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464화 (464/624)

제464화

463화-무림맹에서 (5)

[과연, 단순한 무인 나부랭이는 아니구나.]

“전 거짓말은 하지 않거든요.”

거한의 도를 튕겨 낸 소윤혜는 담담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다른 둘은 공간째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는데, 자신은 아직 이곳에 두고 있다.

이유가 뭘까.

단순히 각개격파를 위해서?

아니면, 뭔가 힘에 제약이 있나?

차분하게 생각을 이어 나가던 소윤혜는 이내 가장 가능성 높은 답에 도달했다.

‘이 길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그런 거라면, 자신을 이곳에 그대로 둔 것도 이해가 된다.

굳이 힘을 들여 다른 곳으로 날릴 필요는 없으니까.

“시간을 끌기 참 좋은 능력이군요.”

[눈치가 빠르구나. 이 공간을 다루는 녀석의 이름이 우공(愚空)이라고 한다. 꽤나 멍하니 있길 좋아하는 녀석이지.]

가볍게 도약해 거리를 좁히며, 거한은 소윤혜의 어깨를 향해 도를 내리쳤다.

여태까지처럼 담담하게 그 도를 받아 내는 소윤혜.

[꽤나 다루기 어려운 녀석이지만, 잘 다룰 수만 있다면 성능은 확실하지. 지금 보는 대로 말이다.]

“설 공자가 계속 주의하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군요.”

거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소윤혜는 이어지는 거한의 공격을 막아 냈다.

튕겨 내고, 막아 내고, 흘려 내고.

소윤혜의 도는 그 얇은 도신을 낭창거리면서도 거한의 모든 공격을 확실하게 막아 냈다.

[시간을 끄는 것만으로 충분한 일이지.]

“그래서 이렇게 대충 싸우고 계신 건가요? 이름조차 대지 않고.”

[흐하하! 스쳐 지나가는 사이에 굳이 이름까지 댈 필요가 있나?]

“첫인상과 다르게 많이 호쾌해지셨군요. 무인 나부랭이가 오만하다더니 했던 주제에 말이죠.”

[하하하하! 그때는 그리 생각했지! 네 녀석이 단순히 무인 나부랭이가 아니란 걸 알았으니, 취급이 바뀌어야 하지 않겠나?]

호탕하게 웃은 거한은 소윤혜의 도와 맞부딪친 뒤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한 자리에 서서 내 공격을 전부 막아 내는 무인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느니라.]

“대충 한 주제에 그런 칭찬이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공권(制空圈)을 이용한 궁극의 방어.

소백진이라는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 다리가 아픈 손녀를 위해 고안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삼는 초식.

도(刀)는 오로지 방어만을 위해 움직이며, 정한 제공권 내로 들어오는 공격은 모두 도(刀)의 예기(銳氣)가 닿는다.

그러나 분명 소백진은 소윤혜에게는 이 초식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신의의 도움으로 다리의 장애를 벗어나기 시작한 소윤혜에게 그녀가 가는 길과 맞지 않은 초식을 전해 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니, 괜히 할아버지가 전수해 준 무공이라고 집착하다가 길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소백진은 이 초식의 개념 정도만을 간단하게 알려 주고 말았다.

제공권(制空圈)을 활용하는 기초는 배워 두면 손해 볼 것 없는 좋은 무리(武理)였으니까.

여하튼, 그렇게 소윤혜는 이 초식을 제대로 익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이렇게 능숙하게 초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까?

답은 간단했다.

익혔으니까.

이 초식을 익히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어져서 익혔으니까.

“뭐, 칭찬을 들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단지 그뿐인 이야기다.

어느새 납도한 도(刀)를 쥐고, 소윤혜는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왼손 엄지로 가볍게 도를 밀어내며.

“이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한 것 같네요.”

살기를 뿜어낸다.

처형인의 살인은 암살이 아니다.

그러니 굳이 살기를 숨길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소백진과 소윤혜가 살기를 숨기는 법을 익힌 것은 죄인을 향한 마지막 배려이기 때문이다.

살기에 짓눌려 공포에 떨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언제 죽는지도 모르는 일격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

누가 봐도 후자가 더 낫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녀의 가문에는 살기를 제어하는 비술이 전해져 온다.

소윤혜도 마음만 먹으면, 살수들처럼 살기 한 점 없이 적의 목을 칠 수 있다.

