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7화
486화-술사 대항전 (2)
“그래서 술사전을 준비하겠다는 거니?”
“네. 단주 놈……. 아니, 단주님이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준비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백화단주의 집무실.
찾아온 서하영의 한탄에 성화린은 작게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잘 알고 있구나.”
“몇 년을 이어 온 사이인데요.”
“후후.”
그리 길게 알고 지내지도 않았을 텐데?
하긴 그만큼 알찬 시간이긴 했지.
설천위가 혼자 난리를 워낙 많이 쳐서 그렇지, 서하영만 해도 설천위와 몇 번이나 사선을 함께 넘은 사이다.
서로 잘 알 수밖에.
“그래도 전 유 언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걔는 조금 얘기가 다르잖니.”
너는 동료고, 그 아이는 연인이잖니.
어깨를 으쓱이는 서하영을 보며 피식 웃은 성화린은 그녀를 놀렸다.
“철 소협에 대해선 네가 또 잘 알지 않니?”
“……그야 그렇죠.”
“부끄러워하기는.”
볼을 붉히는 서하영을 보며 웃음을 터트린 성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와줄게. 애초에 설 동생과 얘기가 끝난 부분이기도 하고.”
조금 이르긴 하지만.
애초에 합동훈련은 계획됐던 일이다.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 보완해야 하지 않겠나.
“다만, 아무리 그래도 대항전에 이기는 건 힘들 거야.”
성화린은 냉정했다.
합동훈련은 훈련이고, 준비도 준비지만.
애초에 지금 시기에 만귀단의 술사들이 다른 술사들과 대항전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술사들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영역 싸움이야.”
무인의 전투와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이 쌓아 온 것을 얼마나 잘 펼치느냐.
그것이 술사 간 전투의 핵심이다.
물론, 그렇다고 술사들이 하나같이 자성영역을 사용해 싸우는 건 아니었다.
자성영역을 쓰는 술사는 술사 중에서도 극소수.
적어도 단주급은 되어야 쓸 수 있다.
애초에 만귀단이나 백화단의 단주가 될 수 있는 조건이 자성영역의 유무였으니까.
무림인의 화경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조금 더 난이도가 높겠지만.
아무튼.
“만귀단의 전투는 병력을 이용한 땅따먹기가 기본이야.”
그리고 그 땅따먹기의 난이도는 생각보다 높다.
“만귀단의 술사 대부분이 하나의 식령만을 다루기에 2인 1조가 기본인 이유가 여기에 있지.”
한쪽은 땅을 지키고, 한쪽은 공격을 한다.
이게 만귀단의 기본 전략이다.
몇몇 대주급 이상의 술사들은 혼자서 두 마리 이상의 식령을 동시에 다루니까 혼자 움직이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개인전은 일단 무리야.”
상대가 몇이나 되는 술사를 준비했는지 몰라도 지금 만귀단에 남은 대주는 셋뿐이다.
그중 하나는 이번 사태에 휘말려 아예 술법의 사용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고, 외부 임무를 나갔던 둘은 그나마 멀쩡하지만 정신적 충격이 없진 않았다.
부단주가 배신해 단주가 죽고 단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는데, 어찌 정신이 멀쩡할 수가 있겠는가?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 절반이 죽었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상태다.
그런 이들이 개인전에 나간다고?
상대가 술사를 몇이나 준비했고 또 어떤 수준으로 준비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만치 자신 있는 태도로 판단해 볼 때 지금 만귀단의 대주들로는 이길 확률이 상당히 낮았다.
개인전을 치를 역량이 부족한 일반 단원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단체전은?
차라리 이쪽이 가능성이 있긴 하다.
만귀단은 앞서 말했든 2인 1조로 움직이는 게 기본이다.
즉, 애초에 개인전이 아닌 단체전에 특화된 이들이란 소리다.
식령을 활용한 전술 전략이 주력이니 차라리 단체전이 나을 거다.
물론.
“식령이 하나라도 폭주하면 자멸할 테니 단체전도 썩 승산이 높다곤 못 하겠네.”
단체전이면 최소 10인 이상 규모를 가질 텐데, 일반 단원의 포함은 필수다.
약해서 제물에서도 배제된 이들 중에서 이번 사태를 겪고 정신을 온전히 다잡을 수 있는 이가 대체 몇이나 될까.
“그저 한숨만 나오네요…….”
