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3화
472화-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7)
만귀단의 장원.
삼엄한 경계 속을 소윤혜는 담담하게 걸어갔다.
그녀가 걸어가자, 한껏 긴장한 이들이 경례를 하거나 길을 비켰다.
무려 화경급 고수임이 드러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런 주위의 반응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침없이 걸어간 소윤혜는 이내 봉인의 앞에 도착했다.
빛으로 이루어진 사슬에 묶여 두 무릎을 꿇고 양팔은 뒤로 당겨진 모습.
훤히 드러난 가슴 안에는 이 봉인의 핵심이 된 만귀단주의 뒷모습이 보였다.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힘없는 뒷모습을 보면 불안감이 턱까지 차올랐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지금 당장에라도 이 봉인이 깨지는 것은 아닐까.
대응할 수 없는 적이 언제 풀려날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오는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이곳을 지키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특히, 만귀단주의 영웅적인 모습을 알리기 위해 모든 단에서 나눠서 경계 업무를 서고 있으니 거의 모든 이들이 만귀단주의 불안정한 상태를 알고 있었다.
“누님.”
“……내가 분명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했지?”
“에이, 뭐 그렇게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요.”
“그게 심한 상처가 아니면……!”
등 뒤에서 나타난 주현운의 능청에 거칠게 나오려는 말을 삼킨 소윤혜는 한숨과 함께 손을 뻗었다.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의원님들이 그랬잖아.”
“에이, 무인이 이 정도 화상으로 죽겠어요?”
화상.
주현운의 팔을 칭칭 휘감은 붕대를 보며 소윤혜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화상이 심한지 누런 진물이 붕대에 스며 나오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이곳으로 나오기 전에 갈아 줬는데…….
상처가 낫더라도 웬만한 사람은 기겁할 정도의 끔찍한 흉터가 남을 거다.
아니, 팔을 온전히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다.
무(武)의 화신이라고 불러도 될 주현운에게 이런 족쇄를 채우다니.
자신의 무력함이 만든 결과물에 소윤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력(呪力)도 완전히 제거한 게 아니라 억눌러 놓은 것에 그친 수준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후회도, 반성도 아니고 저 주력을 심어 놓은 원인을 제거하는 일이다.
화상이야 어떻게든 회복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고, 팔이 불편해진 것은 자신이 평생 옆에서 챙겨 주는 것으로 속죄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주현운을 살리는 것.
입술을 깨물고 눈을 빛내는 소윤혜의 모습에 주현운은 어색하게 웃었다.
‘생각하는 게 너무 뻔히 보이는데.’
하긴 그게 아니면 굳이 이곳을 수시로 들락날락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소윤혜도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님을 알기에 이렇게 무리해서 이곳으로 찾아오는 것은 좋지 않았다.
“누님, 저 슬슬 서 있기 힘든데 같이 돌아가죠?”
“나는 조금만 더 상황을…….”
“에헤이, 환자를 혼자 보낼 생각이신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팔을 흔드는 주현운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소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병실로 돌아가자.”
“좋아요. 자자, 돌아갑시다.”
처음 봤을 땐 무슨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협객처럼 굴더니, 이제는 꽤나 능글스러워졌네.
자신의 등을 미는 주현운의 손길에 작게 웃은 소윤혜가 마지못해 발을 옮기는 그 순간.
쿵!
거대한 맥박에 주현운과 소윤혜의 걸음이 딱 멈췄다.
빠르게 주위를 훑는 두 사람.
평범한 얼굴로 경계를 서는 무인들이 보인다.
그리고.
“허, 허억?!”
기겁한 술사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현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술사들이 무언가를 느꼈다! 지금 당장 단주님께 보고를!”
“백화단주님께 연락을 넣어라!”
순식간에 긴박해진 분위기.
그리고.
쿵!
또 한 번 맥박 치는 무언가에 소윤혜와 주현운의 시선은 한 군데로 고정됐다.
봉인된 거인의 가슴.
결계 속에 스스로를 가둔 만귀단주의 등이 희미하게 흔들린다.
‘한계에 도달했다……!’
생기가 꺼져 가는 그 위태로운 떨림에 소윤혜는 즉시 움직였다.
순식간에 결계의 앞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자세를 낮췄다.
적이 결계를 뚫고 나오는 순간, 베겠다.
그런 의지가 서린 자세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지독할 정도의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옆에서 소란을 피우던 무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물러날 정도로 지독한 살기.
