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7화
496화-사존(邪尊) (1)
[자성영역(自省靈域)]
[연옥천려화산(煉獄千戾火山)]
대지가 후끈 달아오른다.
대지를 뚫고 스며들 듯 차오른 용암이 곳곳에 흐르고.
사방에서 솟구쳐 오른 현무암이 마치 화산처럼 용암을 뿜는다.
용암과 함께 흩뿌려진 회색의 화산재가 순식간에 안개처럼 차올랐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가죽신이 끈적하게 녹아내리고.
피부는 붉게 달아올라야 하는데…….
“좀 실망인데.”
멀쩡하기 그지없는 사존(邪尊)의 모습에 설천위는 혀를 찼다.
이지를 상실한 주제에 본능적으로 내공과 심력으로 심신을 지키고 있냐.
뽀글뽀글.
대지 위로 배어 나온 용암에서 거품이 터지는 순간.
설천위와 사존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고작 몇 걸음 떨어진 중간 지점에서 부딪친 순간.
콰가가가가각!!
설천위가 휘두르는 흑도가 붉은 용암을 뿌려 대며 붉은 구(球)를 만들어 냈다.
완성에 다다른 제공권(制空圈)이 만들어 낸 영역.
닿는 순간, 강철이 녹고 손발이 재가 되는 열풍의 영역이 단숨에 설천위를 뒤덮었다.
뚫을 수 없다.
누구라도 한번 보면 그리 생각할 끔찍한 그 힘 앞에서.
사존은 망설임 없이 손을 밀어 넣었다.
콰가가가각!
손을 휘감은 벼락이 팔을 뒤덮는 용암을 찢어발긴다.
압도적인 물량으로 쏟아지는 용암의 기세에 결국 벼락조차 밀려나서 튕겨 나갔지만, 사존에겐 두 팔이 있었다.
하나가 튕겨 나오면, 나머지 하나가.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른다.
사존의 양손이 설천위가 만들어 낸 영역을 찢어발기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튕겨 나온 벼락이 현무암 바위를 부수고.
흩뿌려진 용암이 대지를 녹이다가 굳어서 돌이 된다.
과연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 맞는 건지 절로 의문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
막아 내려는 자와 뚫으려는 자.
그 속에서 우위에 선 건.
‘미친 괴물 영감탱이……!’
사존이었다.
임기응변이 부족한 설천위에게 스승들이 내린 특단의 조치.
제공권(制空圈).
허와 실.
상대의 변화를 모조리 읽어 낼 능력이 없다면, 전부 막거나 피하면 된다.
무력은 조잡한 주제에 자기보다 강한 존재와 계속 싸우는 설천위를 위해 그의 스승들은 방어에 집중하게 했다.
설천위가 사용하는 술법들 중에 구(球)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 많은 것도 이런 무의식이 반영된 탓이 컸다.
여하튼.
설천위에게 한번 만들어 낸 제공권(制空圈)은 절대로 뚫려선 안 되는 불가침의 영역이어야 한다.
부족한 자질로 진흙탕 싸움에 돌입하게 되면 밀릴 게 뻔하니까.
그런 불가침의 영역이 지금 밀리고 있다.
그것도 기이한 수법에 당해 밀리는 것이 아니라.
‘더럽게 강하네……!’
단순하게 속도와 힘에 밀려서 무너지고 있었다.
사존의 손이 영역을 파고든 순간, 설천위는 미친 듯이 참격을 날리고 있지만 사존의 손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흘리거나 쳐 냈다.
영역(靈域)을 전개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저 손이 설천위의 목과 심장을 꿰뚫었을 거다.
이쪽이 만들어 낸 열기가 단순히 육체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혼까지 침범했기에 힘으로 밀어붙이던 손이 영력에 집어삼켜지기 전에 빠져서 여태까지 버티고 있는 거다.
그리고 이건 반대로 말하면, 지금의 사존은 영력(靈力)조차 느끼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혼을 지키고 있다는 소리다.
이지를 상실한 주제에 본능만으로 할 줄 아는 게 왜 이렇게 많은 거냐고.
더 무서운 건 설천위가 확실히 열세에 몰려 있다는 점이다.
영력을 어찌하지 못해 빠지던 사존의 손이 서서히 영력에 적응해 스스로 영력을 두르고 점점 더 깊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50초식 안에 뚫리고 만다.
