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7화
476화-파종(播種) (1)
“크! 독하다, 독해! 역시 연옥의 괴물이야!”
무려 일주일.
흑관으로 만들어 낸 몽둥이로 신나게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머리통을 몽둥이찜질을 하던 설천위는 감탄과 함께 손길을 멈췄다.
“역시 사람이 아니긴 아닌가 봐.”
머리를 그렇게 깼는데, 살아 있네.
[네…… 놈…….]
“오, 그래도 힘은 좀 빠졌나 보지?”
부릅뜬 두 눈과 달리 흑암지규군의 힘없는 목소리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육포를 꺼냈다.
“일주일이라. 뭐 부족할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걸리긴 하네.”
유예린이 챙겨 준 고급 육포의 맛을 음미하면서 설천위는 근처에 놔둔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래서, 아직도 계속할 생각?”
[인간, 따위가…… 화산을,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힘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비웃는 흑암지규군의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름 대자연의 일부라 이거지?”
먹던 육포 조각을 입안에 털어 넣은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몽둥이를 쥐었다.
“불굴(不屈)의 신념은 분명히 있고, 꺾이지 않는 긍지라는 것도 이 세상에 있지만.”
히죽 웃으며, 설천위는 아직도 몸이 얼어 있는 흑암지규군의 머리를 향해 몽둥이를 내리쳤다.
“그건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고 정복할 때 쓰는 말이거든.”
어딜 화산 짝퉁 따위가.
* * *
“독하네요.”
“그러게. 생각보다 오래 버티네.”
“주인님 얘기인데…….”
만귀단의 건물 내부.
밖에서 들리는 타작 소리에 고개를 젓던 요려는 유예린의 반응에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버티는 흑암지규군도 그렇지만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는 존재의 머리통을 몇 번이나 깨는 설천위도 보통 강심장은 아닌데…….
꿈에 나올까 무서운 장면이다.
깨진 머리통, 흐르는 붉은 피…… 가 아닌 용암.
“……흠.”
생각해 보면, 사람이랑 다르니까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막연히 두려워하던 요려가 새삼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다시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던 유예린은 이제 막 펼친 보고서를 읽고 미간을 찡그렸다.
“귀찮게들 하는군요.”
만귀단 해체를 외치는 여론에 대한 보고서였다.
심지어 만귀단뿐만 아니라 백화단도 그 규모를 축소하고 영향력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수의 단주와 다수의 대주들이 이번 사건을 거론하며 술사들의 영향력 축소를 외치고 있었다.
“머저리 같은 인간들.”
혐오감이 깃든 눈빛으로 보고서를 내려다보는 유예린의 싸늘한 목소리에 요려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정보로 아는 유예린과는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언동이다.
그만큼 진심으로 혐오하고 있다는 소리겠지.
물론, 그런 유예린의 싸늘한 분위기에 눈치를 보는 건 업무를 수행 중인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눈치를 보는 술사들의 모습에 요려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신경 쓰지 말고 업무를 보라는 요려의 신호에 술사들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보고서에 고개를 묻었다.
“차라리 배신자였으면 좋을 정도네.”
미간을 손으로 짚고 고개를 젓는 유예린의 모습에 요려는 어색하게 웃었다.
배신자라면 확실히 멍청한 건 아니니까.
전장에서 진정 위험한 건 천 리 앞을 내다보는 적이 아니라 코앞의 이익만 볼 줄 아는 아군이라고 했던가.
현명한 적보다 어리석은 아군이 더 위험하니, 차라리 배신자인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그냥 도려내 버리면 되니까.
짜증이 담기다 못해 살기가 희미하게 어리는 유예린의 눈빛에 슬쩍 고개를 돌린 요려는 자신의 앞에 놓인 보고서를 내려다봤다.
만귀단에 자리를 잡은 지 일주일.
생존한 술사들을 챙기고, 단주와 부단주가 동시에 사라진 만귀단 내부를 수습하기 위해 흑룡단이 움직였다.
흑룡단 단원의 대부분은 아직 복귀 중이기도 하고, 이쪽은 능력 있는 부단주가 있는 데다 단주가 지금 흑암지규군을 처리하는 중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까.
