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6화
485화-술사 대항전 (1)
“잠깐, 잠깐만요. 술법으로 대결하자고 했다고요? 패력단이?”
“그래.”
당황한 서하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철백은 문을 닫고 들어와 앉았다.
“잠깐만요. 그럼 왜 공문을 안 보내고 그걸 철 가가가 전해 준 거죠?”
“공문을 보내기 전에 먼저 규칙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더군.”
“……그럼?”
“패력단의 부단주가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과연.”
고개를 끄덕인 서하영은 자연스럽게 기막을 펼쳤다.
놀랄 정도로 부드러운 기(氣)의 운용에 무해가 놀라는 것도 잠시, 무해 또한 자리를 옮겨 서하영과 철백 쪽으로 다가갔다.
“술법을 이용한 술사의 대련. 심판은 외부의 인물을 초청하자더군.”
“백화단주님은 우리 편이니 제외하겠다, 이건가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인 철백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패력단에 술사가 있느냐고 물으니 평소에도 술법에 대응하기 위해 따로 술사를 두고 있었다더군.”
“거짓인지 진짜인지 모를 얘기네요.”
“여하튼, 그렇게 외부에서 받아들인 술사들이 있으니 만귀단의 힘을 보고 싶다는 소리야.”
“후우, 당연히 단주의 출전은 불가능하고요?”
“그래.”
철백에게 설명을 들을수록 점점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서하영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쪼잔하게 나오네요.”
만귀단은 저번 사건으로 단주와 부단주를 잃은 건 물론이고 실력 있던 술사들을 다수 잃었다.
살아남은 건 제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하급 술사들과 외부로 임무를 나가 있던 소수의 대주급들뿐.
출전할 수 있는 대주급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적이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시비를 걸어올 정도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쪽의 상황을 뻔히 알고 있을 테니 결코 적은 판수로 대항전을 진행하지 않을 거다.
인력이 부족한 이쪽의 빈틈을 어떻게든 찌르려고 하겠지.
그렇다고 다인전으로 가면?
당연히 밀린다.
개인전도 실력자가 부족해서 밀릴 판국인데, 다인전이라고 다르겠는가.
“거절하면 거절한 대로 동네방네 떠들고, 수락하면 대놓고 찍어 누르겠다는 속셈이겠네요.”
무려 부단주가 직접 찾아왔다.
입이 가벼운 자들은 이미 수군거리기 시작했을 테고, 패력단의 졸들도 열심히 돌아다니며 입을 놀리고 있겠지.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짚은 서하영이 깊게 한숨을 내쉬는 그때, 무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그렇다 하여도 거절하는 게 맞습니다. 무엇보다 저희는 거절할 명분이 있지 않습니까?”
명분.
그래, 이쪽은 거절할 명분이 있었다.
단(團)의 정비가 덜 끝났다 같은 변명이 아니라, 애초에 결정권을 가진 단주가 부재중이다.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고, 겁쟁이 취급도 할 수 없는 그런 명분이 있는데 왜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리고.
“단주님이라면 반드시 해결법을 찾아낼 겁니다.”
그 괴물 같은 단주라면 반드시 해결법을 찾아낼 거다.
깽판을 치든, 판을 뒤집어엎든 뭐…….
‘아미타불. 같은 방법 같구려…….’
아무튼, 뭔가 해결법이 있을 거다.
아니,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단주가 없는 지금 적의 도발에 응하는 것 자체가 하책이다.
그러니…….
“하아, 그 단주가 문제예요. 그 인간이 기다리던 게 이런 거니까요…….”
무해의 설득은 서하영의 깊은 한숨과 함께 흩어졌다.
옆에서 고개를 끄덕인 철백은 무해를 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천위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받아들였을 겁니다.”
지면 죽인다는 각오로 수련시키겠지.
목표가 있으면 성장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녀석이니까.
그리고 술사들은 실제로 성장해서 결과를 내놓을 거다.
그게 승리일지 패배일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무조건 받아들여서 들이박을 거예요. 우리는 지금 내부를 정비할 시간이 필요한 거지 집안싸움을 할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잖아요.”
“아미타불…….”
단숨에 설득당한 무해는 조용히 불호를 외우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네.