그런 확신을 얻은 설천위는 이를 악물었다.
“더럽게 쓸모없네!”
[뭐, 뭐라는 거냐!]
발끈하는 흑암지규군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설천위는 힘을 터트렸다.
“흡!”
힘을 실은 참격과 함께 바닥에서 솟구친 용암이 사존을 뒤덮었다.
동시에 설천위가 뒤로 빠지려는 그 순간.
푹!
“아오!”
어깨를 꿰뚫는 일격에 설천위는 분노를 토해 내며 거리를 벌렸다.
솟구치는 용암 사이를 뚫고 빠져나온 손.
붉은 피를 머금은 그 손은 영력을 두르고 있었다.
사존이 끝내 영력을 다루기 시작한 거다.
“후우.”
그렇기에 설천위는 빠르게 인정했다.
“이건 못 이기네.”
이건 못 이긴다고.
현경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사존(邪尊)이라는 이름값은 확실히 대단했다.
무(武)로는 절대로 그를 이길 수 없다.
일 년간 애들을 수련시키면서 나름 스스로도 열심히 갈고닦았는데 역시 턱도 없었다.
현경(玄境).
아득한 경지에 도달한 자들.
무(武)의 너머 어딘가에 도착한 괴물들.
스스로를 담아낸 화강(化罡)을 넘어.
스스로의 의지를 담아낸 심강(心罡).
다른 이름으로 심검(心劍)이라는 것을 이뤄 낸 괴물들.
그런 괴물들을 상대로 한참 부족한 무공으로 덤비는 건 역시 무모했다.
“간단한 테스트는 여기까지 하고.”
아마 다른 녀석들 상대로는 이 전법이 꽤 통할 거다.
흑암지규군은 머저리처럼 죽었지만, 그 능력 자체는 파괴의 화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화산(火山)을 뿌리로 두고 있으니까.
화산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무인(武人)은 강하지.
다른 녀석들한테는 무조건 통할 거다.
다만.
“화산(火山)보다는 아직 약하네.”
흑도를 집어던진 설천위는 과감하게 웃통을 벗었다.
근육을 드러내고, 기이한 감각에 경계심을 끌어올린 사존과 마주했다.
“영감, 화산(火山)을 이겨 본 적 있어요?”
입꼬리를 비튼 설천위는 뒤로 당긴 주먹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소리쳤다.
“올바르지 못한 해병은 해군에 필요 없다, 이 영감탱이야!!”
[대분화(大噴火)]
설천위의 주먹에서 솟구친 용암이 단숨에 하늘로 치솟는다.
순식간에 하늘을 가득 메운 용암.
그리고.
퍼걱!
사존의 주먹이 꿰뚫은 설천위의 몸이 용암이 되어 흘러내렸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사존은 즉시 손을 털어 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용암.
회색의 화산재를 뚫고 우박처럼 떨어지는 용암은 가히 절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장대한 모습이었다.
물론.
콰아아앙!!
그 결과는 절경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지만.
땅에 처박힌 용암이 대지를 부수고, 나무를 불태웠다.
단단하게 땅에 박혀 있던 바위가 녹아내리고.
솟구쳤던 현무암들은 화산이라도 된 것처럼 더욱 강렬하게 용암과 화산재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대지는 용암으로 차오르고, 곳곳에 쓰러진 나무와 풀이 타올라서 불이 일어난다.
지옥을 그대로 현세에 구현해 낸 것 같은 풍경.
차오르는 용암에 즉시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던 사존은 끊임없이 덮쳐 오는 용암의 공세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채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런 느낌인가.”
어느새 발까지 차오른 용암에 사존이 기어코 발에 내공을 둘러 용암 위에 올라선 그때.
화산이 터져 나오는 현무암에 모습을 드러낸 설천위가 턱을 괸 채 한쪽 다리를 까딱였다.
왼발은 늘어트려 까딱거리고,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 위에 걸쳐 그 위에 팔을 올려서 턱을 괸 자세.
지금이 전투 중이라는 사실을 까먹은 듯한 여유 만만한 모습에 기가 찰 노릇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설천위를 상대하고 있는 사존에겐 그런 설천위를 비난할 이성이 없었다.
그리고.
“나쁘지 않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설천위가 웃으며 손을 까딱이는 것과 동시에 하늘과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용암의 우박은 더더욱 거세지고.
