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4화
473화-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8)
얼음의 대지, 화염의 하늘.
비현실적인 공간은 지독한 화산의 대기를 단숨에 밀어내며 영역을 넓혔다.
[노오옴!]
순간적으로 힘 싸움에서 밀린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노성을 내지르며 더욱 힘을 더했다.
거인의 주위로 한정되던 화산의 대지가 다시 그 크기를 넓혀 나간다.
이윽고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과 설천위 사이에서 두 영역의 경계가 멈춰 섰다.
힘의 균형이 맞춰졌다는 증거다.
물론.
‘말도 안 되니라……!’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자신이 고작 인간의 자성영역을 밀어내지 못하고 막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아서다.
이쪽은 연옥에서 수천 년을 버틴 반신(半神)이고, 저쪽은 고작해야 인간이다.
그런데 정신력 싸움이나 마찬가지인 영역 싸움에서 서로 동수를 이룬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린가?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냐.”
거기다 보라, 저 여유로운 태도.
전력을 쥐어짠 것도 아니라는 소리다.
“흠, 그나저나 굳이 불까지 불러낼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하늘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굳이 바꿀 필요 없겠지.”
[놈! 감히 나를 눈앞에 두고 그런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냐!!]
장난스럽기까지 한 설천위의 모습에 결국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 분노를 토해 냈지만, 그의 고함에도 설천위는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단한 양반이라고 내가 긴장을 해?”
조롱이다.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저리 애쓰고 있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질 않지 않은가……!
고작해야 인간 술사가.
술사 나부랭이가 영력 좀 다룬다고 자신을 이토록 무시할 순 없…….
[……네놈?]
화산처럼 폭발하려는 분노를 겨우 참아 내던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여유롭기 그지없는 설천위의 모습을 눈에 담다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끓어오르던 화산에 거대한 빙하를 쑤셔 박은 것처럼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술사 나부랭이는 으레 빈약한 몸뚱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명상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한데, 무(武)의 수련?
어림도 없는 소리지.
저 안에서 숨이 거의 넘어갈 듯한 노인네도 그렇고, 저 앞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여자도 그렇고.
자고로 경지에 오른 술사라 함은 저리도 나약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어야 정상이거늘.
……넌 어째서 근육이 그렇게 많으냐?
헐렁한 무복 사이로 여실히 드러나는 설천위의 근육.
그냥 몸이 탄탄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가학적일 정도의 혹독한 수련을 수년간 반복한 게 아닌 이상 얻기 힘든, 크기는 크기대로 크고 갈라질 곳은 갈라질 대로 갈라진.
진짜배기 몸이다.
일반적인 술사의 몸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몸이다.
거기다.
“도(刀)가 나으려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술법으로 만들어 낸 도를 쥐는 저 자세를 보라.
누가 봐도 상당한 수준까지 무예를 단련한 무인의 그것이 아닌가.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동작만으로 저자가 얼마나 도(刀)를 많이 쥐어 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 네놈? 무인인 것이냐?]
“응? 어, 그렇지. 나름 단주니까.”
화경 정도 됐으면, 무인이라고 자칭할 수 있겠지?
순백의 화염이 피어오른 자신의 흑도를 어깨에 걸친 채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화산의 재(災)를 품은 악귀. 그 힘은 대량 살상에 특화되어 있으며,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물리력은 웬만한 강자들조차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지.”
느긋한 걸음으로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에게 다가가며 설천위는 어깨에 걸쳤던 도(刀)를 내려 허공에 휘둘렀다.
유황 냄새가 사라지고, 지독할 정도도 짙은 영력이 뻗어 나간다.
“약점은 화산의 폭발을 방어할 수 있을 정도의 무인에겐 사용할 수 있는 수가 한정적이라는 점. 그리고.”
[꺼져라!!]
바닥에서 솟구치는 바위와 용암을 설천위의 도가 단숨에 쓸어 낸다.
그냥 강기를 휘감은 무기였다면 전부 치워 내는 데 꽤나 고생을 했을 일격이었지만, 짙은 영력을 품은 설천위의 도(刀)는 깔끔하게 모든 것을 지워 냈다.
이 용암도, 바위도 결국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 영력을 소모해 실체화시킨 것이니까.
