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2화
481화-청아와 신입 (3)
축축한 감옥 안.
멀건 죽으로 끼니를 때운 소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아니! 이런 감옥은 내 손재주면 그냥 나간다니까!]
[그 현령 놈의 배때기에 칼침 한 방만 박아 주면……!]
[아니, 그것 말고 내 딸애한테……!]
시끄럽다.
더럽게 시끄럽다.
대체 자신이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표 한번 낸 적 없는데, 이놈의 잡귀들은 왜 이렇게 달라붙는 거야.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킨 소녀는 침착하게 혼들의 목소리를 지워나갔다.
이렇게 오래 살다 보니 이런 기술만 늘었다.
이걸 못 하면 운기조식도 못 하니 필수로 익혔지.
혼들의 목소리를 의식적으로 하나씩 지워나간다.
‘……없네.’
그리고 모든 소리를 지웠을 때.
소녀는 깨달았다.
이 도시에 들어오고 나서 마주쳤던 고서점 앞을 지키던 아저씨.
이상하게도 그 아저씨만 지금 이곳에 없었다.
다른 혼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에게 달라붙어 여기까지 왔는데.
지박령이라서는 아닐 거다.
자신은 왠지 모르겠지만, 혼이 깃드는 특이체질이니까.
지박령들 중에서 자기한테 달라붙고 드디어 있던 곳에서 벗어났다고 환호하던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절실해 보였는데.’
찾아 달라고 말하던 모습은 아주 절박해 보였는데.
왜 안 따라왔지?
묘하게 걸리는 느낌에 생각이 그리로 흘러가자, 소녀는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집중!’
거기에 집중할 때가 아니다.
스승님이 그러지 않았던가.
마음의 평정을 이루는 것이 이 저주받은 체질을 고치는 길이라고.
그리고 혼들에게 속아선 안 된다.
거짓말하는 혼들에게 속아서 애먼 곳을 들이받았다가 피를 봤던 기억이 어디 한두 번인가.
망자는 망자.
살아 있는 내 두 눈으로! 내 두 귀로 들은 것만 믿자!
굳게 다짐하며 소녀는 호흡을 골랐다.
명상에 집중하기 위해.
* * *
[여(麗) 매…….]
“이, 이 바보가……!”
예전과 변함없이 잔잔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연인의 모습에 청아는 뛰쳐나갔다.
“왜! 왜 아직도 이러고 있어! 악귀가 되면 어떡하려고! 악귀한테 잡아먹히면 어떡하려고!”
여린 손이 사내의 가슴을 두들긴다.
사내의 몸이 흔들릴 정도로 매서운 손길.
그리고.
[미안…….]
자신의 어깨를 지나 등을 감싸는 사내의 손을 밀어내지도 못하는 연약한 손짓.
사내의 품에 안겨 떠는 청아의 뒤로 설천위는 조용히 고서점에 다가갔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청아의 흐느낌을 들으면서 조용히 고서점 안을 살핀다.
화풀이라도 당한 건지 난장판이 된 고서점.
본래라면 종이 썩은 내가 진동을 해야 할 텐데.
‘……누가 치웠네.’
현령의 눈을 피해 몰래.
고서점의 벽에 등을 기댄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청아를 끌어안고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의 죽음 이후, 잔뜩 성이 난 현령의 눈을 피해서 청소를 해 준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인덕은 있는 모양이네.
뭐, 청아가 그 정도로 타락하지 않게 만든 장본인이니 당연한 건가.
설천위가 처음 청아를 만났을 때.
철백을 홀려 그 생기를 갈취하려던 청아를 설천위가 소멸시키지 않고 부하로 들였던 이유는 간단했다.
눈.
자신의 패기에 짓눌려 공포로 가득했던 눈동자 속에 있던 한 줄기의 빛.
그 무엇보다 깨끗하고,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던 한 줄기 새싹.
청아(淸芽).
맑은 새싹.
검은 대지를 뚫고 나온 그 새싹을 보았기에 설천위는 청아를 죽이지 않고 거뒀다.
그런 싹을 품은 녀석이 왜 다시 사람이나 홀리면서 생기를 갈취하는 삶을 살아갔는지 모르겠지만.
그거야 나중에 알아보고 해결해 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워낙 사는 게 바빠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금에 이르렀지만.
혼원패공이 성장하고, 술사로서의 역량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얻게 된 게 있었다.
기억.
자신이 흡수해 거느리고 있는 이들의 기억이 조금씩 흘러 들어왔다.
소백진처럼 대충 알고 있어서 이미 놀랄 것도 없는 기억도 있었고.
