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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476화 (476/624)

제476화

475화-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10)

“전부 물렸습니다.”

“그 정도로 확신하던가?”

“예.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자신이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 그 이상의 경계 병력은 필요 없다고 일축했습니다. 흑룡단 다섯 명으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해서 일단 병력은 전부 물렸습니다.”

“고작 다섯이라고 하기에는 전원이 화경급 고수이니 할 말이 없군.”

허허롭게 웃은 맹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군사, 어찌 생각하나?”

“흑룡단…… 에 대한 생각이라면 복잡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네는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아.”

주어 없이 물었는데도 대답이 척척 나오는구먼.

웃으며 수염을 쓸어 낸 맹주는 자신의 앞에 놓인 보고서를 내려다봤다.

“강소 지부에 있던 흑룡단은 현재 복귀 중. 실종 기간 동안 사천맹의 정보를 상당수 알아 왔군.”

유예린이 올린 보고서를 살피는 맹주를 보며 총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가(七家)의 셋이 무너졌고, 새로운 사천맹주가 나타나 사파 전체를 휘어잡고 있는 중이라면, 상황은 상당히 심각합니다.”

정파가 사파에게 항상 우위를 점해 왔던 이유는 바로 응집력에 있었다.

서로 연계하며 힘을 모으는 정파.

서로 흩어져서 잇속을 챙기는 사파.

어느 쪽이 세력을 더 키울 수 있을지는 누가 봐도 명백할 정도다.

그런데 어째서 정파는 뭉칠 수 있고, 사파는 뭉치지 못할까?

그건 바로 체면에 있었다.

정파는 정의(正義)를 말한다.

의협(義俠)을 외치고, 천륜(天倫)을 주장한다.

정말 순수하게 정의롭게 행동하는 이들도 있고, 그들은 협객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영웅이 된다.

그리고.

이해타산을 따지며 움직이는 이들조차도 이 명성에는 신경을 쓰게 된다.

명성은 곧 힘.

명성은 돈을 불러 모으고.

명성은 인재를 불러 모은다.

그것을 알기에 정파의 대문파들은 아무리 뒤로 구린 일을 해도 그것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철저하게 숨기고, 철저하게 감춘다.

어린 시절부터 최소한의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함을 꾸준히 교육하고, 최악의 순간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친다.

최소한 겉으로라도 정의를 지키는 법과 그것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가르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은 생각보다 큰 역할을 한다.

눈앞에 닥친 실익을 위해 아군을 배신해야 할 때 망설일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망설이면 고민하게 되고, 고민하다 보면 때를 놓친다.

그리고 그렇게 때를 놓치고 후에 일이 풀리는 것을 보면서 배신이 생각보다 그리 이익을 많이 남기는 행동이 아님을 알게 된다.

완전한 비밀도 없고, 영원한 침묵도 없으니까.

그렇기에 정파는 서로를 배신하는 경우가 정말로 적다.

진짜 최악의 상황에서나 배신이 일어나는데, 그런 경우는 누구라도 배신을 상정하고 대응할 수 있기에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모두가 뭉쳐 있을 때, 그때 배신하지 않는 것만으로 힘을 뭉치기엔 충분하다.

그 최소한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결속이 정파의 근간이고, 힘이다.

“사천맹주의 행보가 심상치 않습니다.”

“백유라고 했던가……. 말도 안 되는 인물이 등장했어.”

그런데 그 힘을 이제 사파가 손에 쥐려고 하고 있었다.

흑룡(黑龍)의 고고함을 외치며, 인간답게 살 것을 주장하는 사천맹주.

최소한의 선을 지키라고 말하며, 그 선을 지키지 않는 자들의 목을 치고 있는 괴물.

고작 화경의 무인인데, 이미 그녀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 상태라고 한다.

설천위가 가져온 정보와 맹에서 조사하던 정보가 거의 일치하는 상황.

사천맹은 이미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다.

“그 늙은이는 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전대 사천맹주의 죽음은 아직도 확인되지 않았다.

살존이 공식적으로 현 사천맹주를 지지하기로 한 이상, 만약 전대 사천맹주가 사천맹으로 복귀한다면?

