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8화
467화-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2)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이제는 기억하는 이를 찾는 것조차 힘든 아득한 고대의 존재다.
먼 옛날, 아득할 정도의 과거. 신화라고 불리는 시대에 살았던 존재.
넘치는 괴이(怪異)는 특이한 것이 아닌 일상적인 것이었고.
신(神)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가 직접 그들을 관리하던 시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그때를 살았던 존재였다.
신들이 세상을 위해서라며 그들을 연옥에 가둬 버리기 전까지.
[카핫!]
거인의 가슴을 열고 상체를 내민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연옥이 열렸음을 깨달은 적들의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다.
제대로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한 표정들.
저 연옥에서는 본 적 없던 표정이다.
쿵!
거인이 내디딘 발에 땅이 울린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소윤혜, 주현운, 문율이 거인의 가슴팍에서 나타난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경계하며 각기 무기를 겨눴다.
“정체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다. 나는 검은 바위 속에서 울부짖는 존재이니라.]
검은 바위 속에서 울부짖는 존재.
선뜻 이해되지 않는 자기소개에 소윤혜는 미간을 찡그렸다.
연옥에서 나온 것은 확실한데, 대체 뭐 하는 존재지?
그리고 저 거인은 뭐고?
저 거인이 연옥에서 불러낸 존재가 아니었나?
만귀단 부단주는 저 거인에 합체되어 있으니 맞을 터인데?
선뜻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소윤혜의 고심이 깊어지는 그 순간.
[쯧쯧, 자연의 소중함도 모르는 놈들.]
고개를 내린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완전히 망가진 거인의 양팔을 보고 혀를 찼다.
가볍게 혀를 찬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그대로 손을 뻗어 소윤혜를 가리켰다.
[그 죗값을 치러라.]
무언가가 꿀렁거리는 소리가 들린 순간.
촤악!
순식간에 몸을 부풀린 거대한 용암이 단숨에 소윤혜를 덮쳤다.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라곤 믿기 힘든, 사람 서넛 정도는 그대로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의 양.
순식간에 앞쪽이 붉게 변한 소윤혜는 즉시 도(刀)를 휘둘렀다.
본능에 맡긴 일수.
쌓아 온 수련과 스스로의 직감만으로 만들어 낸 일격이 쏟아져 오는 용암을 단숨에 양단했다.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강렬한 열기를 느끼며 소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 따위는 없다는 거군요.”
[캬핫! 대화? 대화아? 인세를 청소하고, 우리를 지하에 처박은 하늘의 위선자들을 무릎 꿇리기 전까지 우리에게 대화 같은 미지근한 전략은 없느니라.]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세상을 청소하겠다고 말하는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보며 소윤혜는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평생 대화할 일은 없겠군요.”
[캬하핫! 물론……!]
“당신들이 이 세상을 청소하는 일 따위 없을 테니까.”
아래로 내린 소윤혜의 도에 은은한 기화(氣火)가 피어오른다.
그것은 지고의 증거.
그것은 강함의 증명.
“당신을 베면 된다. 그게 저희가 해야 할 일이군요.”
타오르는 강기를 휘감은 도(刀)로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을 겨누며, 소윤혜는 담담하게 웃었다.
* * *
전장.
성화린을 옆에 끼고 귀병들을 정리해 나가던 남궁선은 갑작스러운 맹주의 일갈에 놀란 것도 잠시, 빠르게 단을 수습해 전투를 이어 나갔다.
“아아……!”
“대체 왜 그래요! 언니?!”
문제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성화린이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거인을 바라보고 있는 성화린의 모습은 명백히 정상이 아니었기에 남궁선이 뺨이라도 때려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단주님! 적들이 반항이 격렬해졌습니다!”
“좌열 지원이 필요합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남궁선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일어섰다.
어린 녀석들이 이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를 막아 내고 있다.
그런데 자신들이 이런 잡병조차 처리하지 못하고 빌빌대면 무인으로서 무슨 낯짝으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전투에 집중하라!”
넋이 나간 성화린을 두고, 남궁선은 직접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녀가 합류한 것만으로 불리했던 전장은 다시금 균형을 되찾았고, 더 나아가 단숨에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
“지원이 필요한 곳은 서슴없이 말해라! 우리의 승리는 적의 계략에 어느 누구도 죽지 않는 것이다!!”
기습을 당했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강조하며 남궁선은 아군을 독려했다.