다만, 그건 적을 향한 자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비정(非情)지기로 마음먹었다면.

“후우.”

살기를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

공간 전체를 잠식하는 저릿저릿한 살기에 거한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훌륭하다!!]

괴이를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군!

그냥 베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다.

지독할 정도의 의념(意念).

그것이 담긴 일격만이 괴이를 벨 수 있다.

대부분의 무인은 이걸 하지 못하지만, 벽을 넘은 무인들은 심심치 않게 이것을 해낸다.

[크하하하하! 좋다!]

쿵! 쿵!

두 다리를 땅에 디딘 거한은 근육을 부풀리며 도를 어깨 뒤로 당겼다.

단 일격이다.

막아 주마.

베어 주마.

뜻을 정한 거한은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밀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 뜻을 담은 눈동자로 소윤혜를 노려본다.

거한의 모습에 소윤혜는 그저 담담하게 엄지손가락으로 도(刀)를 조금 더 밀어냈다.

도(刀)가 도집에서 빠져나와 영롱한 은빛을 드러내는 순간.

지독할 정도의 살기가 모이기 시작한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공간을 가득 메웠던 살기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도신을 향해 쏟아진다.

은빛의 도신(刀身)은 순식간에 질척이는 칠흑으로 물들고.

“설 공자 때문인가요? 어째 다들 기(氣)가 검게 변하네요.”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먹 가까이 있는 것은 검게 변한다더니.

지독할 정도로 짙은 먹이네요. 설 공자.

자신의 도신을 향한 감상을 짧게 내뱉으며, 소윤혜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참수(斬首) 개(改) 제1식]

도가 뽑혀 나온다.

압도적인 속도를 가진 발검술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게 도를 뽑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

단련을 한 무인이라면 도를 뽑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속도.

그 속도로 뽑은 검을 향해 거한이 도를 내려친다.

저 도가 자신의 목에 닿기 전에 이쪽의 도를 부딪치리라.

살기를 품은 도(刀)?

무슨 상관인가! 막아 내면 될 일인데!

두 눈을 부릅뜨고 거한이 도를 내려치는 그때.

[서참(逝斬)]

거한의 목에 선이 생겨난다.

느릿하게 뽑혔던 소윤혜의 도(刀)는 이미 그 끝을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다.

단 한 점의 피도 묻지 않은, 일렁이는 칠흑의 살기를 두른 도신(刀身)을 보고 있으니 깨닫는다.

[이미, 베였군.]

“뽑기 전에 휘둘렀다면 얼추 막았을 수도 있었겠네요.”

단숨에 살기를 흩트린 도를 갈무리하며, 소윤혜는 가볍게 목례했다.

“그럼, 잘 가시길.”

[크흐.]

마지막에 하는 한 줌의 예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거한의 몸은 빛무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죽음을 거부하고, 혼이 되어도 이승에 남아 살아온 자의 최후.

뒤가 없는, 완전한 소멸.

태어나길 괴이로 태어난 자들과 다르다.

그들의 끝은 그저 소멸만이 있을 뿐이다.

흩어지는 거한을 마지막을 짧게 지켜본 소윤혜는 그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곳이 잘못된 길이라면, 바른길을 찾을 때까지 나아가면 될 일이다.

가끔씩 눈앞을 가로막는 벽을 베어 가면서.

소윤혜.

게임 속에서는 설천위가 본 적 없는, 본래 죽을 예정이었던 인물.

그렇기에 설천위도 그 재능의 크기를 몰랐던 인물.

다리의 장애라는 치명적인 짐을 짊어지고도 절정에 올랐던 재능은 설천위와 만나며 개화를 시작했고.

주현운과 문율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재능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능력을 만개(滿開)했다.

완벽하게.

그녀가 걸어가는 길은 확실하게 정해졌다.

혹시 몰라 그녀의 조부가 전수를 꺼렸던 초식마저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길 안에 그 초식을 집어넣고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쓸데없이 길게 끌지 말고, 빠르게 끝났으면 좋겠네요.”

한 줌의 두려움도 없는 시선으로, 소윤혜는 앞으로 나아갔다.

* * *

“서둘러라.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

“예!”

만귀단 안에 있는 한 건물.

술법을 위해 이곳만큼은 공간을 고정해 놓은 곳에서 여러 술사들이 바삐 움직였다.