성화린의 설명에 한숨을 푹푹 내쉰 서하영은 흐물흐물한 몸짓으로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할 겁니다.”
“설 동생이?”
“우리 단주는 그런 인간이니까요.”
마치 뭔가에 쫓기듯이 준비를 하는 인간이다.
지독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고, 지독할 정도로 부하들을 챙겼다.
챙긴다는 의미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그 인간은 돌아오면 무조건 받아들일 테니,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죠.”
“그럼, 차라리 단체전으로 몰아가.”
“단체전으로요?”
“그게 그나마 승산이 높아.”
만귀단의 장점을 하나라도 더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이 그나마 승산이 높겠지.
“일단, 설 동생이 돌아오기 전까진 내가 수련을 봐줄게. 최대한 심신을 안정시키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수련 방식으로 가야겠어.”
* * *
“……대항전이라니.”
한숨을 내쉰 만귀단의 대주 중 하나인 종수는 부적을 다듬었다.
“피할 수 없어. 우리를 거둬 준 흑룡단주님을 위해서라도 해야 돼.”
그런 종수의 말에 답한 건 반대쪽에 앉아서 나무를 깎던 여인이었다.
종수와 마찬가지로 만귀단의 대주 중 하나인 각려다.
흑룡단 소속이 되며 검은색으로 바꾼 도복 자락을 접으며 각려는 신중하게 나무를 조각해 나갔다.
“우리의 필요성을 증명하기도 해야 하고.”
“……천우, 저놈은 왜 아직도 안 깨어나고 있는 건지.”
필요성의 증명이란 말에 한숨을 내쉰 종수는 저쪽 침대에 누워 있는 동기를 바라봤다.
부단주의 배신으로 수많은 동료들이 제물로 빨려 들어갔을 때.
아랫사람 챙기기를 좋아하던 천우는 신입들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한 걸 느낀 천우는 적의 목표가 되지도 않은 부하들을 보호하다가 저 꼴이 됐다.
운 좋게 술법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던 덕에 자신의 몸만 지켰다면 충분히 술법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에휴.”
목표가 되지도 않은 신입들을 챙기다가 벗어나지 못하고 죽기 직전까지 힘이 빨렸다.
그래도 대주들 중에선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임을 증명하듯 간신히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머저리 같은 동기를 위해서라도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만약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판단돼 쫓겨난다면 천우의 치료는 어떻게 되겠는가.
완전히 버려지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치료만 이루어질 테고, 그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죽진 않더라도 최소한 폐인이 될 거다.
비싸고 좋은 약재를 쏟아부어야 겨우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텐데…….
“단체전은 가능하겠지?”
“문제는 단체전으로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인원이 부족하다는 점이지만.”
부단주가 찾아와 자신들의 의견까지 듣고 단체전으로 대항전을 치르겠다고 장담하고 떠났다.
높은 확률로 대항전은 단체전이 될 거다.
문제는 그나마 유리한 단체전이 되더라도 사람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싸움이 가능한 애들이 몇이나 돼?”
“우리 애들 중에도 정신이 흔들린 애들이 꽤 있어. 3개월이면 대부분 수습할 순 있겠지만…….”
“후우, 그래도 힘들겠지?”
패력단에서 이를 갈고 준비한 술사들이다.
분명 실력에 상당히 자신 있는 이들로만 준비했을 터.
“둘이서 어떻게든 해 보는 수밖에 없겠어.”
“단주님이 새로운 부단주를 데려온다고 했잖아.”
새로운 부단주.
종수의 말에 각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무려 그 흑룡단주가 직접 영입하기 위해 움직인 인재다.
상당히 뛰어난 술사임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좋아. 준비하자.”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희망을 품은 각려는 자신이 깎던 조각을 품에 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들의 정신부터 가다듬자.”
명상을 거듭하고 심신의 안정을 주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을 거다.
그래.
심신을 안정시키면.
과거의 악몽 정도는 지우고 능히 다시 일어설 수 있을…….
“……하?”
……텐데?
지금 이게 뭔 상황이지?
* * *
“안녕하신가요, 술사 여러분?”
대항전 소식을 서하영에게 전해 들은 것은 백화단주만이 아니었다.
현재 흑룡단에서 가장 술법의 조예가 깊은 인물.
요려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그렇기에.
“마침 잘됐네요. 슬슬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술사들이 명상을 하던 수련장에 들이닥친 요려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단주님의 명령입니다. 전원 일어나세요.”