백화단에서 도움을 주려 했지만, 설천위와 유예린이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화단도 꽤나 힘을 무리하게 써서 부상자들이 많은 데다 무엇보다 백화단주인 성화린이 요양이 필요할 정도로 몸을 혹사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버티면서 공무를 봤지만 더 이상 버텼다가는 회복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었기에 설천위가 억지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그렇게 멀쩡하면 흑암지규군을 풀어 버릴 테니까 알아서 처리하라고 협박한 건 좀 심했지만.’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뒤에서 지켜보던 만귀단주님의 표정이 잊히지 않을 정도였다.
며칠 전에 있었던 소란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한 요려는 다시 침착하게 서류 작업을 이어 나갔다.
“응?”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유예린 옆에서 묵묵히 서류 작업을 이어 가던 요려는 이상한 내용의 서류를 발견하곤 그 아래 찍힌 인장에 고개를 갸웃했다.
“……정근각?”
정근각(正根閣).
맹주가 머무는 장소이자 맹주의 직속 무력대인 정근대(正根隊)가 자리한 곳이었지?
맹 전체의 조율을 목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곳인데, 그런 곳에서…….
‘단순 청소 지시?’
이런 서류를 보낼 이유가 있나?
고개를 갸웃하면서 요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님, 이것 좀 봐주세요.”
“음?”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면 바로 보고한다.
그 철칙대로 유예린에게 서류를 내민 요려는 그녀가 서류를 전부 읽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그리고.
“맹주……. 참 독한 사람이네요.”
한숨을 내쉰 유예린은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내용인가요?”
“청소 지시.”
“예? 진짜요?”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단주급 이상에게 배포되는 암호로 이루어진 지령이다.
대충 감을 잡고 입을 다무는 서하영을 뒤로한 채 방을 나선 유예린은 한숨과 함께 걸었다.
아직도 매타작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이번 일은 단주의 허락이 필요하기에.
* * *
“흐응?”
만귀단의 정원.
매타작을 멈추고 자리에 앉은 설천위는 유예린의 보고를 들었다.
“정말로?”
“진짜로.”
“쯧.”
거참, 귀찮은 일을 떠넘기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
“……원한만 살 일이에요.”
“그럼에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
“후우……. 그러니까 그걸 왜 공자가 해야 하죠?”
무림맹에서 제대로 된 대우도 못 받았는데?
구단(九團)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른 단주들의 외면만 받으며, 사파의 영역에서 실종됐음에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던 무림맹인데.
대체 왜?
그녀답지 않게 불만이 담긴 유예린의 눈빛에 설천위는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균형을 맞춰야지.”
한쪽만 강해져선 의미가 없다.
“사파는 뭉치기 시작했어. 백유를 주축으로 살존까지 합류한 사파는 진정한 흑룡이 되어 비상하겠지.”
계획했던 대로다.
이 무림을 이루는 거대한 축 중의 하나.
사파라는 거대한 집단이 제대로 된 구실을 할 수 있게 된 것과 동시에 이쪽의 우군이 됐다.
이거면 충분하다.
백유는 사파를 훌륭하게 이끌 것이고, 그 혜택은 이쪽이 나눠 받을 거다.
그렇다면 정파는?
이 무림을 이루는 거대한 축 중 하나이면서, 사파보다도 더 덩치가 큰 정파는?
겉으로야 사파보다 더 단단하게 뭉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는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이다.
배신과 부패.
놈들이 진짜 움직이는 순간, 정파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확률이 8할 이상이다.
맹주는 강한 무인이지만, 정파의 중심은 아니다.
소림의 불존(佛尊)이 화합을 이유로 무림의 일을 방관하고, 설가의 북존(北尊)이 평화를 위해서 침묵하는 지금.
정파의 무림을 뭉치게 할 인물은 정존(正尊)이라 불리는 맹주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럴 역량이 없었다.
무림맹이 그를 맹주로 추대한 이유는 그가 가진 강함과 중립성 때문이다.
다른 구파일방, 오대세가에 자신의 이권을 뺏기지 않으면서 무인들이 누구나 자신의 머리 위에 서는 것을 인정할 정도의 강함을 지닌 사람.
그게 지금의 맹주였을 뿐이다.
무림맹의 맹주는 정존이지만, 정파 무림의 지도자는 맹주가 아니다.