도형을 그리고, 제물과 시약을 옮기는 부하들을 보며 모영훈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 지독한 영감탱이를 밀어내기 위해 사혈천과 손을 잡았다.

반란 사실을 아는 건 이곳에서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이 녀석들뿐.

다른 녀석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습격에 다급하게 대응하고 있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놈들이 원하던 것을 실행하고, 계획을 완성한다.

이 일이 끝난 후엔 많은 것이 바뀔 거다.

주제를 모르는 놈들은 사라질 것이고, 이 세상의 흐름에 맞게 맹은 자신들의 가치를 주목할 것이다.

무지렁이 같은 무인 놈들의 콧대를 확실하게 꺾어 주지.

모영훈의 눈에 서린 독기가 점점 더 짙어지는 그때.

[아아, 위험해. 그놈들 장난 아니야.]

“……뭐라?”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모영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 목소리는 지금 단의 건물을 장악하고 공간을 주무르고 있는 악귀의 것.

그런 악귀가 위험하다고 말할 만한 대상이 지금 만귀단 건물엔 셋이나 있다.

그놈들이라면, 그 셋 모두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소리.

“상황을 보고해라.”

[이 녀석들, 영역(靈域)에 아주 익숙해. 공간을 비틀면 억지로 길을 뚫어서 이동하고 있어.]

단순히 길을 뚫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감각인지, 공간을 이리저리 뒤틀어도 귀신같이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놀랍게도.

[여기. 이곳을 향해 세 놈들 전부 직진해 오고 있어.]

“시간을 끌어라! 방을 뒤엎든 날려 버리든 시간을 끌어!”

[너, 내 말을 듣긴 한 거야? 감각으로 목표를 정한 뒤에 똑바로 직진해 오고 있다니까.]

“빌어먹을!”

답이 없다는 우공(愚空)의 대답에 거칠게 탁자를 내려친 모영훈은 이내 두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들었다.

“귀병을 보내라.”

[십이군 녀석들도 줄줄이 썰려 나갔는데, 귀병을? 너무 아까운데.]

“보내라. 시간을 끄는 게 가장 중요하다. 언여휘, 그년도 귀병을 장식으로 데려온 건 아닐 텐데?”

[으음, 의식이 끝나고 무인들을 상대할 때 써야 하는 전력인데, 이렇게 낭비하면 너한테도 안 좋을 텐데?]

“의식이 완성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없다!!”

거칠게 소리치는 모영훈의 태도에 일하던 술사들이 흠칫 놀랐지만, 그들은 이내 각자 할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다.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고를 수 없으니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술사들 사이에서 한 술사가 조심스럽게 뭔가 꾸미는 듯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모영훈은 눈치채지 못했다.

“귀병들을 보내서 시간을 끌어라! 의식이 완성되기만 하면 그놈들 정도는 단숨에 지워 버릴 수 있다!”

[흐응……. 뭐, 좋아. 시키는 대로 해 주지.]

고개를 끄덕인 우공(愚空)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낀 모영훈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빌어먹을 괴이 놈들……. 반드시 쓸어 주마.’

의식이 완성되면 놈들이 원하는 대로 놔두진 않을 거다.

그걸 위한 준비도 착실하게 진행 중이고.

이 일이 끝나고 난 뒤엔.

그 누구도 만귀단을 무시하지 못하게 되리라.

* * *

“아, 이거 골치 아프네.”

살짝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남궁선은 검을 내렸다.

“더럽게 단단해. 뭐로 만든 거야, 이거?”

건물을 감싼 벽은 미친 듯이 때렸음에도 멀쩡했다.

대체 이게 뭐로 만들어진 건지 궁금해질 정도로.

강기조차 그냥 튕겨 내는 이런 결계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심이 되는 핵(核)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아무리 대단한 술사라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기적을 만들어 낼 순 없다.

친하게 지내는 성화린이 몇 번이나 강조했던 말 아닌가.

술사를 상대로 싸울 때는 기적에 겁먹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전원, 검을 거둬라.”

“단주님!”

“포기하는 게 아니야.”

소리치는 백윤철에게 손을 휘저은 남궁선은 등을 돌려 창천단의 건물을 바라봤다.

“찾아. 쥐새끼가 숨긴 똥 덩어리가 우리 소중한 보금자리에 묻혀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