자신의 무공을 이은 진짜 제자인 백유를 밀어내지 않고 힘을 보태 준다면?

두 명의 현경급 고수를 등에 업은 백유는 그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며 사파를 완전히 장악해 나갈 것이다.

결속의 힘을 손에 넣은 사파라…….

“허허, 앞으로 꽤나 힘들어지겠어.”

“문제는 사파만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총군사의 말에 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만 신경 쓸 수 없다.

저쪽을 견제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도저히 그럴 여유가 나질 않았다.

“조사는 어찌 됐나?”

“의심 가는 정황을 몇 가지 포착하긴 했지만, 전부 증거가 없습니다.”

“쯧쯧.”

흑룡단주의 손을 빌려 썩은 가지를 쳐낸 게 수개월 전이건만, 아직도 그리 많이 남아 있단 말인가.

혀를 찬 맹주는 보고서를 내려보다가 이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일단, 기다리는 게 낫겠군.”

“흑룡단주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처리한 다음에 움직이시겠습니까?”

“아니, 움직이지 않을 걸세.”

“허면…….”

“자네가 짐작하고 있는 방법 그대로 움직일 걸세. 준비해 주게.”

“……알겠습니다.”

맹주의 지시에 고개를 숙인 총군사는 이내 맹주의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총군사가 떠나고, 홀로 남아 찻잔을 만지던 맹주는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구나.”

이런 괴물 같은 녀석이 내 말년에 나타날 줄이야.

* * *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응? 뭘?”

“저거요.”

만귀단의 정원에 앉아 느긋하게 육포를 뜯던 설천위는 유예린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지 냉기를 뿜어내고 있는 얼음덩어리.

얼음 속에 갇혀 있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쟤 의식은 있죠? 어차피 입으로 말하는 것도 아닌데,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대요?”

자신의 옆에서 과일을 깎던 요려의 물음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가 싹 다 얼릴 생각으로 얼려 버려서 그런 거 아닐까?”

친히 근접전으로 팔다리를 전부 잘라 내고, 그 가슴에 직접 흑도를 꽂아 넣으며 얼려 버린 거니까. 말 정도는 못 할 수도 있지.

아니, 보통은 저렇게 의식을 되찾고 눈깔을 돌리는 것도 힘들지 않을까?

역시 연옥의 괴물이야.

음음.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자신이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일등 공신들을 바라봤다.

“몸 상태는 어때?”

“멀쩡합니다!”

“문제없어요.”

“……문제없어.”

호쾌한 대답.

이젠 붕대도 풀어 버린 세 사람을 보던 설천위는 주현운의 팔을 보고 씩 웃었다.

“환골탈태 한 번 더 해야겠네. 그거 은근히 아픈데, 고생해라.”

……환골탈태가 옆집 개 이름이었나.

당연하다는 듯 주현운이 한 번 더 환골탈태를 할 거라고 말하는 설천위의 모습에 모두가 어이없어했지만, 설천위는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문율, 생각보다 더 열심히 했나 보네?”

“네!”

“……맛도 좀 간 것 같고.”

“네?”

“아니야. 혼잣말.”

고개를 갸웃하는 문율에게 웃으며 손을 저은 설천위는 고개를 돌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애를 망친 것 같은데.’

원래 천천히 자신의 재능을 자각해 나가는 아이인데, 너무 일찍 재능을 알려 주고 키우는 방법을 주입했나.

애가 너무 받아들여서 조금 탁해진 것 같은데?

살짝 혼탁해진 문율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거듭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품에서 서책을 꺼내 문율에게 내밀었다.

“이건?”

“불경. 외워.”

“예?”

“곧 돌아올 무해 스님도 붙여 줄 테니까 넌 자기 수양에 집중하도록.”

“네에…….”

비 맞은 강아지처럼 풀죽은 문율의 모습에 지켜보던 여인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지는 저 모습은 반칙 아닌가……?

모두가 스스로와 싸우고 있을 때, 혼자 덤덤하게 설천위의 입에 요려가 깎은 과일을 내밀던 유예린은 기이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익숙한데?

[이 녀석아! 답답하다!]

“……오 단주님?”

“아! 오 단주님! 좀!”

