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5화
464화-무림맹에서 (6)
“흐음.”
앞으로 나아가던 소윤혜는 전방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걸음을 멈췄다.
[포기하라…….]
[생을 포기하라…….]
기이한 말을 중얼거리며 다가오는 존재들.
병사처럼 갑옷을 입고, 창을 든 괴물.
그 기이한 존재감에 소윤혜는 도를 쥐었다.
그리고.
“안쓰럽군요.”
벤다.
다가오는 귀병의 목을 베어 낸 소윤혜는 떨어지는 귀병의 목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설천위에게 들은 적이 있다.
사혈천이란 조직에선 악귀를 강제로 비틀어 귀병이란 존재를 만든다고.
순종적이면서 꽤나 준수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는 괴물이라고 했던가.
존재를 비틀면서 자아는 사라졌지만, 그 과정에서 실체를 가지게 된 존재들.
사혈천에서 머릿수가 많은 일반 무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병사.
“시간 끌기로 소모되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목이 베인 귀병이 허우적거리다가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보며 소윤혜는 쓰게 웃었다.
차라리 살기를 실어 단숨에 베는 게 낫겠어.
이들에게는 우리 가문이 믿어 온 자비가 지독할 정도의 비정함이 되는구나.
안타까움을 삼키며, 소윤혜는 덤덤한 얼굴로 살기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도(刀)가 칠흑으로 물들고.
“빠르게 보내 드리죠.”
* * *
“흐음.”
감각이 시키는 대로 전진하던 주현운은 앞을 가로막은 존재들에 미간을 찡그렸다.
설천위에게 들었던 귀병이라는 존재와 일치하는 특성.
“설 형은 어차피 자아를 잃었으니 빠르게 보내 주는 게 낫다고 했던가.”
지독한 놈들이다.
인간은 물론이고, 자신들과 같은 괴이마저도 도구로 사용한다.
무림과 황실이 더럽고 독하다고 해도 과연 사혈천, 이놈들만 할까 의문이다.
지독하기가 사갈(蛇蝎)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거기다.
“역시, 뭔가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거겠지?”
귀병들의 목을 베어 내며, 주현운은 먼 곳을 응시했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곳.
기이한 영력이 요동치는 것이 딱 봐도 우리 뭔가 큰 걸 준비하고 있소, 하고 자랑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인데도 만귀단에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다른 곳들도 완전히 발이 묶였나 보네.’
이건 꽤나 철저한 준비를 하고 저지른 일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이로써 더더욱 확실해졌다.
만귀단 혹은 백화단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
각 단이 정찰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무림맹을 돌아다니는 지금, 외부의 인물이 들어와서 이런 대규모 술식을 준비할 순 없었다.
내부인이 자신들이 하는 일에 은근슬쩍 끼워 넣어 완성한 것이 분명했다.
지금 가장 유력한 건 만귀단 내부의 배신자.
공간을 다루는 악귀는 상당히 희귀하다고 했으니 그런 악귀가 자리 잡고 일을 벌이고 있는 만귀단 안에 배신자가 있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노골적으로 시간을 끄는 이런 행동도 그렇고.
마지막 귀병의 목을 베어 낸 주현운은 담담하게 검을 거뒀다.
안쓰러운 일이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정도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일단은.
“전부 베어 버릴까.”
계획을 틀어막는 것부터 할까.
공간을 비튼 악귀 때문에 상당히 전진이 느렸지만, 힘을 아끼길 포기하면 속도를 꽤 올릴 수 있다.
자신의 검에 강렬하게 타오르는 강기를 만들어 낸 주현운은 앞으로 나아갔다.
베고, 베고 또 벤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계획이 완성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겠지.
* * *
[아아, 시간 끌기도 안 되네.]
만귀단의 비처.
그곳에 몸을 숨긴 우공(愚空)은 허무하게 쓰러져 가는 귀병들의 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는 낭비라고 그렇게 경고했는데.
의식이 끝나고 결계가 풀리는 순간 몰려드는 무인들을 대체 어떻게 막을 생각인지.
술법의 영향으로 일반 무인 정도야 바닥을 기고 있겠지만, 대주급 이상은 비틀거리면서라도 이곳에 도달할 거다.
단주들도 상대해야 하는데 그런 녀석들까지 신경 써야 하면 고달파지는데 말이야.
어깨를 으쓱인 우공은 다시 공간을 조작하는 데 집중했다.