“영력과 무(武)를 동시에 일정 수준 이상 뛰어넘은 적에겐 별다른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점이지.”
[괴물 놈!!]
“어허, 괴물한테 괴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섭섭하지.”
무공과 술법.
이 두 가지를 전부 초인의 경지까지 끌어올렸으니 괴물이라는 단어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가볍게 땅을 박차며 설천위는 도(刀)를 휘둘렀다.
일전에 맹주는 극에 이른 바람의 묘리로 막아 냈고, 소윤혜와 주현운, 문율은 무학의 정수를 끄집어내서 막았던 공격이 쏟아진다.
화경급 고수라도 목숨이 위험해질 공격이 마구 쏟아지는데.
그 속에서 설천위는 거침없이 달려갔다.
쏟아지는 공격?
지워 버린다.
기(技) 따위 없다.
힘.
오로지 힘!
압도적인 힘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공격 전부를 지워 낸다.
그렇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설천위는 화산의 대지에 얼음의 족적을 남기며,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코앞에 도달했다.
“아쉽게 됐네.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술법과 무공을 둘 다 일정 수준 이상 익힌 적에게는 약하다.
이건 반대로 말하면 술법과 무공 어느 한쪽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익힌 적에겐 절대 약하지 않단 소리다.
높은 물리 방어력을 지닌 신체와 유기적으로 연동되는 영력이 만들어 낸 맷집.
술사들은 그를 해칠 순 있어도 그의 자성영역에서 버티며 그의 방어를 뚫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고.
무인들은 그의 자성영역을 견뎌 내고 공격해도 그 공격이 통하질 않는다.
버티기에 참으로 알맞은 능력이고, 그가 이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연옥의 길이 점점 더 확장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가장 먼저 연옥에서 빠져나온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선택이었다.
그가 화산처럼 용암을 쏟아 내며 버티고 있는 것 하나만으로, 연옥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거니까.
어떤 미친놈이 무공과 술법을 둘 다 초인의 경지까지 익히겠는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 선발대로 나온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선택이다.
“뭐, 원래 인생이란 게 운빨 아니겠어?”
[그 입 닥쳐라! 고작해야 인간 따위가 나를 훈계하는 것이냐!]
“훈계가 아니라 놀리는 건데.”
반항하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팔을 단숨에 잘라 낸 설천위는 상처 부위에서 터져 나오는 용암을 왼손을 뻗어 막아 냈다.
손바닥에서 피어난 흑관이 단숨에 용암과 바위를 먹어 치운다.
그 안에 담긴 주력(呪力)마저도 일순간에 해소해 버린 설천위는 차갑게 굳어 버린 용암을 대충 던져 버리며 웃었다.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신(神)의 의지를 보여 줬으면 좋겠어.”
설천위의 도(刀)가 다시 한번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남은 팔을 잘라 낸다.
쏟아지는 용암은 이번엔 바닥에서 솟구친 냉기에 식어서 바로 굳어져 버렸다.
완벽한 통제.
이 전투의 우위가 누구에게 있는지는 세 살짜리 아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실력 차.
빠르지 않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는 설천위를 앞에 두고,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두 눈은 서서히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 * *
“오 단주님!”
설천위가 일방적으로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몰아붙이는 사이.
여유를 되찾은 성화린은 영력을 몸에 휘감고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영역을 뚫고 달렸다.
순식간에 도착한 거인의 몸체.
힘을 쥐어짜 몸체를 기어 올라가니 봉인이 깨진 가슴팍에 닿았다.
기어코 거인의 가슴에 올라선 성화린은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재빨리 달려갔다.
“오 단……. 아니, 할아버지!”
“……화린이냐?”
뿌옇게 변한 두 눈.
원래 말랐지만, 이제는 앙상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팔다리.
……늦었다.
“할아버지……!”
앙상한 몸을 끌어안고, 성화린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켰다.
이렇게 또 보낸다.
첫 번째 스승도.
두 번째 스승도.
자신에겐 이들이 부모인데.
어째서 항상 이렇게……!
분노는 증오가 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살의가 된다.
수많은 자연을 품는 순수한 성화린의 영력이 붉게 물들어 간다.
