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3화
492화-영약 구하기 (1)
패력단과 흑룡단 사이의 술사 대항전이 끝나고, 무림맹에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흑룡단의 부단주, 봤나?”
“봤지.”
“몸놀림이 보통이 아니던데…….”
“무인 출신이라고 했으니, 그래서 그런 것 아니겠나?”
“그게 또 아니라고 하더군. 백화단의 술사랑 친한 녀석이 있는데, 백화단 술사들도 근접 전투 실력이 상당히 늘었다더군.”
전투가 가능한 술사들.
사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런 관심도 없었을 거다.
오히려 좋아했겠지.
이제 술사들이 임무 나가는데 굳이 호위로 안 따라가도 될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많이 달라졌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
만귀단의 배신으로 튀어나온 괴물은 무인들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영력 따윈 없어도 보고 들을 수 있는 존재.
그리고 그 강한 맹주조차 막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존재.
그런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선 술사가 필요한데, 그 반대는?
원래라면 술사를 지키기 위해 무인이 필요했지만, 술사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된다면?
굳이 무인이랑 같이 다닐 필요가 있나?
자기들끼리 뭉쳐 다니는 게 더 효율적일 텐데?
균형이 깨졌다.
아쉬운 것은 무인들이 됐고, 술사들은 제 살길을 찾아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변화가 갑자기 무림맹을 바꾸진 못했다.
일단 술사의 숫자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까.
무림맹 본단에 있는 술사의 숫자는 만귀단과 백화단을 합쳐도 백 명 남짓.
만귀단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뒤라는 사실을 고려해도 애초에 두 단을 합쳐 술사의 숫자는 이백을 넘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도 그럴 것이, 술사는 애초에 귀한 존재인 데다가 무림맹으로 들어오는 의뢰 자체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술사의 도움이 필요한, 불가해의 영역에 있는 일이 벌어지면 대부분의 서민들은 근처에 있는 절이나 도관을 찾아가지 무림맹을 찾진 않는다.
무림맹은 무림인들이 사는, 자신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화단과 만귀단이 받는 임무는 고위 관직에 있는 이들의 의뢰나 무림 각지를 떠도는 정보원들의 정보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리 많지 않은 임무.
그에 따라 적당하게 유지되는 술사의 숫자.
애초에 재능을 가진 이를 찾는 것도, 키우는 것도 힘들기에 술사의 숫자는 크게 늘어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렇기에 이 큰 무림맹에서 일부에 지나지 않는 술사들의 변화는 무림맹 전체를 바꾸는 변화로 이어지진 못했다.
그래.
술사들의 변화는 그랬다.
* * *
“빌어먹을!”
“조용.”
악을 쓰는 이의 목을 밟고 있는 발에 좀 더 힘을 가한 소윤혜는 담담한 눈빛으로 방 안을 훑었다.
“꽤나 넉넉하게 살고 있군. 중급의 대를 운영하는 대주라곤 믿기 힘든 풍족함이야.”
가구의 수준, 장식품의 종류 등.
일반적인 대주의 삶의 수준을 너무 노골적으로 벗어나 있었다.
“이런 월권을 패력단에서 가만히 두고 볼 거라고 생각하는가!”
바닥에 얼굴이 짓눌린 채 으르렁거리는 대주의 반항에 소윤혜는 어깨를 으쓱였다.
“‘흑룡단(黑龍團)과 흑룡단주(黑龍團主)에게 구단(九團)의 감찰 권한과 현행범에 한해서 즉결 처분권을 부여한다.’ 무려 맹주령으로 허가된 권한이죠.”
선검단의 부단주 정백을 단죄할 때, 맹주가 무려 맹주령으로 선언했던 권한이다.
꽤나 한참 전의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권한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감찰 중이니 얌전히 기다리도록.”
“이건 횡포다!!”
“범죄자는 자신을 수색하는 모든 일을 횡포라고 말하는 법이지.”
발악하는 대주를 비웃으며 소윤혜는 부하들을 부려서 문서들을 압수했다.
튼튼한 금고는 직접 열었다.
잠금장치 따위야 베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탈탈 털어 낸 소윤혜는 허망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대주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웃었다.
