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1화
470화-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5)
찰나의 순간.
주현운과 같이 괴조에서 뛰어올라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머리 위로 도약한 소윤혜는 확신했다.
‘벴다!’
도약과 거의 동시에 휘두르기 시작한 도(刀)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지척에 닿은 지금, 정확하게 시작점에 닿았다.
완벽한 순간.
완벽한 시작.
이대로 휘두르면, 베지 못할 수가 없다.
무조건 벨 수 있다.
이건 확정이다.
이대로 휘두른다면 확실하게 벨 수 있으리라.
그러나.
‘벨 것이냐?’
자신을 올려보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눈에 가득 찬 장난기.
도발인지 함정인지 모를 눈빛.
이 순간의 선택이 생과 사를 가른다.
극한의 상황.
찰나에 찰나를 겹친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소윤혜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물론.’
[악신참수(惡神斬首)]
거침없이 휘두른 도(刀)가 그 궤적을 완결 짓는다.
그것은 설령 신(神)이라고 할지라도 그 목에 죗값을 묻는 단죄(斷罪)의 일격.
그 시작.
이제 겨우 역천의 힘을 품기 시작한 일격.
미약하지만, 미숙하진 않았다.
유리 재질과 같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피부를 베고, 살을 가르고, 뼈를 끊어 낸 도(刀)가 반대쪽으로 빠져나오고.
[인간은.]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입꼬리가 비틀린다.
[여전히 어리석구나.]
비웃음이 가득한 조롱과 함께, 잘려 나간 목의 단면이 끓어오른다.
거품이 올라오고, 터진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그 광경을 똑똑히 목격한 소윤혜는 그저 도(刀)를 당겼다.
최선을 다해 막는다.
하지만, 막지 못한다면 거기까지일 뿐.
구차하지 않게, 담담하게 자신이 해낸 일의 결과를 감당해 내기 위해 이를 악문다.
뒤쪽에서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괴조를 박차고 한 번의 공격을 노린 주현운과 문율이다.
그들이 용을 쓰는 재주가 있어도 지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능력은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자신을 가장 도울 여건이 되는 맹주는 먼저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구조는 후순위라는 듯 절대 뚫리지 않을 호신강기를 몸에 두른다.
‘……됐어.’
목을 벴으니, 아무리 괴이라고 한들 큰 타격이 있을 터.
이 정도라면 남은 무림맹의 전력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다.
도(刀)를 통하지 않는 방식으론 썩 익숙지 않아 어설프게 호신강기로 막아 내며 소윤혜는 각오했다.
살아도 멀쩡한 몰골은 아니겠네.
……땅딸보에 피부까지 뭉그러진 여자는 인기 없을 텐데.
아니, 이건 남자여도 똑같나.
자조적으로 웃으면서도 착실하게 몸을 가리는 그 순간.
“절대 안 됩니다!!”
치이이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따스한 온기가 소윤혜를 감쌌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조합.
그리고.
“어떻게?”
“다 방법이 있지요!”
쏟아지는 용암을 어떻게든 받아 낸 주현운은 그 안에 서린 지독한 주력(呪力)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거구나.
이게 놈이 준비한 한 수였어.
근접 거리에서 맞출 수만 있다면, 아직 미숙한 영력을 가진 우리들은 이겨 낼 수 없었을 테니까.
이를 악문 주현운은 소윤혜를 감싼 채 낙하를 시작했다.
그의 뜻에 반응한 괴조가 재빨리 날아와 발밑을 받친다.
겨우 괴조의 등에 안착한 주현운은 그제야 소윤혜를 놓고 이를 악물었다.
왼팔이 완전히 열과 주독에 침범당했다.
‘잘라 내?’
이대로 주독이 밀려오면……!
“윤혜야! 주 공자를 이쪽으로!”
주현운이 고민하는 순간, 밑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윤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당장 아래로 가! 백화단주님이면 주력을 막을 수 있어!”
주력(呪力).
악귀들이 뿜어내는, 혹은 사용하는 이 저주의 힘은 혼을 우습게 일그러트리고 소멸시킨다.
그런 힘을 이겨 내기 위해선 혼에 직접 작용하는 힘, 영력이 최선이다.