바닥에서 흐르는 용암이 솟구친다.
곳곳에 튀어나온 현무암에서 뿜어지는 화산재 속에는 어느새 붉게 달아오른 바위가 뒤섞여 사존을 향해 날아갔다.
화산(火山)이라는 인류의 대재앙(大災殃)이 오로지 한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 움직인다.
쏟아지는 용암에 사존이 몸에 두른 벼락이 깨지고, 몸을 덮고 있던 조잡한 의복은 불타서 재가 돼 버렸다.
화상을 입어 몸 곳곳이 붉게 달아오르고, 끊임없이 치솟는 열풍은 그 몸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이런 좋은 능력을 가지고 그렇게 싸운 거냐?”
[네놈이…….]
괴물인 거다.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흑암지규군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거? 이해할 수 있다.
괴물 같은 놈이니까.
자신이 굴복한 시점에서 자신의 힘을 어느 정도 구현하는 거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아니다.
자신을 불러내지도 않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런 광경을 만들어 낸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재능을 가진 놈이 태어난 거지?
아니,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가 있나?
영력을 제어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설천위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흑암지규군은 마른침을 삼켰다.
단순히 영적인 능력이 강하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인간이 품었다고 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영력.
그리고 그 영력을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게 해 주는 강철의 정신력.
도저히 이십 대 초반의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아니, 이십 대가 아니라 아흔 살을 먹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간 수명의 끝자락에 도달해도 불가능한 수준의 힘을 대체 어떻게……?
설천위에게 굴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내면의 힘을 전부 보지 못한 흑암지규군이 혼란에 휩싸여 머리를 싸매는 사이.
사존을 몰아붙이던 설천위의 얼굴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적응하고 있군.’
살을 녹여 버리는 열풍.
폐를 불사르는 화산재.
머리통을 깨부수는 암재.
머리 위로 떨어지는 암재는 무인인 만큼 쳐 낼 수 있다고 쳐도, 바닥에 흐르는 용암과 호흡기를 파고드는 화산재는 아무리 무인이라고 해도 결코 피할 수 없었다.
호흡을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열기를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심지어 영력으로 만들어 낸 용암이다.
실제 용암보다 더 뜨겁고, 주력(呪力)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힘이 깃들어 있는 열기인데.
그것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니.
“맹주도 이 정도인가.”
진짜 쉽게 볼 수가 없네.
오존(五尊)이라고 따로 불릴 만한 이유가 있었어.
혀를 찬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봉인(封印)도 힘들 것 같은데…….”
영적인 존재가 섞였으니, 그나마 가능성은 있겠네.
허공에 흑관으로 만든 말뚝을 만들어 내며 설천위는 가볍게 도약했다.
단숨에 현무암에서 내려온 설천위는 용암 속에서 또렷한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존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영감님, 슬슬 잘 시간이에요.”
이 수면제는 조금 매울 겁니다.
* * *
“어리석구나.”
설천위와 사존이 싸우는 장소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
용암이 치솟는 광경을 겨우 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의 먼 거리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비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너라도 그건 무리다.”
흑암지규군을 대체 어떻게 꺾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 힘을 사용하는 설천위라도 지금의 사존을 봉인할 순 없다.
육도(六道)의 한 축.
무려 지옥도의 파편을 쑤셔 박았다.
그것도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수백 명의 제물을 이용한 방법으로.
지옥도의 힘에, 수백의 원념과 생명력을 이용해 만들어 낸 괴물.
결국 우려대로 정신이 무너져 이지를 상실한 폐인이 돼 버렸지만, 그 힘만큼은 온전했다.
아니, 영적인 힘을 다루기 시작한 시점에서 더 강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거기다.
“슬슬 시작이군요.”
지옥도(地獄道).
육도에서 가장 거대한 힘이자 이 무림에 가장 많이 흩뿌려진 힘.
언여휘가 모으고 있는 아귀도나 축생도와는 결이 다르다.
지옥(地獄).
그건 저승.
연옥의 너머 그 아래에 존재하는 곳.
죄를 심판받는 곳임과 동시에, 죄를 지은 이들이 모인 곳.
쿵! 쿵! 쿵!
그 힘은 지은 죄에 따라 다르니.
비후가 그토록 사존을 탐냈던 이유가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초열지옥(焦熱地獄)]
사존이 쌓아 온 업(業).
그것이 지옥도의 힘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