다만, 술사들의 경우는 지휘할 지식이 없어 별다른 말을 첨가하지 않았다.
지휘권과 능력을 고루 갖춘 성화린이 넋이 나가 버렸으니 술사들이 버벅거리긴 했지만, 남궁선이 직접 전장에 뛰어든 덕에 어떻게든 전투는 유리하게 이끌어 갔다.
전장에 뛰는 남궁선의 외침을 들었을까.
멍하니 거인을 바라보던 성화린은 고개를 내려 전장에서 분투하는 남궁선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눈에 총기가 돌아온 성화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수인을 맺고.
“지령지언(至靈智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녀의 옆에서 백랑을 다루던 청유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주문.
그녀가 어떻게 등장했는지 깨달은 청유는 즉시 성화린을 붙잡았다.
“안 됩니다. 단주님.”
“청유, 이거 놓으…….”
“원화의 술을 한 번 더 사용하시면 반드시 죽습니다.”
굳은 얼굴로 성화린을 꽉 붙잡는 청유.
자신의 팔을 붙잡은 그녀의 손길을 느끼면서 성화린은 더더욱 독심을 품고 대답했다.
“제가 죽지 않으면, 이곳의 모두가 죽습니다.”
이곳에 있는 다른 술사들을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성화린만큼은 똑똑히 느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단주급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악귀들의 명단.
백(魄), 원(怨), 귀(鬼), 재(災), 멸(滅)로 나누는 악귀들의 등급 중에서도 최정상.
단주급 없이 봉인하거나 멸하기 위해선 수백의 희생이 필요한 재(災) 등급 이상의 악귀들이 적혀 있는 명단이다.
거기에는 지금도 이 세계 어딘가에 잠들어 있거나, 혹은 연옥에 갇혀 있는 고대의 존재들까지 수록되어 있었다.
단주의 자리에 오르고, 의무적으로 그 지식을 머리에 넣기 위해 몇 번이고 읽으면서도 얼마나 놀라고 반신반의했던가.
이런 존재들이 과연 있을까.
이런 존재들이 과연 존재해도 되는 걸까.
인간에게 이런 존재들이 품은 악의(惡意)는 과연 얼마나 거대한 재앙이 될까?
멸(滅).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고 가는 진정한 재앙.
도시 하나둘쯤은 우습게 박살 내는 재(災) 등급의 악귀조차 귀여워 보일 정도의 절대적 절망.
그게 바로 눈앞에 있는 거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지금 거인의 가슴을 열고 나타난 존재다.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검은 바위의 포효.
검은 바위 속에서 울부짖는 존재.
그것은…….
차마 그 절망을 입에 담지 못한 성화린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청유의 팔을 억지로 떼어 내려는 그때.
쾅!!
어마무시한 속도로 날아온 무언가가 두 사람의 발 앞에 처박혔다.
“커헉!”
비릿한 철 냄새와 함께, 몸을 일으킨 문율이 가볍게 혀를 찼다.
“이런 바람으론 안 되네.”
꽂혀서 너무 바람만 썼나.
슬슬 본류로 돌아갈 때가 됐나.
온천수가 마음에 든다고 한들 결국 바다와 합쳐지면 소금물이 되는 법.
바람에 대한 미련을 떨쳐 낸 문율은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검에 강기를 둘렀다.
“좋아. 다음에는……. 아.”
괴조.
자신이 날아갈 때 함께 날아갔을 괴조가 보이지 않아 문율은 얼굴을 구겼다.
지금 거인은 움직임이 거의 멈춘 상태다.
싸우고 있는 건 거인의 가슴팍에서 나온 괴인.
높은 곳에 있는 붉은 쇳물 같은 괴인과 싸우려면 괴조가 필수인데…….
예상치 못한 복병에 미간을 찡그리며 입가의 피를 닦아 낸 문율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멍멍아, 날 수 있니?”
청유의 곁을 지키던 백랑에게 다가가 턱을 쓰다듬으며 해맑게 물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하, 그런가? 그렇겠죠?”
청유의 어처구니없어하는 목소리와 함께 뒷머리를 긁적인 문율이 일어섰다.
또다시 답을 찾기 위해 문율이 미간을 찡그리는 사이, 거인의 가슴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한층 더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붉은 용암은 물론 어느새 검은 바위까지 쏘아 내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건지 주현운의 검으로도 베지 못할 정도로 단단한 바위까지 섞여 있었다.