[단주는 무슨! 오 노사(老師)라고 불러라!]

“그냥 오 할아버지라고 부를게요.”

우리 사이에 노사는 너무 딱딱하지.

음음.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유예린이 내민 과일을 베어 물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와꾸가 잡혔습니까?”

[와꾸가 뭐냐?]

“아, 그, 뭐냐. 틀이 잡혔나요?”

[에잉!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써라!]

“넵. 죄송합니다.”

올바른 언어문화를 위해 앞으로 시정하겠습니다요.

빠르게 인정하고 사과한 설천위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오윤을 바라봤다.

“그래서, 해결 방법은 찾았나요?”

[으음, 일단 내가 아는 지식의 범주 안에선 이런 괴물을 완전히 통제할 수단은 없다.]

“그렇겠죠?”

그게 가능했으면 게임 속 육도 세계가 그렇게 개판이 되진 않았겠지.

뭐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육도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은 전원이 신(神)이니까.

다만, 진짜 신(神)과 달리 온전한 신성을 얻지 못해 완전한 존재가 되지 못한 반쪽짜리일 뿐이다.

그러나 힘의 크기나 위력 자체는 신과 거의 맞먹는다고 봐야 옳다.

거기다 지상에서 활동하는 멸(滅) 등급의 재해들.

제천대성이 봉인했다고 하는 그들은 연옥의 괴물들과도 비빌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다.

게임에서도 한 놈 잘못 놓치면 도시 한두 곳은 그냥 사라졌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도 놓치는 순간, 도시 한두 곳은 그냥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괴물이니 그렇게까지 쫄 건 없지만.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과 달리 대인전에 특화된 존재들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특히, 한쪽으로만 치우친 게 아니라 양쪽 모두 영역에 도달한 존재들은 그 전투력 수준이 다르다.

지금의 설천위라고 할지라도 상대조차 안 될 정도의 괴물들이 분명 있다.

그리고 그런 적들을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괴물들의 힘이다.

혼원패공(魂元覇功) 같은 사기적인 능력으로 흡수하거나 해야 하는 건 당연히 아니고, 몇몇 존재들을 굴복시켜서 부하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이게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놈들이 꽤 있다 보니, 일정 수준 이상의 전투력을 보여 주며 전투를 승리하면 부하가 되길 자청하는 놈들이 있다.

물론 배신할 가능성도 있어서 관리를 꽤나 빡빡하게 해 줘야 하지만, 적의 전력을 깎고 이쪽의 전력은 크게 상승시키니 공략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문제는 육도에서 이걸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무력만으로 해결했다는 점이다.

오로지 단 한 명.

단 한 명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만이 무력 이외의 방법으로 연옥의 괴물들을 지배할 수 있다.

정파에서 플레이 가능한 유일무이한 술사 캐릭터.

그리고 무해와 달리 여러 가지 이유로 제약이 붙어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캐릭터.

……지금은 구태여 접근하고 있지 않았지만, 조만간에 접근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아무튼, 그 캐릭터는 어떻게든 연옥의 괴물들을 지배하는 데 성공하니 혹시 몰라 물어봤는데 역시나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안타깝네.”

흑관으로 만들어 낸 몽둥이를 꺼낸 설천위는 탄식했다.

“역사적으로 이만한 약이 없었지…….”

천천히 얼음을 녹여 내며, 설천위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에게 다가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지?”

[이, 이놈……!]

드디어 자유가 된 머리 덕에 말문이 열린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 소리쳤지만, 설천위는 여전히 가증스러운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화산이 먼저 깨질까? 몽둥이가 먼저 깨질까? 참 궁금하네.”

인간이 아니니까 굳이 여러 군데를 때릴 필요는 없겠지?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멈추게 한 설천위는 목 위로만 자유로워진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향해 안타까움을 담아 웃었다.

“내 생각엔 머리 아니, 아니지, 흠흠. 화산이 먼저 깨질 것 같아.”

빠각!

골이 깨지는 소리가 만귀단 전체로 크게 울려 퍼졌다.

부상에 신음하던 만귀단 술사들이 그 타작음에 악몽을 꾸다가 깨어날 정도로 오랫동안 아주 많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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