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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475화 (475/624)

제475화

474화-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9)

“……이렇게 쉽게.”

차가운 얼음이 내려앉은 대지.

조심스럽게 걸어간 소윤혜는 거대한 얼음 속에 갇힌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들은 얼마나 힘들게 이놈을 봉인했던가.

그런데 그 봉인마저 제 손으로 직접 파괴하고 빠져나온 녀석인데…….

그런 녀석을 이리도 쉽게 무력화시키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다.

대체 얼굴을 보지 못한 일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소윤혜가 말도 안 되는 설천위의 능력에 놀라 고개를 가로젓던 그때.

“허허, 부러운가?”

“……맹주님.”

“흑룡단주의 능력을 부러워하는 것 같은 눈치로구먼.”

수염을 쓸며 다가온 맹주의 말에 소윤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럽습니다.”

“허허, 그렇다고 헛된 욕심을 가지진 말게. 자네들의 길은 그와는 달리 올곧게 무(武)를 향하고 있으니.”

“예. 그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무(武)의 재능.

그에겐 없고, 자신들에겐 있는 것.

설천위는 노력과 단련으로 자신에게 없는 그것을 극복해 냈다.

무(武)에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재능이 있다고 떠드는 인간들의 턱주가리를 돌려 버릴 정도의 경지를 손에 넣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노력만으로 일궈 낸 성과가 아니었다.

설천위와 함께하는 혼들의 가르침.

무(武)에서 초인이라 불릴 정도의 위치에 올라선 이들의 가르침을 억지로 몸에 때려 박아 만든, 그야말로 피땀 눈물의 결정체였다.

영적인 재능을 활용해 기어코 손에 닿지 않던 것을 쟁취해 낸 결과물이 바로 설천위의 강함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무(武)의 재능을 활용해서 닿을 리 없던 영역에 자신의 도(刀)가 닿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길은…….

“허허, 내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군.”

선명하게 빛나는 소윤혜의 눈동자에 허허롭게 웃은 맹주는 수염을 쓸어내리다가 몸을 돌렸다.

‘예상보다 더 강해졌군.’

환골탈태까지 거쳤어.

설천위가 진정으로 화경의 경지에 올랐음을 두 눈으로 확인한 맹주는 가라앉은 눈동자로 거인의 가슴을 바라봤다.

저 안에 들어간 설천위가 백화단주와 만귀단주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어떤 목적으로 그는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이미 그의 주위에 과할 정도로 모인 전력을 이대로 방치해도 되는 것인가.

가라앉다 못해 차갑게 식어 버린 눈동자를 맹주는 눈꺼풀로 가려 버렸다.

두 눈을 감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긴다.

“군사.”

“예, 맹주님.”

“뒷일을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흑룡단주를 신뢰하는 것인가, 혹은 이미 책임의 소재가 그에게로 갔으니 자신은 상관없다는 것인가.

맹주의 속내가 어느 쪽인지 짐작이 가기에, 총군사는 그저 고개를 숙여 맹주를 배웅했다.

맹주가 사라지고, 주위를 살핀 총군사는 얼어붙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포위하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요려 님.”

“네?”

총군사의 부름에 흔들던 부채를 접어 가슴골 사이로 집어넣은 요려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노골적인 유혹.

의식한 행동이 아니라 거의 본능적으로 하고 있음에 요려가 어떤 유형의 괴이인지 짐작한 총군사의 목소리는 오히려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흑룡단주님께서 어째서 저 악귀를 바로 소멸시키시지 않고 얼려만 두신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아.”

총군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요려는 웃음을 지었다.

“어머, 저는 잘 모르겠네요. 주인님이 어떤 생각이신지는…….”

“……그렇군요.”

누가 봐도 짐작이 간다는 얼굴인데 말이지.

요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총군사는 일단 한걸음 물러났다.

정보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굳이 흑룡단주의 부하를 들쑤셔서 그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단주가 되고 몇 번 임무도 수행하지 않다가 외부로 발령이 난 흑룡단주다.

자신과 접점도 많지 않았고, 그에 대해 아는 정보도 적었다.

최대한 자극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맞겠지.