적을 베기는커녕 접근조차 힘든 상황.
심지어 한 명이 빠졌으니 두 사람은 더욱더 열세에 몰리고 있었다.
“시간을 길게 끌어선 안 돼.”
그 모습에 안색을 굳힌 성화린은 다시 원화의 술을 위한 수인을 맺었다.
또다시 그녀를 막으려 했으나, 살벌한 성화린의 기세에 청유가 머뭇거리는 순간.
“안 돼요.”
성화린의 손을 붙잡은 문율이 방긋방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아까 남궁선 선배가 하는 말 들었잖아요? 저희의 승리는 그 누구도 죽지 않는 거라고.”
“……그건 지금 상황을 모르니까 가능한 이야기란다. 저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은 절대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되는 존재야.”
하물며 무림맹의 한복판에서?
이제 막 봉인이 풀려서 정비하고 이쪽으로 거의 모든 단이 달려오고 있을 이 상황에서?
안 된다.
그런 대참사만큼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이란.
“화산이 폭발하는 순간, 한둘의 희생으론 끝낼 수 없어……!”
고대로부터 존재해 온 화산의 악귀다.
화산을 향한 인간의 공포는 곧 경외가 되고, 그 신앙을 먹고 몸집을 키운 괴물.
그 강함은 화산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은 아직 힘을 완전히 끌어올리지 못해 반신을 거인, 즉 산 안에 가두고 반만 삐져나와 싸우고 있지만, 완전히 몸을 끄집어내는 순간.
“이 일대는 전부 지옥이 될 거야.”
거기다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의 힘으로 연옥을 향한 문은 더욱 활짝 열리겠지.
그다음에는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고대에 인간이 두려워한 것은 화산만이 아니니까.
실체가 있는 자연재해는 물론이고, 실체가 없는 질병도 있고 막연한 죽음을 향한 두려움도 있었다.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공포는 믿음이라는 근거 없는 감정에 몸을 맡기게 한다.
그렇게 탄생한 존재들 중 본성이 악한 존재들의 상당수가 연옥에 갇혔다.
세는 것조차 힘든 세월을 연옥에 갇혀 울부짖던 이들이 지상으로 뛰쳐나오면?
이 세상이 지옥이 될 거라는 것쯤은 너무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니 막아야 한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을 위해.
입술을 깨문 성화린은 자신을 잡은 문율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힘겹게 손을 움직였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은 문율의 손을 떼어 내지 못했지만.
그 굳건한 눈빛만큼은 문율마저 움찔할 정도로 강렬했다.
다만.
“그래도 안 됩니다.”
“……놓아라! 나는 단주다!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나를 막을 자격 따위는……!”
“있지. 응. 있어.”
어느새 성화린과 문율의 곁으로 다가온 남궁선이 웃으며 성화린의 어깨를 두들겼다.
“죽겠다는 사람을 막는데, 뭔 자격 같은 게 필요한가요, 언니?”
후후 웃으며, 남궁선은 성화린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식한 칼잡이들이야 믿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남궁선의 웃음소리와 함께, 거친 포효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여기 무림맹이예요. 언니. 무림에서 가장 칼 잘 쓰는 인간들이 모인 곳.”
“허허, 주먹 쓰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허허로운 목소리와 함께 저 멀리 있는 귀병의 머리가 터져 나간다.
백보신권(百步神拳).
소림의 절기와 함께 등장한 적수단주(赤手團主), 무진이 허허롭게 웃으며 염주를 굴렸다.
“이 무림맹에 칼 쓰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남궁 시주.”
“헤헤.”
“이래서 칼잡이들이 문제라니까.”
좌측.
인간이 아닌 귀병을 한 줌의 독수로 바꾼 사내, 만독단주(萬毒團主) 당천기가 혀를 차며 웃었다.
“그나저나 화산에 통할 독이라, 재미있겠군.”
무진과 당천기를 시작으로 사방에서 몰려온 단들이 빠른 속도로 귀병들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선 건 귀신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강함을 뽐내는 단주들이었다.
순식간에 되찾은 우위.
그리고.
[단풍(斷風)]
허공에 그어진 선이 그대로 거인의 몸을 가른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하지 못할 모습으로.
허공에 선 채 자신의 발아래 모인 단주들을 보며 무림맹주가 선언했다.
“적을 섬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