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1화
480화-청아와 신입 (2)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작은 도시.
꽤나 폐쇄적인 분위기의 도시에 도착한 설천위와 유예린은 적당한 객잔에 들어갔다.
“뭐, 일단 정보 수집?”
“현지 정보군요.”
간단하게 음식을 시키고,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썩 좋지 않은 표정들.
대체로 지도자의 상태가 안 좋으면 이런 꼴이 나는데 말이야.
“썩 분위기가 좋진 않네요.”
오랜만에 나들이인데, 아쉽네요.
입맛을 다시며 소면을 먹는 유예린의 모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젓가락을 움직였다.
“어깨가 처졌네? 왜? 좋은 분위기에서 놀고 싶어?”
“……임무예요.”
“먼저 말 꺼낸 건 유 매잖아.”
“임무라니까요.”
“……미안.”
빠르게 꼬리를 내린 설천위는 고개를 돌렸다.
놀리는 맛이 있긴 한데, 너무 놀리면 안 된다.
‘어우.’
무서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살짝 부르르 떤 설천위는 이내 객잔의 내부를 둘러봤다.
힘없는 움직임.
미소 없는 일상.
큰 소리가 나는 건 무인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앉아 있는 곳뿐이다.
거기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간단한 소면만 먹고 있고.
식사를 때우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 여가 시간을 위해 온 건 아니라는 증거다.
“흠, 일단 문파들부터 족쳐야 하나?”
“나쁘지 않은 방법이죠.”
무림인에게는 무림인의 접근 방법이 있으니까.
아무리 황실이 개판이라고 해도 관에 막무가내로 쳐들어가는 건 썩 좋은 방법이 아니다.
“엉? 문파를 족쳐?”
그리고 설천위가 구태여 줄이지 않은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촌놈들이 뭐라는 거야, 어? 지금 우리 구도문이 우스워?”
“히끅! 형님! 이놈들 단단히 쓴맛을 보여 줘야겠는뎁쇼?”
“오오! 맞은편에 앉아 있는 거 여자잖아! 몸매 좋네! 얼굴! 얼굴을 보…….”
“거참.”
비틀거리며 유예린에게 다가가려던 사내의 몸이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멈춰 섰다.
“넘지 말아야 할 선, 몰라?”
거, 혈패황은 자기 여자한테 성추행한 놈들 때문에 무림 절반을 쓸어버렸는데.
이 자식들이 범죄의 위험함을 아직도 모르네?
“같이 온 남자가 있는데, 여자한테 집적거리면 안 되지. 형씨들.”
“하아? 네놈이 먼저 시비를…….”
“혀, 형님!”
아직도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가운데 사내를 대신해, 취한 척하며 접대했던 건지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한 남자가 사내를 말렸다.
“고수! 고수!”
“고수? 고수 맛있지!”
“아오! 적당히 좀 처마실 것이지!”
말이 통하지 않는 형님의 모습에 울분을 토해 낸 남자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요! 저희가 대인을 못 알아뵙고……!”
사람을 멈추는 방법은 많다.
그냥 손으로 가로막아도 멈출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비틀거리며 걷던 인간이 떠는 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멈추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답은 하나밖에 없다.
이 무림에서도 손에 꼽히는 존재들.
초고수.
어쩌면 초절정에 오른 진짜 고수일지도 모른다.
외견만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게 무림의 철칙 아닌가!
물론 대부분이 그런 철칙을 무시해서 피를 보는 거지만!
‘젠장!’
자신이 그 피를 보는 처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자의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런 젊은 고수들은 손속이 무자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아 온 있는 집안의 자식인 경우가 많고, 자신의 실력에 자신도 있다.
감히 자신에게 덤비는 어리석은 것들을 봐줄 만큼 아량이 넓은 경우가 흔치 않다.
하물며 여인과 함께라면?
쥐뿔도 없는 인간도 제 맘에 드는 여인을 위해서라면 허세를 부리며 사지로 나가는 게 사내인데, 없는 놈들 팔다리 가볍게 꺾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잘리지 않으면 다행이고, 꺾이는 것 정도면 제발 의원이 잘 치료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남자가 공포에 벌벌 떨며 아직도 술에서 덜 깬 자신의 형님을 붙잡는 사이.