총군사가 순순히 물러서자, 이내 재미없다는 듯 입술을 삐쭉인 요려는 부채를 꺼내 살랑였다.

“요려.”

“넵!”

물론, 그 여유로운 태도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한순간에 사라졌지만.

그리고 요려의 반응은 물론이고,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총군사의 눈이 격하게 커졌다.

“……흐, 흑룡부단주?”

“이런, 인사가 늦었습니다. 총군사님.”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체 언제부터?

총군사라고 해도 제갈진천도 초절정에 오른 고수다.

그런 그가 존재 자체도 아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저 눈에 띄는 전이문을 넘어왔을 텐데도.

경이적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놀라운 은신술.

담담하게 모습을 드러낸 유예린의 강함이 자신이 상정하던 것을 가볍게 넘어섰다는 사실을 인지한 총군사는 머릿속에서 흑룡단에 대한 평가를 조금 더 높였다.

총군사가 그렇게 열심히 머리를 굴리든 말든, 얼음에 갇힌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바라보던 유예린은 요려를 자신의 곁으로 불렀다.

은밀하게 기막을 펼친 유예린은 얼음을 보며 요려에게 물었다.

“의심할 만한 사람은 있었나요?”

“으음……. 일단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만귀단의 배신.

충격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무림맹 전체를 단숨에 집어삼킨 결계는 만귀단의 배신만으로는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 점이 많았다.

만귀단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났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언여휘 한 명에게 휘둘려 이 꼴이 났다는 게 더 우습지 않은가.

“상황을 몰라 정확한 정보를 전하지 못한 게 아쉽네요.”

“주인님의 연락은 일방적이니까요.”

설천위와 그 휘하의 부하들 사이에 이어지는 염력 대화는 설천위의 의견만 전달되는 일방통행이다.

설천위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그것도 거리가 심하게 멀어지면 명령을 내리는 데 소모되는 힘이 상당해서 막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힘도 아니었다.

다만, 무림맹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았다면 어떻게든 정보를 전해 요려가 의심할 만한 인물들을 살필 수 있게 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이조차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개선될 것 같지만요.’

아쉬움을 느끼면, 또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개선될 테니 문제없나.

거인의 가슴팍 안으로 사라진 설천위를 떠올리며 이내 아쉬움을 털어 낸 유예린은 주위를 살폈다.

경계하는 무인들.

이쪽을 바라보는 눈에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유 부단주.”

“설란 언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자신에게 다가온 설란을 잠시 바라본 유예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저희가 있던 곳에서도 언여휘가 나타나서 깽판을 부렸기에 혹시 몰라서 최대한 빨리 돌아왔어요.”

“……너.”

평소와 같은 예의 바른 태도.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부드러움은 원래의 유예린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유예린의 변화를 눈치챈 설란은 잠시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변화면 좋은 변화지, 결코 나쁠 건 없는 변화다.

“그래. 고맙구나. 몸은 괜찮니? 실종된 동안 상태는? 아버지께 연락은 받았는데…….”

“괜찮아요. 저도, 천위도.”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지는 설란의 모습에 유예린은 작게 웃었다.

설란이 유예린이 평소와 같지 않다고 느낀 것만큼이나 유예린도 설란이 평소와 다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으면 그 냉철한 설란이 이렇게나 많은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 내겠는가.

“그래? 다행이야.”

유예린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설란은 그 옆에 있는 요려를 바라봤다.

“……내 동생이 속 썩이진 않았고?”

“뭐, 여자 문제로 조금 속을 썩이긴 했죠. 어쩔 수 없이 포기했지만요.”

“……그래?”

오, 살기.

유예린의 옆에서 얌전히 듣고 있다가 살을 에는 것 같은 차가운 기세를 느낀 요려는 손발을 떨며 유예린을 붙잡았다.

유예린의 소매를 잡고 흔드는 것이 빨리 변명 좀 해 달라는 애처로운 몸짓이라 살짝 웃겼지만.

“얘는 아니에요. 얘는 유혹하려다가 실패했거든요.”

“……주인님이 좀 이상한 거거든요?”

다른 남자들은 다 넘어왔는데……!

유예린의 웃음에 입술을 삐쭉인 요려가 괜히 발로 돌멩이나 차고 있을 때.