세 놈들 중 한 놈이 무식한 방식으로 돌파하기 시작했다.
아예 공간 자체를 가르는 방식이라니.
[이놈,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네.]
단순히 건물을 베는 게 아니었다.
공간과 공간 사이의 비틀림.
그걸 베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의도했든 아니든, 그것 때문에 이쪽의 조작이 어설퍼지고 있었다.
저 괴물 같은 놈 주위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저 괴물 놈이 의식을 진행하는 곳에 도달하면 그대로 끝이니까.
그 어설픈 놈이 저 괴물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마주치는 순간, 목이 날아갈 거다.
그렇게 되면 계획은 끝장나고, 자신은 온갖 추적자들 속에서 도망쳐야 한다.
‘무리네.’
막아야 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한숨을 내쉰 우공은 결국 힘을 끌어올렸다.
공간을 조작해서 시간을 끄는 것이 안 된다면.
직접 비틀어서 해결하는…….
쿵!!
순간, 만귀단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에 우공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누구?]
공간 전체를 때리는 듯한 충격.
자신이 만들어 낸 영역(靈域)을 우습게 뒤흔드는 압도적인 힘.
아니, 힘이 아니다.
존재감.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영역이 충격을 받고 있었다.
설마 의식이 끝났나?
아닌데?
의식이 끝나려면 못해도 반 시진(약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할 텐데.
상황 파악에 실패한 우공은 이내 입술을 깨물곤 비처를 빠져나왔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정확하게 알아야 다음의 행동을 정할 수 있다.
적에게 노출될 수도 있는 행동이라 싫었지만, 일단 이 말도 안 되는 존재감의 근원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우공이 단숨에 만귀단의 상공까지 치솟아 올라 본 것은 너무나도 기이한 풍경이었다.
“하하하하하! 성공! 성공이다!!”
거대한 괴물의 어깨 위에서 환호하는 모영훈.
저 머저리 새끼는 자신의 계획이 뭔지도 까먹은 걸까?
의식의 결과물 위에 올라가 당당하게 외치면, 현 만귀단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 뒤를 잇는다는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건데?
아니, 그 전에 대체 어떻게 의식을 완성한 거지?
저놈이 세운 계획대로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인데?
“꺄하하하! 미친놈!”
순간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한 우공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허공에 떠서 배를 붙잡고 웃고 있던 언여휘가 그 시선을 느끼고 히죽 웃었다.
“왜 궁금하니? 어떻게 의식을 완성했는지?”
[예…….]
“간단해. 과정 하나를 통으로 생략했거든.”
과정 하나를 통으로?
어떻게?
“우리 쪽 사람을 하나 심어 놨지. 진짜 간자(間者).”
[그럼……?]
“그 녀석이 억지로 의식을 진행시켰어. 모영훈, 저 녀석이 넣으려고 했던 통제 수단을 갖추지 않은 상태로.”
[아.]
단숨에 상황이 이해가 됐다.
술사가 강대한 존재를 불러내거나 사역할 때 가장 힘을 주는 부분이 통제다.
통제할 수 없는 존재는 그 자체로 재앙이 되니까.
역으로 자신이 죽을 수도 있으니 어떻게든 통제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술사가 식령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대부분이 과정을 우습게 보고 일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이면 소환만 하면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머저리들의 최후.
그리고.
‘그런 머저리가 만귀단주가 된다라……. 나쁘지 않네.’
앞으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어.
괴물의 어깨 위에서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모영훈을 보며 우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일이 생각보다 잘 흘러간 것 같다.
“으응~. 역시 머리가 한쪽으로 쏠린 놈들은 써먹기 좋아. 제대로 쏠린 나머지 반대쪽이 텅텅 비어 있거든.”
히죽히죽 웃으며 관자놀이 쪽에서 검지를 빙글빙글 돌린 언여휘는 웃고 있는 모영훈을 비웃었다.
“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머저리 놈, 미친 게 분명하지. 히히히히.”
머저리처럼 자신이 해냈다고 소리치고 있는 모영훈을 비웃은 언여휘는 마치 의자에 앉은 것처럼 자세를 잡고 다리를 꼬았다.
“일부 빨렸네. 저 머저리는 술사란 놈이 제 혼을 지키는 것도 제대로 못 했네?”
실성한 인간처럼 자신이 해냈다고 소리치는 모영훈을 비웃으며 언여휘는 소환된 존재를 훑었다.