“눈치 빠른 친구가 있네. 아주 좋아.”
“뭐, 인마?! 놔! 내가 아주 본때를 보여 줘야겠……!”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는 아직도 발버둥 치는 사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뿌득!
“말이 통하지 않으면, 몸으로 알려 주는 수밖에 없지. 거참, 짐승도 아니고 이런 방법을 써야 하나?”
“끄으아아악!”
“걱정 말게. 부러트리진 않았으니까.”
금 정도는 갔겠지만.
어깨를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는 사내의 아혈을 점해 버린 설천위는 웃으며 벌벌 떨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너희 문주한테 안내 좀 해라.”
* * *
‘이, 이 미친놈들이……!’
구도문주, 구재는 문도들이 데려온 인물을 보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흑룡단주라니……! 이 미친놈들이!’
그냥 모셔 온 것도 아니고 시비를 걸었다가 털리고 여기로 데려온 거라고?
아니, 그놈들이 흑룡단주를 이긴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
그럼 최소한 악으로, 깡으로 버텼어야지!
한 놈 정도는 여기로 와서 경고해 줬어야지!
그래야!
‘내가 튀었지!’
도망도 못 치고, 이게 뭐냐고!
떨리는 수염을 손으로 숨기며 구재는 미소를 지었다.
“흐, 흑룡단주께서 이런 작은 도시에 무슨 일이십니까?”
떨리는 수염을 떨리는 손으로 가리고, 목소리마저 떨고 있어서 전혀 감춰지지 않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평정을 가장하려는 구재를 보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별거 아니고 여기에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이지.”
“그, 그건…….”
설천위의 말에 단박에 무언가가 걸리는 것이 있는지 구재가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손에 쥐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술을 줄 거고, 거짓말을 계속하면 술잔을 줄 거야.”
……그게 그거 아닌가?
설천위의 말에 당황한 구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들어오는 설천위의 질문에 기겁했다.
“현령, 그놈이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워서 사람들을 가두거나 제멋대로 처벌했다? 아니다?”
“그, 그건…….”
“했다, 아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다 헛소문……!”
“땡!”
빡!!
“억!”
땡 소리와 함께 그대로 구재의 이마에 술잔을 내려친 설천위는 산산조각이 난 술잔의 파편을 털어 내며 구재의 잔을 들었다.
“거짓말하지 말라니까. 다 알고 왔으니까 하는 질문 아니야.”
“이,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소! 지금 정파의 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무림맹의 단주가 이 무슨 행패요!”
피가 흐르는 이마를 부여잡고 소리치는 구재를 보며 설천위는 빙긋 웃었다.
“다음 질문, 너도 한발 걸쳤다? 아니다?”
“노옴!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오만방자하기 그지없……. 컥!”
찢어진 곳을 또 때린 술잔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진다.
이어서, 유예린의 술잔마저 받아 든 설천위는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비틀거리는 구재를 바라봤다.
“자꾸 그~짓말할래? 이런 시시껄렁한 대화 재미없잖아.”
“저, 정파 동도들이 네놈의 오만함을……!”
“자자, 다음 질문.”
구재의 말을 끊으며 설천위는 비틀거리는 구재를 잡아 앉힌 뒤 물었다.
“사람 사는 놈들과 거래를 했다, 안 했다?”
“노옴! 감히 나를 뭐로 보고 그런 모욕을 하는 것이냐! 나 구재! 구도문의 문주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에라이!”
빠각!
술잔을 다시 한번 깨트린 설천위는 혀를 차며 아예 쓰러져 바닥을 기는 구재를 내려봤다.
“다 알고 왔다고 했지?”
게임 속에서 봤던 이야기라 유예린을 통해 이미 확인을 전부 끝마친 상태다.
이놈이 자기 뒷주머니 채우겠다고 벌인 짓을 전부 다 알고 왔는데 거, 끝까지 구질구질하게.
“……공자.”
“응?”
“백유, 그 여자랑 어울린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 같네요.”
“왜?”
“하는 짓이 완전히 사파예요.”
……응?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유예린의 모습에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개판이 된 술상.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는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집주인.