“……화린아.”
품 안에서 그것을 느낀 만귀단주는 손을 뻗어 성화린의 뺨을 만졌다.
“먹혀선 안…… 된다. 악귀에게도……. 자신의 감정에게도…….”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가며, 만귀단주는 성화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는 두드리고자 했으나, 이미 그의 손에는 그만한 힘이 없었기에 힘없이 어깨에 올린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놈은…….”
“……흑룡단주가 도착했어요.”
“……그래.”
이제는 시간이 없음을 직감하고 결과를 묻는 만귀단주에게 성화린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가서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술법이 말도 안 되게 발전했어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정도는 손쉽게 소멸시킬 수 있을 거예요.”
“그, 아이라면 소멸시키진…… 않을 게다.”
“예?”
“……젊은 시절의 나를 닮은 녀석이지.”
만귀(萬鬼).
세상천지에 있는 모든 악귀를 자신의 발아래에 두리라.
만귀(萬鬼)의 주인이 되어 이 시대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 다짐했던 시기가 오윤에게도 있었다.
만귀단주가 되고, 현실에 깎여 나가며 잊어버렸을 뿐.
반면, 흑룡단주는 자신과 달리 능력이 있다.
진정으로 만귀를 자신의 발아래에 둘 수 있는 능력이.
무슨 재능인지, 어떤 술법을 근간에 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용을 다루고 패기(覇氣)라는 독특한 힘을 사용하는 것부터 부족한 무재(武才)를 노력과 독기로 어떻게든 채워 넣는 독심까지.
그는 더 강해질 거고, 더 높은 곳에 오를 거다.
그를 따르는 재능 있는 전우들도 있으니 더더욱 높은 곳에 오르겠지.
자신이 젊은 시절 꿈꾸던 만귀의 주인이 되는 것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전해 다오. 그에게…… 맡기겠다고.”
점점 더 가빠지는 호흡을 억누르며,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로 만귀단주는 힘겹게 자신의 유언을 전했다.
“만귀단을…… 그에게…….”
“……할아버지!”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쓰러지는 오윤.
그리고 그런 오윤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성화린.
“아직, 아직 다 못 들었어요! 끝까지 말해 주세요! 예?”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린애처럼 오윤을 붙잡고 우는 성화린의 목소리가 서서히 작아진다.
슬픔만을 품고 무너져 있기엔 그녀의 등에 짊어진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일어서기를 선택했다.
죽은 술사의 혼이 이제 몸을 빠져나올 것이다.
떠나가는 혼에게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으니까.
최대한 담담하게 웃는 얼굴로 보내 주…….
“다 못 들었으면, 끝까지 들을까요?”
“너?! 대체 어떻게?”
벌써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처리했다고?
어느새 자신의 뒤에 나타난 설천위의 모습에 성화린이 두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상성이 좋다고 해도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연옥의 괴물이다.
이렇게 손쉽게 마무리할 수 있는 적이 아닐 텐데?
“아아, 지금 대화의 순간이라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저기에 두고 왔어요.”
저기라는 말에 고개를 돌린 성화린은 충격적인 광경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손발이 잘린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육체가 거대한 얼음 속에 갇혀 있었다.
이쪽을 노려보는 두 눈에 독기가 가득한 것이 아무리 봐도 대화를 할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만귀단주님의 얘기를 끝까지 못 들었으면 들어야죠?”
“잠깐, 그게 무슨…….”
“마침 잘됐네요. 책임도 지셔야 하니. 나이 드신 분을 부린다는 거부감이 없어서 좋겠어요.”
도를 꺼내 든 설천위는 당황해하는 성화린을 무시하고 그대로 도를 찔러 넣었다.
단숨에 오윤의 심장을 관통하는 도(刀).
그리고.
[이, 이게 무슨?]
죽기 직전의 초췌한 모습이 아닌, 딱 성화린이 알던 평소의 모습 그대로 나타난 만귀단주 오윤의 혼이 당황하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어떻게 되긴요.”
당황해하는 두 사람을 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올렸다.
“한 칠십 년 정도는 더 일하셔야 한다는 소리죠.”
부하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한 것치고는 꽤나 싼값의 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