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9화
468화-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3)
정존(正尊) 심유.
보통은 무림맹주로 더 많이 불리는 인물이다.
맹주직을 맡기 전에는 ‘신풍(神風)’이라는 별호로 더 많이 불렸던 사람이고.
중소 문파 출신의 무인으로, 속도를 중시하는 무공을 익혀 스스로 무공을 개량해 가며 하늘에 닿은 천재.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끝내 지고의 경지에 도달한 그는 살아오면서 쌓은 선업과 그 무력을 바탕으로 무림맹주가 되었다.
……까지가 세상에 알려진 모습이고, 사실 심유라는 인물은 셈이 아주 빠른 사람이다.
스스로 무공을 개량할 정도로 오성이 뛰어나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적당히 타협을 할 줄도 아는 인재였다.
선업을 쌓기는 쌓았으나, 꼭 절대적 선만을 고집하진 않는다.
때로는 위선을 눈감고 넘어가 줄 때도 있었고.
때로는 작은 악을 덮어 줄 때도 있었다.
물론, 악(惡)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가오는 것의 차이가 크기에, 그가 덮은 악(惡)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작으리란 법은 없었지만.
하여튼 심유라는 인물은 그렇게 살아왔다.
정파인으로서 적당히 정의롭게, 약간의 선은 지키면서 어느 정도 권력도 챙기면서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기에 그의 실체를 아는 단주급에서는 개인적으로 그를 싫어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오랜 세월 동안 무림맹주직을 맡고 있는 건.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 하나의 이유를 남궁선은 처음으로 목격했다.
“……더럽게 강하네요.”
“허허, 남궁 시주 보는 눈이 많소이다.”
감탄하는 남궁선의 중얼거림에 무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남궁선은 그런 무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보고 있었으니까.
초월적인 존재의 전투를.
바람을 다룬다는 말은 맞지 않았다.
바람을 가른다.
그래, 이 표현이 더 맞으리라.
압도적인 속도로 움직이며 손을 뻗는 맹주의 공격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움직임을 너무도 쉽게 억눌렀다.
쏟아지는 용암도.
터져 나오는 바위도.
속을 태워 버리는 연기도.
그 무엇도 맹주에게 닿지 못했다.
맹주 주위의 공기만 격리되어 서로 다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그 어떤 것도 맹주를 침범하지 못했고, 속도를 늦추지도 못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속도라는 게 무엇인지 보여 주듯 무섭게 휘몰아치는 맹주의 모습을 보노라니 저절로 턱이 딱 벌어지기에 충분했다.
다만.
‘역시 무인(武人)의 한계인가?’
도통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모습에 남궁선은 미간을 찡그렸다.
무인과 괴이 사이에 있는 벽.
아무리 현경급 무인이 기(氣)를 통달하고 자신의 의념(意念)을 자신의 무학에 담을 수 있다고 해도, 상대는 엄연히 영적인 존재다.
불가해(不可解).
인간의 인지 능력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다른 존재.
그들의 영역에 힘을 행사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훈련하고 갈고닦아 온 술사들과 달리 무인의 힘이 그들에게 닿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무(武)는 자기 수양에서 시작된 것.
설령 길이 다르다곤 하나, 끝에 도달한 이들의 정신과 혼은 설령 다른 존재라고 할지라도 쉽사리 침범할 수 없었다.
영적인 존재가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가 봉인된 거나 마찬가지.
물론, 영적인 존재들도 눈앞의 괴물쯤 되면 땅을 뒤집고 하늘을 거꾸러트리는 물리력을 행사하긴 하지만.
뭐, 현경은 그걸 못 하나?
만만찮은 괴물인 건 마찬가지이니 서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서로 막아 낼 수 있지만, 서로 치명적인 일격은 가할 수 없는 그런 관계.
다만.
‘……아직 절반이야.’
이게 문제다.
아직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몸체는 거인에게서 절반 정도밖에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맹주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발휘하다니.
귀병들을 거의 정리했고, 단주들이 거인을 포위하기 시작했지만, 별다른 수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저 맹주의 전투에 끼어들어 방해가 되지 않을 자신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저런 공중에서의 싸움 자체가 애초에 힘든 일이니까.