현태중처럼 사무치는 원한을 풀어 줘야겠다고 다짐한 기억도 있었다.
그리고 청아의 기억은 당연하게도 후자였다.
풀어 줘야 할 기억.
그래서 풀어 주고자 마음먹고 고민하다 보니…….
‘설마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이쪽으로 이어질 줄이야.
그날의 기억이 너무 암울해 청아가 스스로 반쯤 봉인하고 있던 기억이기에 억지로 끄집어내서 찾아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만날 주인공의 스토리 중에 혹시나 관련된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온 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는 당첨이고.
“가요……. 성불해요.”
[응.]
“벌써 이렇게 혼이……!”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대로 악귀가 되면! 도사들이 와서 소멸시킨다고!”
사내의 품에서 흐르는 눈물을 훔치지도 못한 채 청아가 사내를 다그쳤다.
미련이 남아 이승에 버티고 있는 혼은 서서히 변해 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미련은 원한과 증오가 되어 악귀가 된다.
아주 가끔씩 미련을 품고 서서히 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는 혼도 있긴 하지만…….
‘이쪽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그 녀석은 결국 이 사내를 두고 떠나니까 끝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네.
원래라면 청아는 비후가 있던 그 산에서 구부주귀(久腐洲鬼)에게 먹혀서 사라졌을 존재니까.
아마 이곳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소멸하거나 악귀가 됐거나.
둘 중 하나의 결말을 맞이했을 거다.
“자! 됐어요! 빨리 돌아가요!”
[여 매, 그래도…….]
“고작 더러운 잡귀 년 하나 때문에 다음 생도 망칠 생각이야! 빨리 가라고!”
“어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자학이 아니라 거의 자해 수준인데.
……그게 그건가?
악을 쓰는 청아에게 다가간 설천위는 영력으로 그녀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나도 이야기를 좀 해 봐야 할 거 아니야.”
“……주인님이 왜요?”
“이분은 나름 중요 참고인인데, 해야지.”
흠흠.
청아를 밀어내고 사내의 앞에 선 설천위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내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질투하기는. 그런 거 없수다.”
손을 휘적거린 설천위는 사내를 이곳저곳 살폈다.
흐려지는 몸.
역시 자연으로 흩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앞으로 버텨 봤자 몇 년이겠는데.
보통의 혼이 악귀가 되지 않고 이승에서 버티긴 상당히 힘들지.
천마 할배가 괴물 같은 거다.
생전에 얼마나 혼의 그릇을 넓혀 놨길래…….
“아니지.”
또 잡생각.
가볍게 생각을 털어 낸 설천위는 사내의 상태를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글 좀 읽으셨나?”
[……미흡하지만, 책을 열심히 읽어 조금의 잡지식은 있습니다.]
“음음, 그래. 뭐, 나쁘지 않네.”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사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럼, 종신 계약을 하시겠소?”
“주, 주인님!”
대가는 음, 그래 백년해로(百年偕老) 정도면 되나?
죽어서 하는 백년해로지만.
아, 안 늙을 테니까 해로(偕老)는 아닌가?
함께 안 늙으면 더 좋은 거니 상관없겠지?
* * *
“흠.”
현청(縣廳) 앞.
그곳에 선 유예린은 담담한 눈으로 현청의 정문을 바라봤다.
“돈을 많이 버나 보네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기에 현청 대문이 이리도 번쩍번쩍해.
깔끔하다 못해 광이 나는 정문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유예린은 담담한 걸음으로 정문에 다가갔다.
“정지.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검은 무복이지만, 유예린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 때문일까.
웬만한 백성이라면 문전 박대했을 문지기가 한껏 각진 목소리로 유예린을 막아섰다.
업무를 충실히 이행하겠다.
그러니, 신분만 제대로 말하면 잘 전해서 들어갈 수 있게 해 드리겠다.
그런 마음이 담긴 눈빛을 받으며 유예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현령 놈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열어 주시겠어요?”
……현령님도 아니고 현령 놈?
뭔가 이상함을 느낀 문지기는 일단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현청 앞에서 당당하게 현령을 욕하는 인간이 정상적인 손님일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런, 아쉽네요. 열어 줄 생각이 없나 보군요?”
창을 꼬나쥐고 경계하는 문지기들의 모습에 유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가로막은 사내는 물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멍때리던 사내까지 바짝 경계하며 창을 겨누는 모습이…….
“참, 교육을 철저하게 받으셨나 보네요.”
이런 도시의 현청을 지키는 문지기라면 한껏 해이해질 법도 한데 말이죠.