사천맹의 맹주가 백유이면서 사파 무림의 지도자까지 백유인 사파와는 완전히 상황이 다르다.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썩은 살을 도려낼 수 있는 명분과 이익이 맹주에겐 없다.
그러니 앞으로 더 강한 적들이 몰려올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만귀단을 완전히 해체하고 백화단을 축소시켜야 한다는 미친 여론을 방관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림맹을 그냥 방치할 순 없다.
“모을 수 있는 힘은 조금이라도 더 모아야지.”
“하지만…….”
“손익을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잖아?”
“……후.”
살짝 한숨을 내쉰 유예린은 불만이 담긴 눈으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공자의 노력도, 희생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당장 선검단 사건 때만 해도 그렇다.
배신자를 해치우고, 그 뒤에 몇이나 되는 배신자를 잡아냈지만 그 대가로 받은 건 외지로의 좌천이 아니었던가.
고작 몇 달 전 설천위가 이 무림맹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일의 대가가 그것인데, 그런 짓을 또 하라고?
“하하하! 이건 의외네.”
그런 유예린의 반응에 설천위는 웃음을 터트렸다.
“응. 정말 의외야.”
대체 왜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예린을 보며 설천위는 다시 몽둥이를 들었다.
게임에선 본 적 없던, 지극히 평범한 반응의 유예린이다.
극도로 냉철하고, 모든 일을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일에만 집중하던 그 유예린이 아니라.
자신의 사람이 당하는 불이익에 화도 내고, 불만도 품는 그런 평범한 반응.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선행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반응.
선한 것과 호구가 되는 것은 다르다.
지금 이 길은 선행이 아니라 호구가 되는 길이다.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 유예린의 눈빛에 설천위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유 매는 이쪽이 본심인가?”
게임에선 설천위가 그런 위치에 올랐던 적이 없으니까.
피식 웃으며 이젠 비명을 지를 힘조차 없는 흑암지규군의 앞에 선 설천위는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애초에 무림맹 전체를 끌고 갈 생각은 없었어.”
사파랑 똑같다.
걸러 내야 할 놈들은 걸러 내야 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드를 꿈꾸니까.
걸러 낼 건 걸러 내야지.
사람 새끼 아닌 것들까지 끌고 가다간 전부 꼬꾸라지는 수가 있다.
“도려낼 부위는 도려내고, 걸러 낼 것들은 걸러 내야지.”
설천위는 반응이 없는 흑암지규군의 머리를 몽둥이로 툭툭 때리며 웃었다.
“그렇게 했는데도 나랑 안 맞으면? 뭐 어떡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애초에 권력도, 부도 관심이 없다.
살아남으려고 무공을 익혔고.
살아남으려고 사람도 죽이고.
영문 모를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든 발버둥 치는 데만 집중했지만.
여전히 불만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예린을 보며 설천위는 빙긋 웃었다.
“어차피 옆에 있어 줬으면 하는 사람은 옆에 있을 테니까 어디에 있든 상관없잖아?”
“……말은.”
불만이 조금은 가신 듯 고개를 돌리는 유예린의 모습을 보며 설천위는 다시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어찌 됐든 마침 나쁘지 않은 시기니까 이참에 처리하자고.”
“대상은요?”
“뭐, 조사는 암은단에 협력을 얻으면 될 거고.”
“……암은단을 믿어도 될까요?”
조금 머뭇거리다가 먼저 의문을 제기하는 유예린의 모습에 설천위는 부드럽게 웃었다.
“공적인 일에서 장인어른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책임감 하나로 인생을 사시는 분인데.
자식들 키운 것만 봐도 딱 보이잖아?
업무적인 협조는 뭐, 암은단을 못 믿을 정도면 나머지 구단은 싹 다 물갈이해야 할 정도다.
그것과 별개로 암은단 내부의 첩자 정도야 잡아야겠지만.
설천위의 대답에 유예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무튼, 조사를 진행하면서 적당히 소문도 좀 흘려서 움직이는 꼴을 지켜보자고.”
빡!!
조금 거친 소리와 함께 몽둥이를 내려친 설천위는 튀어 오르는 용암을 흑관으로 막아 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는 조금 길게 보자고.”
천천히 쉬면서 빡빡 문질러서 있는 때, 없는 때 싹 다 벗겨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