그 살기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기에 주현운은 쓰게 웃으며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누님.”
“물러서 있어.”
“누님도 중환잡니다. 내상은 물론 외상도 심해요.”
“그래도 너보단 멀쩡해.”
네가 지켜 준 덕에.
뒷말을 삼킨 소윤혜는 굳게 입을 닫은 채 앞을 노려봤다.
결계가 깨지는 순간, 베어 내리라.
통할지 모르겠지만, 봉인에서 막 풀려난 상태라면 치명상 정도는 가할 수 있겠지.
자신에게로 관심이 쏠리면 그걸로 충분하다.
시간만 끈다면 맹주와 백화단주가 도착할 거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자신의 역할은 지킬 수 있는 이들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히…….
“아니, 진짜!”
소윤혜가 굳게 의지를 다지는 그 순간.
짜증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소윤혜의 뒷덜미를 잡아챈 주현운이 그녀를 뒤로 잡아당겼다.
“너, 너!”
“검을 든 무인이 소중한 사람 뒤에 숨는 거 봤어요?”
당황하는 소윤혜를 향해 한마디 툭 던진 주현운은 검을 뽑으며 웃었다.
“죽어도 내가 먼저 죽어요.”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럼 누님은 뭐, 말이 되는 행동을 했나?”
어깨를 으쓱이며 소윤혜의 분노를 넘긴 주현운은 검을 든 채 봉인을 바라봤다.
풀려나면 일검.
소윤혜보다 베는 것에 자신이 있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 무학의 천재 아닌가?
치명상 정도는 얼마든지…….
“풋풋하네요~.”
“……요려 님?”
“에이, 주인님의 친한 동생분들…… 은 아니구나. 아무튼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자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는 요려의 행동에 소윤혜의 미간이 찡그려졌지만, 소윤혜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괜히 반박했다간 초라해지는 건 자신이니까.
……설천위보다 자신의 나이가 더 많은 건 사실이고.
입술을 삐쭉이는 소윤혜의 모습에 주현운은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귀엽기는 엄청 귀엽네.
누가 연상이라고 생각하겠어?
피식 웃으며, 소윤혜의 머리에 손을 올린 주현운은 후후 웃고 있는 요려를 바라봤다.
“그래서, 무슨 용무이신가요?”
“아, 그렇게 비장한 각오는 안 하셔도 된다는…….”
요려가 웃으며 두 사람을 진정시키려는 그 순간.
허공에서 일어난 바람과 함께 두 사람이 땅으로 착지했다.
맹주와 백화단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도착한 두 사람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봉인은?”
“요동치고 있습니다!”
“으음.”
즉각 들려오는 보고에 맹주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백화단주를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하오, 백화단주?”
“아무래도 힘을 회복한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 저항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한 백화단주는 조용히 봉인을 바라봤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봉인도, 만귀단주의 생명도.
입술을 깨문 백화단주는 마침 이 자리에 있던 요려를 발견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요려 님, 지금 흑룡단주는…….”
“아, 그거라면.”
쿵!!
요려가 대답하려는 순간, 이번에는 땅이 흔들릴 정도의 거대한 맥박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순식간에 모든 이들이 긴장된 눈빛으로 봉인을 지켜보고.
쩍!
“전원 전투 준비! 일류 이하의 무인들은 후방으로 물러나라!!”
봉인에 선명하게 생긴 균열과 함께 맹주가 소리쳤다.
내공을 싣고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무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대응이 가능한 절정 이상의 고수들은 남고, 일류 이하의 병력들은 전부 물러났다.
그리고.
“이건 좋지 않군.”
드물게 감정을 드러낸 맹주의 목소리와 함께 균열이 급속도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봉인은 얼마 안 가 깨진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균열이 생겨난 봉인은 위태롭게 일렁였다.
이대로는 만귀단주가 죽는다.
그 사실을 직감한 백화단주는 수인을 맺으며 술법을 준비했다.
원화(元化)의 술(術).
이 생명을 태우더라도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만큼은…….
“저기…….”
집중한 상태로 주문을 준비하던 백화단주는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색하게 웃으며 부채를 자신의 가슴골 사이에 넣은 요려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까 물어보신 것에 대한 답입니다.”
가벼운 박수 소리가 퍼져 나가고.
요려의 발 앞에 생겨난 영력은 일렁이며 그 몸을 부풀린다.
그리고.
쿵!
