현실을 잊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살벌한 대주의 기세에 고개를 숙인 부관을 뒤로하고 대주는 손을 들어 올렸다.
“목표는 저 봉인 술식의 파훼다. 난생처음 보는 술법이지만, 어떤 술법이든 발동의 순간에 외부의 힘이 개입되면 실패하기 마련이다.”
설령 실패하게 만들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위력은 낮출 수 있을 거다.
위력만 줄일 수 있어도 저 안에 있는 괴물은 충분히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겠지.
“준비해라. 빠르게…….”
……치고 빠진다.
말을 끝내지 못한 대주의 눈이 부릅떠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는 부관의 머리였다.
“흐음.”
그리고 갈라지는 술법 너머로 미간을 찡그린 미녀가 창을 어깨에 걸친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늦게 나왔더니, 웬 쥐새끼들이 있네요.”
“고, 공……!”
……격!
촤라라락!
쇠사슬이 휘도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대주의 입에서 나오지 못한 말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순식간에 흩뿌려지는 피바람 속에서 서하영은 아직 몸과 머리가 분리되지 않은 술사들을 바라봤다.
“몇 명이나 살려서 가야 할까요?”
생과 죽음을 가르는 물음을 던지는 서하영의 눈동자는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메말라 있었다.
* * *
“혹멸마진(酷滅魔鎭).”
허공을 가득 메운 말뚝에서 뻗어 나온 냉기는 얼음이 되고, 얼음은 말뚝 사이의 빈 공간을 빠르게 채워 나갔다.
순식간에 완성되는 반구(半球) 형태의 감옥.
치밀어 오르는 냉기는 이곳이 바로 팔한지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독했고, 공간을 가득 메운 힘은 숨을 턱턱 막을 정도로 묵직했다.
순식간에 완성된 얼음의 감옥 속에서 설천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직까지도 공방을 주고받고 있는 사존과 철백을 눈에 담고.
“흡!”
주먹을 움켜쥔다.
순식간에 조여드는 얼음의 감옥이 단숨에 사존과 철백을 집어삼킨다.
치이이이익!!
얼음이 녹아내리며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바로 얼어붙어서 마치 눈처럼 흩날린다.
몽환적이기까지 한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 아름다움에 눈을 돌릴 여유가 있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철백!!”
설천위의 외침과 동시에 철백은 주먹을 폈다.
그리고 단숨에 사존의 팔을 붙잡는다.
붙잡힌 순간 사존이 손을 비틀어 팔을 빼냈지만, 철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따라붙었다.
파고든 철백의 공격을 받아 내며 사존이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그 몸을 옥죄기 시작한 얼음은 그런 사존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피하고, 막아 내도 끝내 붙잡힌다.
그리고.
꽈아악!
붙잡힌 순간, 끝이다.
인간의 힘을 초월한 철백의 악력은 사존의 힘으로도 뿌리칠 수 없었다.
피부를 휘감은 벼락이 철백의 손과 전신을 태울 기세로 뻗어 나갔지만, 철백은 이를 악물고 받아 냈다.
그리고.
“봉(封)!”
설천위가 주먹을 쥔 오른손을, 활짝 편 왼손 손바닥 위로 때리는 것과 동시에 1장(약 3m) 길이의 말뚝이 사존의 어깨를 꿰뚫었다.
철백에게 단단히 붙들려 움직이지 못하는 사존의 몸을 십수 개의 말뚝이 날아가 꽂힌다.
깡!
그 와중에 사존의 몸에 이미 박혀 있던 쇠말뚝이 설천위의 말뚝을 튕겨 내기도 했지만, 설천위는 신경 쓰지 않고 몰아붙였다.
사지를 꿰뚫고.
어깨와 복부까지 꿰뚫은 말뚝은 철백이 손을 놓아도 될 정도로 단단히 사존을 고정했다.
그리고.
“인(印)!”
말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조여 오는 감옥의 냉기와 만나서 투명한 얼음으로 사존을 휘감기 시작했다.
어느새 거리를 벌린 철백이 가볍게 호흡을 몰아쉬는 사이.
“후우…….”
봉인이 끝난 설천위는 손을 내리고 호흡을 골랐다.
“……더럽게 힘드네.”
멸(滅) 이상은 차라리 적으로 만나는 게 낫겠어.
제압하려고 하니까 진짜 더럽게 힘드네.
오랜만에 영력을 제대로 쥐어짰다는 느낌을 받으며, 설천위는 거친 호흡을 골랐다.
고작 몇 호흡 만에 영력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 설천위는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뭐야, 나보고 짬 때렸다고 투덜거리던 서하영 아니야?”
“흥……. 저도 할 일 했거든요?”
툭
“일단, 혹시 몰라서 세 명 정도 잡아 오긴 했어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서하영의 모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그녀가 던진 이들을 확인했다.
“술사네? 어떻게 찾았데?”
“늦게 나와서 신의 할아버지랑 돌아다니다가 찾았어요. 희미하게 소리가 나길래 그냥 창으로 그었는데, 목이 뎅강.”
“섬뜩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네.”
얘도 진짜 많이 변했어.
살생에 망설이던 순수한 무인이었는데……!
대부분의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설천위는 혀를 차며 포로들을 서하영에게 맡겼다.
“일단 주변 경계부터 해 줘. 이 이상 전력이 과투자됐을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까.”
철백과 서하영에게 상황 정리를 맡긴 설천위는 아직도 눈을 뜬 채 공허하게 꿈틀거리는 사존에게 다가갔다.
“나는 이쪽부터 해결할게.”
봉인이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진 않아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