“뭐, 죄가 없으면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은 해 줄 테니 흑룡단으로 청구하도록.”
죄가 없다면 말이지.
* * *
“이게 맞아요?”
“뭐가?”
흑룡단주의 집무실.
서류 업무를 보는 이들 사이에서 느긋하게 최종 결재만 하고 있던 설천위는 서하영의 한숨 섞인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이 감찰이요. 너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거 아니에요? 반발이 엄청날 텐데?”
흑룡단에 대한 반발뿐만이 아니었다.
흑룡단에 그런 권한을 쥐여 준 무림맹주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터.
당장 들리는 소문만 해도 무림맹주에게 쏟아지는 항의의 숫자가 장난이 아니라고 하니 이런 설천위의 행보를 맹주가 기꺼워할 리가 없었다.
무림의 주력이 되는 오대세가와 구파일방과 썩 좋지 못한 사이가 된 지금, 무림맹주마저 등을 돌리면 좋을 게 없었다.
서하영의 걱정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맹주 그 양반도 짜증 좀 나겠지?”
“알면서 그래요?”
“나만 욕먹고 장수할 순 없잖아. 급한 건 그 양반인데. 그 양반도 욕 좀 먹고 장수 좀 해야지.”
“지금 농담이 나와요?”
“진심인데…….”
눈을 부라리는 서하영에게서 슬쩍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구석에서 구시렁거리고 있는 연화에게 다가갔다.
“뭐 해?”
“서류 업무요.”
“……그게?”
아무리 봐도 낙서로 보이는데?
올라온 서류에 대충 휘갈기고 있는 꼴에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멀쩡한데.’
더럽게 악필이라 그렇지, 업무 자체는 꽤나 성실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이게 연화의 장점이긴 하지.
음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는 그때.
“돌아왔습니다.”
“오, 왔어요?”
오늘 암은단의 정보에 걸린 대 하나를 털고 돌아온 소윤혜는 담담한 걸음으로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사흘 걸러 하나씩 나오냐…….”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두들기는 소윤혜의 모습은 어려 보이는 그 외견과는 썩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절절해서 집무실에 있던 이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왜?”
모두가 웃는 와중에 혼자 웃지 못하는 소윤혜가 미간을 찡그렸지만, 설천위는 대충 손을 흔들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누님, 일은 어때요?”
“……한숨만 나온다.”
혈교나 사혈천과의 연결?
그런 무거운 주제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단순 횡령, 뇌물 수수 등등.
그냥 기본적인 불법 정황을 찾는 것만으로 들쑤셔서 매타작을 할 수 있는 곳들이 널리고 널렸다.
그런 놈들이랑 한솥밥 먹으면서 일을 해야 한다니.
절로 나오는 한숨에 소윤혜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우리 집의 가업을 이을 때가 된 건가?”
어허, 무슨 섬뜩한 소리를.
소윤혜의 가문이 이어 가던 가업은 처형인.
사람의 목을 숭덩숭덩 썰던 집안이다.
“다 죽이면 나중에 전장에 누가 나가서 싸워요?”
“전장에서 위험한 건 위협적인 적보다 무능한 아군이라며?”
“그렇죠.”
“이건 무능한 수준을 넘어 유해한 수준인데, 쳐내고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니야?”
회의감이 짙게 밴 소윤혜의 대답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맞는 말이에요. 근데, 그 치우는 방식이 좀 다른 것뿐이지.”
“치우는 방식?”
“사람이 꼭 목이 베어야 죽는 건 아니란 말씀.”
* * *
흑룡단이 날뛰기 시작했다.
감찰권을 이용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뇌물을 받고 사람을 고용한 대주들을 끌고 갔고.
공금을 횡령한 이들 또한 줄줄이 끌려갔다.
반항?
할 수 있을 리가.
삼귀(三鬼)라 불리는 흑룡단의 세 고수가 진짜 귀신처럼 쳐들어와서 끌고 가는데 반항할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단주급도 잘못했다간 그대로 끌려갈 전력인데, 대주 정도의 무력으로 버틸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끌려간 다음도 문제였다.