그리고 그런 집주인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목을 지그시 밟고 있는 손님.
“아.”
뿌드득!
“끄아아아아악! 내, 내 발이!!”
아차, 실수로 힘을 줘 버렸네.
실수로 발목을 으스러트려 버린 설천위는 아차 하며 발을 들었다.
구재는 작은 도시에서 현령과 붙어먹는 무인답게 무공 수준은 일류 끝자락 정도밖에 안 된다.
이렇게 부러지면 재활은 좀 힘들겠는데.
뭐.
“상관없나.”
정파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허례허식, 명분을 챙기려다가 실리를 놓칠 생각도 없고 말이야.
“상관없긴 하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주변에 대기 중인 녀석들을 제압하기 위해서겠지.
한숨을 내뱉은 것과 달리 착실하게 자신을 도와주는 유예린의 모습에 흡족하게 웃은 설천위는 이젠 눈물, 콧물 다 빼며 꿈틀거리고 있는 구재의 머리채를 잡아서 들어 올렸다.
“자자, 이제 다시 진실된 이야기가 오갈 시간이야.”
반대쪽 손으로 이제는 술병을 쥔 설천위는 웃으며 구재를 바라봤다.
“자, 다시 말해 줄게. 진실을 말하면 술을 줄 것이고, 거짓을 말하면 술잔…… 이 아니라 술병을 줄 거야.”
정보 조사는 다 끝냈는데, 굳이 구재를 잡고 이러고 있는 이유.
간단하다.
아무리 지금 황실이 개판이라지만, 현령을 처리하려면 나름 명분이 필요하다.
이번 일은 조용히 쓱싹 하고 끝낼 일도 아니고.
‘걔를 설득해서 데려오려면, 확실하게 보여 줘야지.’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이 방법뿐이라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거기다.
“현령이 혹은 그 부모가 악귀에게 습격당한 적이 있나?”
* * *
요(妖)라는 악귀가 있었다.
사내를 유혹하고, 사내의 정기를 빨아먹으며 살아가는 존재.
실체가 있는 육체는 실체가 있는 인간의 정기를 먹음으로써 유지된다.
허나.
‘이 책을 추천합니다.’
‘이 이야기 좋지요?’
‘당신은 가끔 슬퍼하시네요.’
‘저는…… 당신이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실체가 없는 마음은 기이하게도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때 비로소 살아났다.
육체에 매혹되어 끌려온 이들 중 너무 지독할 정도로 달려든 인간을 실수로 폐인으로 만들어 버렸을 때였나.
도망치다가 도착한 낡은 서점에서 악귀는 사람을 만났다.
사랑에는 사랑을.
욕망에는 욕망을.
하지만 현실은 비정한 법이던가.
생기를 빨아들이지 못하니 몸은 서서히 쇠약해져 갔다.
다른 남자를 아무나 붙잡아 흡수하면 될 일이지만,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나약해지는 몸.
그러다가 우연히 그와 함께한 시간을 보냈을 때, 그와 함께하는 것만으로 최소한의 존재는 유지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행복한 시간이 찾아왔고.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요(妖)라는 이름조차 버린 채,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했다.
정체를 들켜 습격을 당하고.
그 습격에서 그 사람이 죽기 전까진.
힘없는 몸은 무력했고, 자신이 애지중지 아끼던 이의 생기는 죽어 버린 육체에서 빠르게 빠져나갔다.
‘크하하하! 반반한 얼굴 하나는 볼만하구나! 내 직접 맛을 봐야겠다!’
병사들의 뒤에서 소리치던 인간의 외침과 함께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닥치는 대로 생기를 빨아들이고, 도주했다.
그 인간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지도 못했다.
그저 떠돌고 떠돌다가 어느 날 산에 갇혀 도사의 모습으로 남자를 유혹하다가 새로운 주인을 만났을 뿐.
그렇게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청아야.”
왜 당신은 알고 있나요.
왜 당신은 잊지 않나요.
“저 사람이냐?”
[……여(麗) 매.]
왜 아직도 그 자리에 있나요?
폐허가 되어 버린 고서점 앞에서 청아는 주저앉았다.
잊고 있던, 안개에 가려져 있던 기억이 샘물처럼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