그렇게 단주들이 거인을 포위하고, 맹주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과 싸움을 이어 나가는 그때.
[캬하핫!]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맹주를 향해 집채만 한 바위를 쏘아 낸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웃음을 터트리고 양손을 내렸다.
[그래, 인간 중에는 꼭 네놈 같은 녀석들이 있었지. 궁금하구나. 너는 끝에 어느 쪽을 고를지.]
턱.
자신과 거인이 연결된 곳을 잡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입꼬리를 비틀며 상체를 끌어올렸다.
[선인이 된다면 또다시 적으로 만날 것이고, 괴인이 된다면 동료로서 전선에 서겠지.]
뚜득!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몸이 서서히 올라온다.
허벅지를 지나 무릎이 드러나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무엇도 아니구나.]
발이 빠져나온다.
직후 막혀 있던 둑을 터뜨린 것처럼 용암이 솟구치며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붉은 몸은 더욱더 강렬하게 달아올랐다.
그러곤, 쇠를 조형하듯 여태껏 인간의 형체 정도만 유지하고 있던 몸을 주물럭거린다.
“건방지구나.”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급작스러운 변화에 경계하고 있던 맹주는 뜬금없이 자신의 몸을 주무르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행태에 미간을 찡그리며 즉시 손을 휘저었다.
강렬한 바람의 일격이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베어 낸다.
그리고.
깡!
여태까지 들린 적 없던 소리와 함께 맹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과의 전투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공격이 완전히 막혔다.
그 사실을 깨달은 맹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 순간.
[으음, 역시 조금 빨리 나왔나?]
어느새 완전한 형태를 이룬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 이리저리 자신의 몸을 살피며 웃었다.
위로 솟구친 짧은 머리, 단단한 육체를 뭉쳐 놓은 것 같은 근육, 어깨가 떡 벌어졌지만 과하게 크지 않은 체구.
웬만한 미남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뚜렷한 이목구비에 위협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문신까지.
가슴과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헐렁한 옷을 입은 사내의 모습으로,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웃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니라.]
앞으로 뻗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손에서 검은색 결정이 튀어나온다.
하나는 순식간에 수십 개가 되어 단숨에 맹주를 덮쳤다.
검은색의 흑요석으로 이루어진 칼날을 하나하나 전부 쳐 낸 맹주는 얼얼한 느낌이 드는 손에 헛웃음을 지었다.
‘……화산이라 이건가?’
화산이 터지는 분화구 한복판에서 솟구쳐 오르는 파편들을 쳐 내면 바로 이런 느낌일까.
하나하나에 서린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맹주는 즉시 전략을 바꿨다.
이런 방식으로 힘들다면, 차라리 아예 붙어서……!
맹주가 쏟아지는 공격들을 단숨에 돌파해 접근하려는 그 순간.
[참수(斬首)]
밑에서부터 솟구친 참격에 팔을 맞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공격이 딱 멎었다.
순간, 원인을 파악할 시간도 없이 단숨에 몸을 날린 맹주는 손에 바람을 두르고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안면을 붙잡았다.
[허어?]
신속(神速).
자신이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한 인간의 아득할 만큼 빠른 속도에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 어이없는 음성을 토해 내는 순간.
쾅!!
맹주는 자신이 붙잡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머리를 그대로 다시 거인의 가슴팍에 꽂아 넣었다.
“쯧.”
그리고 그런 맹주의 뒤로 괴조를 타고 올라온 소윤혜가 혀를 차며 자신의 도를 내려다봤다.
떨리는 손으로 날린 일격.
닿을 것이야 당연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아예 베지 못할 줄이야.’
베지 못하고 그냥 튕겨 내는 데 그칠 줄이야.
“누님!”
소윤혜의 뒤를 따라 문율을 데리고 날아오른 주현운이 다급히 그녀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괜찮아. 난 어디까지나 한 손 보탰을 뿐이니까.”
싸움은 맹주님이 하고 계시지.
호들갑을 떨며 자신이 있는 괴조 쪽으로 넘어오려는 주현운을 손짓으로 말린 소윤혜는 날카로운 눈으로 거인의 가슴을 바라봤다.