답이 없네.
아니, 그래도.
“술사는 무인처럼 몰아붙인다고 실력이 느는 이들이 아닌데, 그렇게까지…….”
“할 인간이죠.”
“본인이 직접 증명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무슨 반항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인간이었지.
목표를 위해선 술법도 만들어 내는 그런…….
“아미타불…….”
“하아.”
“하아.”
괴물 같은 인간.
무해의 불호와 함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철백마저도 골치 아프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짜던 그때.
쿵! 쿵!
“철 소협!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내 이렇게 올라왔소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의 신분인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오다니.
기막을 거둔 서하영이 턱짓하자, 고개를 끄덕인 철백이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하하하! 철 소협, 간단히 이야기만 전한다고 하시더니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소이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을 터이오.”
“하하! 이것 참! 내가 존경하는 무해대사를 만날 생각에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더라니, 그랬소이까? 이거 실례했소이다.”
웃음으로 분위기를 억지로 무마하며 패력단의 부단주 황보균이 집무실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순간 막으려 했던 철백은 서하영의 손짓에 고개를 저으며 길을 열어 줬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온 황보균은 쌓인 서류 더미에 혀를 차더니 자연스럽게 집무실 중앙에 있는 탁자에 앉았다.
“자자, 이야기를 하러 왔으니 일단 앉는 게 어떻소?”
손님 주제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권하는 행태에 철백과 서하영은 최대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례를 지적하고 싶긴 했지만, 황보균은 패력단주의 동생이다.
항렬도, 나이도 거의 아버지뻘인 인물이니 무례를 지적하는 것은 영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무해는 항렬은 같았지만, 나이가 어린 편이었다.
황보균의 뻔뻔한 행태에 화를 억누르며 자리에 앉은 서하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패력부단주님. 하지만, 지금 저희의 상황을 생각하면…….”
“하하, 너무 이야기를 성급하게 진행하지 마시오. 흑룡부단주. 어린 마음에 조급한 건 알겠소만, 아직 제대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지 않소이까?”
말을 끊고, 어리다고 무시하기까지.
제안을 하러 온 건지, 속을 긁으러 온 건지 모를 황보균의 행동에 철백의 호흡이 깊어졌다.
그것이 분노의 전조임을 아는 서하영은 재빨리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지만, 그걸 모르는 황보균은 뻔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도 그리 조급하게 재촉할 생각 없소이다. 삼 개월. 삼 개월 어떻소?”
“삼 개월이요?”
“만귀단주가 죽고 나서도 꽤 시간이 지난 데다 석 달을 더 드리면 충분하지 않겠소이까?”
“지금 말을……!”
발끈하려는 서하영을 이번엔 역으로 붙잡은 철백의 손길에 서하영은 겨우 숨을 골랐다.
“후우……. 만귀단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술사들의 심신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술사에게 평정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요?”
“하하! 알다마다요! 그러니 삼 개월을 더 드리겠다는 것 아니오. 그 시간이면 뼈도 붙고 남을 시간이니 마음을 추슬러 자신의 실력을 선보일 대련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소이까?”
아, 안 된다, 이건.
이 인간, 대화할 생각이 아예 없어.
심신이 흔들린 술사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예 모른다.
고려할 마음도 없는 것 같고.
특히 만귀단처럼 악귀를 다루는 술사는 심신이 흔들린 상태에서 무리하게 술법을 사용하면 악귀의 통제권을 잃거나 역으로 악귀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었다.
그게 실력이 미숙한 술사라면 더더욱.
최대한 어르고 달래서 어떻게든 마음의 평온을 찾게 만든 다음에 일을 진행해야 하는데, 이 인간은 그딴 사실에 아예 관심이 없다.
술사들이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되는 거다.
“이런 식으로 쪼잔하게……!”
분노와 함께 서하영이 기세를 끌어올리려는 그 순간.
철컥.
도(刀)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서하영의 기세가 단숨에 꺾였다.
아니.
먹혔다.
“이게 무슨 무례한 광경인지 모르겠군요.”
집무실 입구.
단숨에 모두의 시선이 쏠린 그곳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패력단 부단주님, 자리를 옮기세요. 그 자리는 우리 단주님이 앉으시는 자리입니다.”