어느새 차가운 기세를 거둔 설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대체 누구?

“사천맹주에 새로 오른 백유라고, 그 여자가 제1 경계 대상이에요.”

“……그게 무슨 헛소리니?”

무려 설란의 입에서 과격한 표현이 나올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소식이었지만, 유예린은 담담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요. 저도 제 남편이 될 사람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건지 궁금하네요.”

뭐, 침은 자신이 가장 먼저 발라 놨으니 문제없지만.

백유 외에도 군침을 흘리는 인간들이 없는 건 아닌데……. 그쪽은 상황을 봐서 해결하면 되니까.

어깨를 으쓱인 유예린은 다시 몸을 돌려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바라봤다.

“……대체 어디까지 올라갈 생각인지.”

이 괴물을 먹어 치우면, 또 얼마나 높이 올라갈까.

뒤를 따라가는 사람도 좀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참 높이 올라선 자신이 그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반대가 됐네.

“나쁘지 않네요.”

“예?”

“혼잣말이에요.”

고개를 갸웃하는 요려를 향해 웃어 준 유예린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 중이던 설란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음? 무슨 일이니?”

“아무래도 저쪽 일은 끝난 것 같아요. 저희도 준비를 하죠?”

설천위가 들어간 거인의 가슴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 * *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 실패?”

“그것도 완전히 봉인 당했다고?”

일렁이는 분노.

몇몇 무형의 존재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보통의 사람들은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그 속에서 한 소녀가 당과를 흔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으응~. 봉인 당한 거로 끝이면 다행 아닐까?”

“언여휘, 말은 잘하는구나. 이번 계획의 대부분은 네년이 입안한 것일 텐데?”

“책임을 질 준비는 되어 있겠지?”

이글거리는 목소리가 혼을 짓누를 기세로 압박해 왔지만, 언여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모두가 동의해서 한 거잖아. 쪼잔하게 굴기는…….”

“네년……! 뚫린 입이라고 다 말이 되는 줄 아느냐? 고작해야 인간 주제에……!”

“그 인간을 어찌하지 못해서 피똥 싸고 있는 게 당신들인데? 그거 누워서 침 뱉기인 거 알지?”

히히 웃으며 당과를 흔든 언여휘는 이내 그것을 입에 넣고 씹어 깨부쉈다.

“뭐, 책임을 질 생각은 없지만, 다음 계획은 들고 왔지.”

“꺼져라. 네년의 계획을 더 이상 신뢰할 순 없다.”

“에헤이, 이번에는 실패했고 저번에도 조금 실패했지만, 설천위가 개입하지 않은 경우엔 전부 성공했잖아?”

진정하라는 듯 손을 흔든 언여휘는 곤옥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내밀었다.

“이번에는 특별히 대출혈이야! 이번 경품은 내가 제공할게.”

탁자 위에 올린 곤옥을 손가락을 튕겨 원탁의 중앙까지 보낸 언여휘가 히죽 웃었다.

“축생(畜生)의 곤옥.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실패했으나, 그가 현신하면서 뚫린 길은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설천위에게 번번이 막히긴 했지만, 연옥과 현세 사이의 벽은 몇 번이고 뚫려서 구멍이 벌어진 상태다.

조금 무리한다면 연옥의 괴물들이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는 수준이었다.

충분한 미끼만 건다면, 이 기회를 잡으려는 자가 없을 리 없었다.

그리고.

“……내가 움직이지.”

“오오, 결단 빠른데?”

미끼를 단숨에 문 월척이 펄떡였다.

곤옥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손에 쥔 이를 바라보며 언여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무대가 필요한데, 도움을 줄까?”

“아니, 필요 없다.”

언여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존재는 거대한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다.

“마침 딱 맞는 무대가 있으니까.”

축생도(畜生道)는 짐승들의 세상.

욕망으로 가득 찬 그곳은 살인조차 우스운 지옥이다.

그곳에 딱 알맞은 장소가 있지 않은가.

손을 대는 놈들이 많아서 시간은 걸리겠지만, 최고의 순간을 위해서라면 그 잠깐을 못 기다리겠는가.

“대업의 준비를 시작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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