찔리는 게 많은 인간이 열심히 교육시켰나 보네.
아니면, 이런 일이 종종 있었던가?
원한을 가진 사람이 꽤나 자주 왔다면 그럴 수도?
고개를 갸웃하며 웃던 유예린은 이내 웃으며 손을 뻗었다.
“무, 무슨 짓이냐!”
한 손은 허리춤에 감추고 있던 유예린이 갑자기 손을 내밀자, 문지기가 당황해 소리쳤다.
뭔가, 뭔가 위험한 느낌이……!
“문을 열어 주세요.”
털썩.
“히, 히이이익?!”
갑자기 눈앞에 피투성이의 사람이 떨어지자, 기겁한 문지기가 뒷걸음질을 쳤다.
시체를 던진 거야?!
“아, 죽진 않았어요. 명색이 정파인데, 그렇게 막 죽이고 그러진 않아요.”
피투성이의 사람을 내민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미소로 유예린은 문지기를 지나쳤다.
“그러니 긴장하세요. 당신의 죄는 어느 정도일지.”
담담하게 웃으며 그 손이 거대한 정문을 밀어낸다.
“저 사내처럼 죽음의 직전까지 가야 할 정도인지, 아니면 조금 아프고 끝나면 되는 정도인지.”
화사한 미소를 보이며, 유예린은 활짝 열린 대문을 지나갔다.
“잘 고민하고 계세요.”
아름다운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그녀의 기세에 기절한 문지기들이 쓰러지고, 유예린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반듯한 돌이 깔린 길 위를 걸어 관청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담담하게 걸어간다.
그녀의 철사에 걸려 끌려오는 구도문주, 구재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붉은 길을 그려 낸다.
“이것 참…….”
……재미있네요.
이래서 사파를 하나?
막무가내로 나간다는 거 생각보다 더 재미있네요.
설천위가 알려 준 방법 그대로 실행하고 있으니, 뭔가 자신이 사파가 된 기분이다.
아니, 사파는 이런 일에 힘을 안 쓰나?
피식 올라가는 입꼬리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입가를 만진 유예린은 이내 더욱 환하게 웃었다.
“그 사람과 함께 지내면, 미소가 느네요.”
[천생연분이 따로 없구나.]
“칭찬 고마워요.”
[……뻔뻔한 것도 그러하고.]
빙긋 웃으며 나아가는 유예린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암영의적은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괴물이 됐어.’
자신 이외의 것을 그것도 희미하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인간을 은신시키는 무공이라니.
문지기들이 저 구가 놈을 눈치채지 못할 때 얼마나 놀랐던가.
현경에 올라도 하기 힘들 것 같은 기예를 이리도 자연스럽게…….
아무리 상대가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지 못한 일반인이라지만, 경악스러울 정도의 능력이다.
그리고 진짜 경악스러운 것은 지금 이 상황이 고작 시작이라는 점이지.
“무어냐!”
현청의 깊은 곳.
현령이 업무를 보는 가장 큰 건물 앞을 지키는 문지기들은 뜬금없이 등장한 여인의 모습에 호통을 치며 창을 들었다.
그리고.
“으, 으어어어! 머, 멈춰라!”
그녀의 뒤로 피를 질질 흘리는 이가 끌려오는 모습에 두 다리를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닌가.
“가, 감옥에 있는 그 계집의 동료냐!”
당황해서 아무런 말이나 지르고 보는 문지기들의 모습에 유예린은 잔잔하게 웃었다.
“일단 죄는 확실히 있군요.”
“그게 무슨 헛……. 컥!”
점혈을 당한 문지기들이 멈추고.
담담히 그사이를 지나가는 유예린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웬 놈이냐!”
어느 사내의 재판을 진행하던 현령이 갑작스레 열리는 문에 호통을 쳤지만, 이내 들어오는 유예린의 모습을 보고 얼이 빠졌다.
“아, 아름답구나……!”
“……구제 불능이네요.”
난입한 대상의 아름다움에 감탄이나 하고 있다니.
현령의 반응에 깊게 한숨을 내쉰 유예린은 끌고 온 구재를 당겨 그대로 집어 던졌다.
“커헉!”
충격에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몸을 부르르 떠는 구재.
그리고.
“무림맹 흑룡단 부관 은검(隱劍)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며, 기세를 퍼트린다.
“이 구도문주가 혈교와 내통해 일반 백성을 납치해 빼돌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싸늘한 표정으로 유예린은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조용히 경고했다.
“이 자리에도 내통자가 있으니 섣불리 움직이면 사지 중 하나를 자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