소윤혜의 다급한 재촉에 주현운은 입술을 깨물고 위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주현운이 마음을 먹자, 그에 반응한 괴조가 아래로 향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혀를 쯧쯧 차며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자신의 머리를 집었다.
[인간은 여전히 어리석구나.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또 비참하게 버려지지.]
“저것이 의협(義俠)이오.”
자신의 말에 맹주가 반박하자, 자신의 목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더욱 활짝 웃었다.
[그렇다면 네게는 의협이라는 게 없구나? 나름 이 무리의 머리라고 하는 작자가 말이야.]
비웃음과 같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물음에 맹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웅심을 품기에는 이미 늙은 가슴은 너무 쪼그라들어 버려서 말이오.”
[카하핫! 네놈도 보통 놈은 아니구나. 하지만, 어리석은 것은 똑같아.]
저 젊은 놈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했고.
[네놈 같은 늙은이들은 꼭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리더군.]
늙었기에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는 법이거늘.
공수래공수거는 무슨, 그건 부처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범인(凡人)은 쥐어야 하는 것만큼은 반드시 쥐어야 노후와 사후가 편안해지는 법이다.
소윤혜를 버리고 자신을 지키기를 택한 맹주의 선택을 비웃으며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손을 마주했다.
[뭐 됐다. 저 아해들을 죽이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무의미한 싸움의 반복.
그것만큼 의미가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서로 힘만 빼는 수준이 아니라 서로 힘도 제대로 못 빼는 수준이니 아무런 가치도 없는 싸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보다 더 독한 아이구나.’
목을 베였다고 죽진 않지만, 영력을 품은 일격에 베이는 것은 꽤 충격이 있었다.
일격.
그야말로 이쪽의 생을 끊어 낼 지독한 살기를 품은 일격에 당했으니 어찌 영체에 충격이 없겠는가.
거기다 이렇게 억지로 현현한 이상 자성영역을 더 운용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내고, 또 열기, 연기 등등 모든 것에 주력을 담아 생과 혼을 말살하는 강력한 자성영역을 펼쳤으니 그만큼 힘의 소모도 컸다.
저 밑에 있는 놈들이 아직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불완전한 몸으로 자성영역을 펼친 탓에 힘을 아끼기 위해 밑에까지 제대로 힘을 쏟지 못했다.
무리한다면 싹 다 정리할 수 있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자신은 선봉장이 아니라 길잡이다.
그저 길을 열고, 조금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 뿐인 역할.
뒤에 올 이들을 위해 무리해서 힘을 뺄 이유는 없었다.
적당히 기다리며 하나둘 나오는 걸 보면서 즐기다가 하늘을 열고 염원하던 전쟁을 시작하면 될 일이다.
할 만큼은 충분히 했다.
그나마 자신에게 달라붙을 만한 어린것들도 처리했으니 일단은 이대로 물러나면…….
“허허. 거참, 귀군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만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나 보오?”
[뭐라는 거냐?]
뒷짐을 쥐고 웃는 맹주의 말에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 노친네가 갑자기 왜 이런데?
벌써 노환이 와 버린 건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눈에 의문이 깃드는 순간.
“이 무림을 지탱해 온 것은, 그리고 이 세상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은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란 말이오.”
의아해하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의문을 풀어 주며, 맹주는 손을 뻗었다.
“그렇지 않나, 만귀단주?”
강렬한 바람이 단숨에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손발을 묶는다.
소윤혜에게 목이 베인 충격에 반응이 느려진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단숨에 사로잡혔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힘을 끌어올렸다.
이 정도 속박 따위 얼마든지…….
“허허, 그렇소이다. 맹주.”
[대체 어떻게?]
갑자기 자신의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영력에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만한 힘을 단숨에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단숨에 드러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이만한 힘을 모을 때까지 힘을 감췄다는 소리인데.
‘인간에게 그것이 가능한 기예인가?’
의문이 머릿속에 차오르고.
허공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단숨에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어깨를 꿰뚫었다.
거인의 몸과 함께 꼬치가 된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 몸을 비트는 순간.
“참으로 길었소.”
콱! 콱! 콱!
십수 개의 거대한 철침이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몸을 꿰뚫었다.