맹주가 전력으로 적을 처박으면서 피어오른 연기에 시야가 가려진 지금.
안의 상황을 쉽사리 예측할 수가 없었다.
혹 이대로 끝나면…….
“쯧, 괴물은 괴물이로구나.”
“……맹주님?”
순간 자신의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다급히 고개를 돌린 소윤혜는 태연하게 수염의 끝을 털고 있는 맹주를 발견했다.
그리고.
“쉽게 끝날 싸움이 아니겠어.”
여유로운 몸짓과 전혀 다른, 아득할 정도의 무언가가 담긴 눈빛에 소윤혜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과연, 이게 벽이라는 건가.
자신의 할아버지도 도달하지 못했던 곳에 도달한 초인……!
“이런, 네 앞에서 보여 줄 게 아니었구나. 쯧쯧, 다른 아해들과 다르다는 걸 자꾸 까먹는단 말이야.”
소윤혜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맹주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사과했다.
그런 맹주의 사과에 어색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한 소윤혜는 다시 고개를 돌려 거인을 바라봤다.
맹주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아아, 귀찮게 하네.]
금이 간 머리를 툭툭 치면서 걸어 나온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빠른 속도로 아무는 상처를 만지며 웃었다.
[인간, 생각보다 더 빠르네? 모천(侮天) 놈들이 좋아하겠어.]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맹주를 보며 히죽 웃다가 이내 그 앞에 있는 소윤혜를 보며 고개를 꺾었다.
[그나저나 계집, 아까 싸울 때부터 궁금했던 거다만 대체 어디서 그렇게 영력을 익힌 거지?]
“대화는 끝 아니었나요?”
[카핫! 세상일이야 뭐 하고 싶은 대로 변하는 거 아니겠느냐?]
웃음을 터트리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윤혜는 말없이 도를 들었다.
“대답해 줄 이유는 없네요.”
[그것도 그렇군. 뒤에 두 놈까지 영력을 품고 있는 걸 보면 누군가가 일부러 가르친 건 틀림없지만……. 뭐 상관없나.]
어깨를 으쓱인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저 늙은 인간이 영력을 품었다면 몰라도, 너희가 품은 것만으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쏟아져 나오는 흑요석 파편.
하나하나가 웬만한 보검만큼이나 날카로운 예기를 품고 쏟아지는 흑요석 파편의 폭발은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쯤은 손쉽게 넝마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야기가 되는군.”
그 흑요석이 향하는 곳에도 한 손으로 인간을 넝마로 만들 수 있는 괴물이 있었다.
쏘아져 오는 파편을 전부 쳐 낸 맹주는 웃으며 소윤혜와 뒤에 있는 주현운, 문율을 바라봤다.
“벨 수 있겠나?”
“……예.”
“반드시.”
확고한 소윤혜와 주현운의 대답.
그리고 조용히 침묵하는 문율.
그 세 사람을 바라본 맹주는 웃음을 터트리며 손에 힘을 더했다.
“그렇다면, 인생 선배로서 후배들을 위해 길을 만들어 주지.”
훌쩍 뛰어오른 맹주는 단숨에 허공을 박차고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향해 돌진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주먹을 휘두른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속임수라는 것을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눈을 피해서 자신에게 달라붙을 수 있는 인간이 훤히 보이는 속도로 달려드는 이유가 뭐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냥 무시할 순 없는 노릇.
결국,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맹주와 전투를 시작했다.
따로 상대하면 별거 아닌 적들이지만, 맹주에게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영력을 품은 저 셋의 공격에 직격을 당하면 아무래도 그건 조금 좋지 않았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안 좋았다.
그러니.
[주제 파악을 시켜 주마.]
여태껏 화산을 분출하는 정도에 그쳤던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몸에서 무식할 정도의 연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마치 화산이 분출되기 직전의 전조처럼.
강렬하게 뿜어지는 연기 속에는 짙은 영력이 배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자성영역(自省靈域)]
세상이 바뀌었다.
[연옥천려화산(煉獄千戾火山)]
끔찍한 지옥의 화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