검은 현무암의 신체, 그 위로 흐르는 용암.
시뻘건 용암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붉은색의 눈동자.
그 어깨에 올라선 모영훈은 그 육체가 뿜어내는 열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본인은 지배에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옆에서 보면 누가 봐도 저쪽에 융화되고 있는 꼬라지다.
한마디로, 소환된 존재에게 먹히고 있다는 소리다.
저런 머저리를 차기 단주로 내정하고 있었다니.
늙으면 눈이 가물가물해진다는 게 사실이네.
“영역 풀어.”
[예?]
“영역 풀라고, 저놈이 날뛰기 시작하면 너한테도 타격이 장난 아니게 갈 거야.”
[하지만, 이제 막 소환된 존재입니다. 맹주와 다른 단주들이 몰려들면 아무리 강대한 존재라도…….]
“응. 지겠지? 근데 거기까지야. 우리가 하려고 했던 건 전부 이루기도 했고.”
당황하는 우공의 어깨를 토닥이며 언여휘는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넌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저기 저 머저리와 달리 능력 있는 인간 하나가 이미 접근했거든.”
[예? 하지만 제 영역에는 딱히 기색이……!]
“못 느낄 만도 하지. 저 괴물이 깨어나는 순간에 맞춰 결계를 깬 거니까.”
언여휘의 말에 그제야 외부에 펼친 영역을 감지한 우공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결계 하나가 부서졌다.
핵을 처리한 게 아니라 힘으로 결계를 부순 거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백화단.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다.
[창천단도 오고 있군요.]
“그쪽은 핵을 찾아서 처리한 것 같네.”
[예, 맞습니다.]
생각보다 일 처리가 더 빠르다.
이게 무림맹의 저력인가.
어이없게 본진을 내준 놈들의 어리숙함을 비웃던 것이 후회가 될 정도다.
과연, 높은 분들이 계속해서 무림맹을 흔들려고 하시는 이유가 있었구나.
대계(大計)에서 이 정파라는 이름으로 무림을 지탱해 온 놈들은 확실한 방해 거리가 될 거다.
언여휘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우공이 침착하게 영역을 회수하는 사이.
언여휘는 저 멀리서 폭발적으로 요동치는 기(氣)에 히죽 웃었다.
“맹주 그놈, 꽤나 화가 솟구쳤나 보네.”
탐욕스러운 인간이라도 정파의 우두머리는 우두머리라는 건가.
미칠 듯한 속도로 달려오는 맹주의 기척을 느끼며 언여휘는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괴이를 바라봤다.
연옥에 갇혀 있던 흑암지규군(黑巖之叫君).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인 아득한 옛날.
신비와 괴이로 세상이 가득 차 있던 고대 시절에 연옥에 처박힌 존재.
제천대성이 이제 막 신성을 얻어 가던 신화시대의 존재.
온전하게 빼 오진 못했지만, 그 몸뚱이의 일부를 이렇게 불러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연옥을 향한 틈은 벌어졌고, 무림맹 내부에는 불신의 씨앗을 심었으며, 저 괴물을 막기 위해 무림맹의 전력은 크게 떨어질 거다.
일석삼조.
설천위, 그 괴물 같은 것이 전이문으로 이곳에 도착했다면 저 셋 모두를 달성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설천위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게 있는 법.
악의를 그렇게 품고 전의문 같은 초고등 술법을 바로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일이 전부 끝나고 한참 뒤에야 도착하겠지.
이미 분열되어 맹주의 위협 아래 겨우 모여 있는 오합지졸들만이 남은 이 맹에.
그때 천위, 너는 무슨 얼굴일까?
절망할까? 후회할까? 응?
대체 무슨 얼굴…….
“너구나. 언여휘.”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언여휘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크악! 이게 무슨?!]
바람에 난자당한 우공이 몸을 비틀고, 순식간에 휘둘러진 도를 우공이 겨우 공간을 비틀어 피해 냈다.
“씁, 역시 설 형처럼은 무리인가?”
그 형님은 풍문으로 듣자 하니 허공을 뛰어다닌다고 하던데.
낙하하기 시작하는 몸에 주현운과 소윤혜, 문율이 아쉬움을 삼키는 그 순간.
[크르으으아아아아!!]
포효하는 괴조가 세 사람을 받아 냈다.
그리고 그 괴조의 머리 위.
“아직 희망은 있구나……!”
만신창이가 된 만귀단주가 강렬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