단주님의 명령이라니 일단 일어나긴 했다.
단주님의 식령이 하는 말이니 거짓일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뒤에 있는 사람들은 뭐지?’
그…… 흑룡단의 청혈대? 그 사람들 같은데?
전부는 아니고 다섯 명 정도인데…….
왜 저렇게 안색이…….
‘노랗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술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련장을 나가는 요려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럼 하던 수련을 이어서 하도록 하죠.”
도복을 입고 있던 술사들을 무복으로 환복시킨 요려는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손에 채찍을 들었다.
“뛰세요.”
“……예?”
“뛰시라고요. 연무장 열 바퀴. 선착순이에요.”
그게 지금 무슨…….
갑작스러운 지시에 당황한 술사들이 얼타는 사이.
안색이 노랗던 이들이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달리지 않으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는 것처럼.
그리고.
쫙!
“어허! 뛰세요!”
멍때리고 있던, 살집이 두툼한 술사의 등을 채찍으로 후려친 요려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뛰어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우리 주인님의 신조예요!”
“아, 아무리 그래도 채찍질은!”
“혓바닥이 기네요!”
반항하는 술사의 등을 다시 쫙 소리 나게 후려친 요려는 채찍을 허공에 휘두르며 웃었다.
“몸은 상하지 않으니, 걱정 말고 맞으세요.”
영력으로 이루어진 채찍.
설천위의 전령으로만 쓰여서 많은 이들이 착각하지만, 요려는 천희만락궁에서 무려 소궁주로 있던 인물이다.
“뛰어!!”
그리고 악의 조직 출신답게 요려는 사람을 괴롭히는 데 아주 특출한 능력을 보였다.
* * *
“이, 이게 무슨…….”
부하들을 다독이고 앞으로 다가올 대항전을 준비하기 위해 각오를 다지고 밖으로 나온 종수와 각려는 부하들이 있을 수련장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놀라 어버버거렸다.
무인들이 훈련하는 연무장.
그곳에서 침, 눈물, 콧물을 전부 흘리며 달리고 있는 건 자신의 부하들이 아닌가.
거기에 이상하게도 백화단의 술사들까지 껴 있었다.
“어머, 오셨네요.”
“배, 백화단주님!”
그리고 뒤늦게 자신들의 근처에 있던 성화린을 발견한 종수와 각려는 놀라서 허리를 숙였다.
“백화단주님을 뵙습니다!”
“됐어요. 가볍게 온 것이니 그리 딱딱하게 인사할 필요 없어요.”
손을 가볍게 흔들며 성화린은 죽어라 달리고 있는 만귀단 출신의 술사들을 바라봤다.
“과연 좋은 훈련이네요.”
“예?”
이게요?
이게 좋은 훈련이라고요?
“체력 단련은 술사들에게도 중요하고 꼭 필요한 수련이죠.”
반사적으로 나온 종수의 말에 대답한 성화린은 빙긋 웃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술사들이 체력 단련을 하지 않는 건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죠.”
“그건…….”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종수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랬다.
술법을 갈고닦기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대다수의 술사들은 체력 단련을 피했다.
그도 그럴 게 더럽게 힘든 게 체력 단련이지 않은가.
그것도 꾸준히 해야 의미가 있는, 장기간 이어지는 자학(自虐).
술사들은 체력 단련을 그리 불렀다.
앉아서 다섯 시진(약 열 시간) 동안 부적을 그리고 말지, 체력 단련은 하기 싫다는 술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저야 술사들의 성향을 알고, 저 자신도 그렇게 체력 단련에 힘을 쏟지 않았으니 강제하진 않았지만.”
흑룡단주라면 어떨까?
술사로도 초일류에 오른 걸 넘어서서 무인으로도 이 무림에 명성을 떨칠 정도로 단련한 인물이 체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아…….”
각려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지금 요려가 술사들을 굴리기 시작한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각려를 보며 빙긋 웃은 성화린이 물었다.
“뭐 해요?”
“……예?”
“가서 뛰지 않고.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야죠?”
손끝으로 구석에 있는 무복을 가리키며 웃는 성화린의 모습에 각려와 종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일까.
왜 아직도 누워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료가 부러워지는 걸까.
“어서요!”
재촉하는 성화린의 목소리에 각려와 종수의 얼굴은 더욱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