은근슬쩍 상석에 앉아 있던 황보균은 소윤혜의 경고에 눈동자를 굴렸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딸뻘인 여자의 경고에 예, 하고 자리를 냉큼 비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황보균이 소윤혜의 경고를 모른 척 무시하는 그때.
“에이, 우리 부단주님은 우리 누님의 경고가 들리지 않으신가?”
툭툭, 어깨를 두들기는 손길에 황보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체 언제 접근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신속한 신법.
그리고 급소와 바로 연결되는 어깨를 내줬다는 아찔함.
화상으로 일그러진 손으로 툭툭 황보균의 어깨를 두들기던 주현운은 이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단주님, 대답을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였구나? 이런, 이런. 아차, 실수.”
하하 웃으며 이마를 친 주현운은 단숨에 황보균의 목덜미를 잡아서 들어 올렸다.
“우리 단주님 자리에 누가 겁도 없이 앉아 있길래 조금 흥분했더니 미안하게 됐수다.”
주현운의 말에 황보균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어깨를 그냥 내주고, 목덜미를 잡혀 허무하게 허공으로 떠오른 이유를.
왜 자신이……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지.
‘이, 이게 흑룡단의 삼귀(三鬼)……!’
흑암지규군을 몰아붙이던 세 사람의 기세와 지독할 정도의 전투 방식에서 붙은 별호다.
거의 항상 함께 움직이는 세 사람을 칭하는 말이 딱히 없어서 붙은 것이기도 하고.
황보균을 들어 무해의 옆자리에 앉혀 놓은 주현운은 미안하다는 듯 황보균의 어깨를 툭툭 털어 줬다.
“이거 이거, 실례했네요. 뭐, 단주님의 자리에 앉아 있던 무례는 이걸로 대충 퉁치도록 하죠.”
‘……쟤가 저렇게 껄렁한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쟤도 문율처럼 천위 녀석을 닮아 가는군.’
껄렁하게 웃는 주현운의 모습에 서하영과 철백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러건 말건 여전히 껄렁한 느낌 그대로 황보균이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은 주현운은 황보균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웃었다.
“자자, 그럼 우리는 아직 제대로 못 들었으니 다시 이야기를 하죠. 뭐라고 했더라……. 삼 개월?”
“그, 그것이……!”
무려 화경급 고수 셋의 기세다.
서하영이 일으키던 기세마저 단숨에 먹어 치우고 집무실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기세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황보균이 제대로 말을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초절정과 화경은 고작 한 단계 차이지만, 벽을 넘었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실로 어마무시했으니까.
“현운, 너무 과해.”
“에? 왜요?”
“단주님 따라 하지 마. 아미타불…….”
소윤혜의 제지에 어깨를 으쓱인 주현운은 문율의 말에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뭐, 그만할까?”
‘대체 쟤네들 머릿속에 천위는 어떤 느낌이길래…….’
사파가 따로 없구나. 천위야.
부하들한테 착한 상사로 보이긴 그른 것 같다.
친우의 평판이 상당히 좋지 않음을 깨달으며 철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보 부단주님, 일단은 돌아가시고 정식 문서로 제안해 주십시오. 단주님이 돌아오면 보고를 드리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아, 알겠소이다.”
철백의 눈짓에 세 사람이 기세를 거두자, 힘겹게 일어난 황보균이 다급히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후우, 고마워요. 언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뭘.”
서하영의 인사에 손을 저은 소윤혜는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서, 정말 어떻게 하면 돼?”
“맞아요. 서 누님. 이거 맹주님께 말해서 제대로 항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대항전이 뭔가.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기 위한 선의의 경쟁 아닌가.
그것을 권세 다툼 따위를 위해 이용하는 건…….
“에효, 무리야. 그 양반이 이런 얘기를 거절할 리가 없지.”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인간이 기다리던 게 이런 거라고요.”
삼 개월이라.
적당히 맞을지도…….
설천위가 떠나기 전, 유예린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서하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업무의 중요도를 조금 바꿔야겠네요.”
술사들 복지에 투자를 더 해야겠어…….
곧 싹 다 지옥으로 끌려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