그대로 거인과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다시 합쳐 버린 만귀단주는 피골이 상접한 상태 그대로 그의 앞에 섰다.
“이 늙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일세.”
[노오옴! 생기구나! 네놈의 생명력을 태워서 힘을 감췄어!!]
“다 꺼져 가는 불씨, 아낄 필요가 어디에 있겠소?”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인간의 생기를 바탕으로 펼친 결계가 여태까지 전투에 집중하고 있던 그의 이목을 속인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이대로 나를 묶는다고 한들 내가 소멸할 것 같으냐?]
“맞는 말이오. 내겐 그대를 소멸시킬 힘이 없지. 저기 밑에 지쳐 있는 백화단주도 마찬가지이고.”
[그런데도 생명을 태워서 나를 묶어 놓겠다는 것이냐! 어리석구나! 어리석음의 극치이니라!]
“허허, 그대가 이리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되오만.”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고함에도 여유롭게 웃으며 수염을 쓸어내린 만귀단주는 쇠말뚝을 꺼내 자신이 들어온 균열의 입구에 박아 넣었다.
움푹 들어간 거인의 가슴에 난 균열은 좁긴 해도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과 만귀단주, 두 사람이 들어갈 공간은 충분했다.
“나는 붙들어 놓기만 해도 충분하오.”
제자를 살리기 위해 준비하던 술법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괴물의 등장에 어쩔 수 없이 제자를 포기했다.
그렇다면.
“이 못난 늙은이라도 목숨값은 제대로 써야 하지 않겠소?”
그게 스승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헛수고다! 그 번개 계집이 힘을 회복하고 나를 소멸시킬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네놈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버틸 것이오.”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엄포에 만귀단주는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목숨이 재가 되어서도 당신은 이곳을 절대 나갈 수 없소.”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마주 보고 앉은 만귀단주는 슬쩍 고개를 돌려 저 아래를 바라봤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술사들과 그 사이에서 휘청거리며 서 있는 성화린.
그리고.
‘과연, 그 녀석이 오고 있구나.’
그들이 준비하는 술법의 정체를 읽어 낸 만귀단주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뒤를 부탁하마.
부디 늦지 않게 오거라.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을 터이니.
* * *
“오, 단주님……! 오, 단주님…….”
거의 울먹이며 술법을 펼치는 성화린의 곁에 서서 요려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진짜로 자신이 발견했을 땐 이미 늦어서 말리지 않은 건데 왠지 자신 때문에 죽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닌가.
술법을 이미 펼친 상태라 막았다고 하더라도 오래 못 살았을 텐데…….
“눈치 보지 마라.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요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남궁선은 씁쓸한 얼굴로 성화린을 바라봤다.
무림맹 전체에서도 몇 없는 단주, 그중에서도 여자는 단둘뿐인데 나이도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친해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지.
그리고 그렇기에 남궁선은 성화린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은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은 물론 학관 시절부터 화경에 올라 확실하게 그 힘을 증명해 냈음에도 바로 단주라 칭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단장이라고 자칭하고 다녔을 정도다.
급사한 스승, 예기치 못한 계승.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계략과 음해가 있었겠는가.
그 모든 것을 견뎌 내고 단주의 자리를 유지하고 끝내 완전히 단을 장악해 낸 것이 성화린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귀단주가 꽤나 많은 도움을 줬음을 남궁선은 성화린 본인에게 직접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서야 서로 유일한 경쟁자이니 적당히 거리도 두고, 가끔 반목도 하고 그러는 사이였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조부와 손녀처럼 지낸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스스로 사지로 들어갔으니…….
어찌 마음이 흔들리고 괴롭지 않겠는가.
한숨을 깊게 내쉰 남궁선이 차마 말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개진!!”
“개진!”
어느새 울먹임을 지워 버린 성화린의 목소리가 만귀단의 장원에 울려 퍼졌다.
복명복창하는 술사들의 목소리와 함께 웅장한 빛이 단숨에 거인을 휘감는다.
“지금부터!! 흑룡단주가 이곳에 오기까지 그 어떤 존재도 침입을 허용하지 마라!!”
슬픔이 독기(毒氣)가 되어 소리치는 성화린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