본래라면 적당히 기름칠한 법관들이 설렁설렁 풀어줬을 텐데, 암은단이 움직이면서 그게 불가능해졌다.
증거를 들고 와서 처벌을 요구하는데 뻔뻔하게 무시한다?
그대로 그 법관을 향한 감찰까지 실행됐다.
막아?
막을 수 있을 리가.
흑룡단은 감찰 권한은 물론이고, 현행범에 한해서 즉결심판을 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갖고 있다.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실질적인 무력까지 있으니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맹주가 맹주령을 사용해 이 권한을 줬을 때만 해도, 고작해야 흑룡단주 혼자서 뭘 하겠냐 생각하고 넘어갔던 이들은 이제 와서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이 흐르고.
육 개월이 지나 일 년이 흘렀을 때.
“슬슬 움직이나?”
어느 정도 맑아진 연못 위에서 흑룡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 * *
“요즘 분위기가 장난 아니에요.”
“뭐가?”
“이쪽이 조금만 틈을 보이면 물어뜯을 기세?”
“뭐 그렇겠지.”
서류를 정리하던 설천위는 서하영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물고 뜯었으니까.”
진짜 미친 듯이 물어뜯었다.
이젠 거리만 돌아다녀도 사람들이 피한다고 소윤혜가 하소연할 정도니 뭐 말 다 했지.
뭐, 그렇게 물어뜯은 보람이 이제 슬슬 나타나고 있긴 했다.
죄를 지으면 흑룡이 찾아간다.
그런 말이 나돌고 있을 정도니까.
이제 진짜 해먹은 놈들은 소수밖에 남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뒷돈을 챙겨야겠다는 사고를 가진 썩은 놈들이랑.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다른 놈들과 내통을 이어 가야겠다는 간첩 놈들.
더 은밀하게, 더 치밀하게 바뀌겠지만.
“이제 슬슬 제대로 된 놈들이 걸릴 때가 됐지.”
연못에 흙탕물이 상당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게 휘저어 만들어 낸 흙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으면 보일 거다.
저 진흙 밑에서 움직이고 있는 진짜들이.
고작해야 뒷돈 조금 받고, 공금이나 빼돌리던 놈들 말고.
돈을 향한 욕심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노리고 꿈틀거리는 놈들.
그런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거다.
그러니.
“슬슬 준비해야겠지.”
때가 됐다.
1년.
길게 기다렸다.
게임 속 흐름을 생각하면 본격적으로 개입해야 할 굵직굵직한 일들이 일어나기까진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다.
그러니 그 전에 해야 할 일을 끝내는 게 맞겠지.
“부단주.”
“네?”
“우리 흑룡단의 신조가 뭔지 알아?”
“……해악의 제거?”
“아니야. 그건 정파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신조(信條)란 굳게 믿어 지키는 생각.
흑룡단에서 굳게 믿고 지키는 생각이란 게 뭘까?
그런 의문을 품고 서하영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흑룡단의 간부급은 전원 화경 이상의 고수로 구성된다.”
“……네?”
그게 뭔 개소리야?
화경이 무슨 동네 개 이름도 아니고.
당장 자신의 아버지가 화경급 고수고, 그 아버지 밑에서 구르는 오빠들은 전부 절정에서 초절정 수준인데.
이게 무슨…….
“거절은 거절한다.”
“아니, 거절이고 뭐고 그게 가능하면 제가 이러고 있지 않죠!”
“흐하하하하! 철백!”
“준비됐다.”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철백이 휘리릭 날아와 서하영을 들어서 자신의 옆구리에 꼈다.
“이게 뭔?!”
“그럼, 무해 대사.”
“네.”
“부탁할게요. 덤비는 녀석들은 염주로 뚝배기를 깨 주세요.”
“아미타불……. 단주님은 제가 불자라는 사실을 자꾸 잊는 것 같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무해를 뒤로하고 설천위는 집무실을 나섰다.
“아니, 이게 뭔데요!”
“뭐긴, 수행 길에 오르는 거지.”
“네?”
당황하는 서하영을 보며, 설천위는 씨익 입꼬리를 비틀었다.
“옛 생각도 되새길 겸 셋이서 임무 하나 뚝딱 처리하러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