또다시 울려 퍼지는 거대한 맥박과 동시에, 일렁임이 멎은 거대한 문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쩡!!
[크하하하하!]
이윽고 봉인이 풀려나고.
봉인에서 빠져나온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 웃음을 터트렸다.
[끝났다. 어리석은 인간 놈들아! 내가 돌아왔…….]
텅!
순간 반사적으로 몸의 강도를 올린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날아갈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의 온몸을 뒤흔드는 강렬한 충격에 비틀거렸다.
몸을 단단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분명 사지 중 한 곳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물리적 충격이 아니라는 사실에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눈이 부릅떠졌다.
예사롭지 않은 영력이 깃든 일격.
대체 누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이건 뭐, 잠깐 나갔다 돌아왔더니 집이 아주 개판이 됐네.”
한숨 섞인 목소리는 분명 처음 듣는 낯선 것이었지만.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직감했다.
아.
이놈은.
[노오옴……!]
절대 살려 둬선 안 되는 종류의 인간이다.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순식간에 영력을 끌어올렸다.
솟구치는 용암과 암석들.
평범한 인간이라면 닿는 순간 죽음을 직감할 수 있을 정도의 끔찍한 공격이 적을 향해 쏟아졌다.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라. 꽤나 까다로운 녀석이 소환됐네.”
그러나 그런 공격 전부를 허공에 만든 검은 벽으로 막아 낸 설천위는 담담한 눈빛으로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살폈다.
“근데, 꽤나 상태가 안 좋네? 거인이랑 분리됐는데, 힘이 이 정도인 것도 그렇고…….”
검은 벽조차 뚫지 못하는 용암과 바위들을 양옆으로 쓸어 내며 길을 튼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며 걸어갔다.
“우리 애들이 꽤나 애썼나 보네.”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확신한 설천위는 붕대를 곳곳에 감은 주현운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고생했어.”
“설 형, 전…….”
“에헤이, 이 정도면 훌륭하지.”
고개를 젓는 주현운을 보며 호쾌하게 웃은 설천위는 그 뒤에 있는 소윤혜를 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우리 소 누님도 고생 좀 했네. 키가 반쪽이 됐……. 아, 원래 작았나?”
“너……!”
이 상황에서 놀리고 싶냐……!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데도 여전히 바뀐 게 없는 설천위의 모습에 소윤혜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넌 원래 이런 녀석이지.
긴장을 풀고 피식 웃는 소윤혜의 모습을 확인한 설천위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현운은 이내 놀란 눈으로 자신의 팔을 내려봤다.
‘……그새 지웠다고?’
억눌러 놨던 주력(呪力)이 사라진 게 느껴졌다.
화상의 통증을 넘어 혼을 위협하던 무언가가 사라진 느낌.
대체 못 본 사이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이런 일을 이리도 간단하게…….
주현운이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설천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맹주와 백화단주의 곁에 도착한 설천위는 웃으며 성화린을 바라봤다,
“누님.”
“……왔구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다음은 제가 할게요.”
자신이 하겠다.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깃든 그 말에 백화단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할게.”
“그래 주시면 고맙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맹주를 보며 웃었다.
“맹주님도 뭐, 하실 말씀 있나요?”
“허허, 못 본 사이에 괴물이 돼서 돌아왔구먼, 흑룡단주.”
“에헤이, 끝없이 성장하는 것이 젊은이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본분 정도로 취급할 성장이 아닌 것 같은데.
능청스러운 설천위의 태도에 허허롭게 수염을 쓸어 낸 맹주는 이내 날카로운 눈으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할 수 있겠나?”
“저거요?”
맹주의 물음에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은 설천위는 힘을 끌어모으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가리켰다.
“연옥 중에서도 최약체인 녀석인데, 저것도 처리 못 하면 앞으로 고달파지죠.”
[누가 최약체라는 거냐! 인간 놈!]
“발끈하는 것도 허접하네.”
설천위가 피식 웃는 순간, 끌어올렸던 힘을 풀어내며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 두 손을 대지에 박아 넣었다.
[자성영역(自省靈域) 연옥천려화산(煉獄千戾火山)]
순식간에 인간의 숨을 틀어막는 화산의 풍경이 펼쳐지고, 호흡조차 힘들어진 대기 속에서 양손을 앞으로 모은 설천위가 웃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성영역(自省靈域) 동염지천지락(凍炎之泉池落)]
화산을 밀어낸 얼음의 대지 위로 화염의 하늘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