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2화
461화-무림맹에서 (3)
“그나저나 이상하네요.”
바람을 다루던 여인의 목을 벤 문율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상당히 강한 적이긴 했지만, 이렇게 혼자 있다는 건 좀 이상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공간을 자유롭게 비틀어 적을 분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군이 있다면, 그 전술의 기본은 당연히 각개격파 아니겠는가?
흩어 놓고, 한 명한테 싹 몰려가서 쓱싹.
그렇게 처리하는 게 최선 아닌가?
공간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면 시간을 끄는 것 정도야 충분히 가능할 테니 무조건 이 전략이 맞을 터.
그런데 그러지 않고 일대일을 했다?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싶어서? 아니면 개개인의 자존심을 꺾을 수 있을 정도의 통제력이 없어서?’
아마 높은 확률로 후자겠지?
나 혼자도 처리할 수 있다.
이건 뭐 무인이든 술사든 악귀든 가질 수 있는 자존심이니까.
만약 지휘권을 가진 사람이 그런 자존심을 꺾을 지배력이 없다면 이런 상황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나쁘지 않네요.”
어느새 가루가 되어 흩어진 여인을 뒤로하고, 벽 쪽으로 다가간 문율은 천천히 벽을 따라 걸으며 출구를 찾았다.
“이 정도 수준의 적만 있다면, 다른 분들은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괜한 걱정 말고, 이대로 쭉 들어가서 원인을 제거할 생각만 하면 되겠네요.
* * *
“과연, 강기를 다룬다는 건 사실이었나?”
만귀단의 외부 수련장.
흙바닥을 잘 다져 그 위에 청석을 깔아 놓은 수련장은 웬만한 무인들의 수련장 못지않게 넓었다.
약간의 체력 단련과 거대한 식령을 불러낼 때 사용하는 장소.
그곳에서 거한과 마주한 주현운은 검을 늘어트린 채 웃고 있었다.
“그걸 알고도 저한테 왔다는 건 당신은 혹시 모를 상황에 단주들을 막거나 처리하기 위해 온 사람, 아니 괴이라는 뜻인가요?”
“정답이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거한은 거대한 언월도의 끝을 바닥에 찍었다.
청석을 부수며 땅에 박히는 창.
그 날이 웬만한 도(刀)의 도신만큼 긴 언월도는 흉흉한 기세를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딱 봐도 보통의 병장기가 아닌 언월도 위로 거한의 난폭한 기(氣)가 흐른다.
“십이군(十二君)의 위령천이다.”
“십이군이요?”
“네놈은 모를…….”
“사혈천이 이 일의 주범이군요?”
당연하다는 듯 사혈천을 언급하는 주현운의 모습에 위령천의 눈이 커졌다.
십이군의 존재 자체를 아는 자가 이 무림맹에도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위령천의 놀람을 눈치챈 주현운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설 형이 알려 줬어요. 아, 흑룡단주라고 해야 알아들으시려나?”
“……과연, 그 괴물의 짓인가.”
설천위라는 이름 하나에 바로 납득해 버린 위령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언월도를 겨눴다.
“그렇다면 문답무용. 빠르게 결착을 짓도록 하지.”
“아, 잠깐 궁금한 게…….”
주현운이 대화를 이어 가려고 했지만, 위령천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갈 생각이 없었다.
단숨에 돌진하는 위령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위령천이 뒤로 당긴 언월도를 휘두른다.
허리를 틀어 만들어 내는 무시무시한 회전력.
화려한 초식 따윈 없었다.
단순하고 무식하게.
최적의 경로로, 최속의 속도로, 최대의 위력으로.
휘두른다.
콰가가가가가각!!
머리 위를 막은 주현운의 검이 거친 소음을 만들어 내며 삐걱거린다.
주현운의 검이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힘.
단순하게 위령천의 언월도가 무식할 정도로 강했다.
주현운이 방어해 내는 게 버거울 정도로.
거기다.
‘이상해.’
흘릴 수조차 없었다.
무슨 사술을 부린 건지 검을 쥔 손에 느낌이 왔다.
어설프게 흘리려 들면, 오히려 당한다.
그건 확신이었다.
본능이 외치는 확신.
이를 악물고 위령천의 공격을 버텨 낸 주현운은 이내 속도를 이용해 만들어 낸 힘이 전부 흩어진 위령천의 언월도를 튕겨 냈다.
거리를 벌리고, 자세를 다잡는다.
“대단하군.”
그런 주현운의 모습에 위령천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수련을 허투루 쌓지 않은 건 확실하구나.”
“기본이지.”
“그 기본을 안 해서 내 일격조차 받아 내지 못한 무인의 숫자가 수십이다.”
순수하게 주현운을 칭찬하며 위령천은 다시 자세를 다잡았다.
“무(武)란 결국 파괴의 기술. 효율은 중대한 문제지.”
앞으로 겨눈 언월도를 천천히 당긴다.
날을 자신의 어깨 뒤로 당기고, 자세는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앞으로 기운다.
“누가 더 효율적인지 겨뤄 보자꾸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다시 한번 땅을 박찬 위령천이 순식간에 주현운의 앞에 도달한다.
자세를 갖춘 상태에서 휘두르는 일격.
머리 위로 떨어지는 위령천의 언월도는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힘을 품고 있었다.
힘.
압도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힘은 그 자체로 절망적인 폭력이 된다.
막는 것으론 안 된다.
그것을 직감한 주현운은 검을 세웠다.
막는 것도, 흘리는 것도 안 된다면.
“후우…….”
피하면 될 뿐이다.
위령천의 언월도가 단숨에 주현운을 가른다.
주현운을 반으로 가르고 지나간 언월도가 바닥을 때리며 순식간에 청석을 가루로 만들었지만, 그 위로 피어오르는 것은 먼지뿐이다.
먼지를 가라앉히는 피도.
뜨겁게 쏟아지는 장기도 없었다.
“재빠르군.”
위령천의 솔직한 감상과 함께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주현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만능형이라서요.”
“오만하군.”
“자신을 잘 아는 거죠.”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형환위로 남긴 자신의 환영을 단숨에 가른 언월도를 주현운은 조용히 바라봤다.
압도적인 힘을 추구하는 무인.
제대로 된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없는 유형의 무인이다.
보통 자신의 몸 하나를 믿고 무인이 됐지만, 고위 무공을 배우지 못하는 낭인이나 흑도의 무인들이 선택하는 길이다.
그도 그럴 게, 제대로 된 상승 무공을 접한다면 싫어도 깨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一)의 힘으로도 백(百)의 기술로 천(千)의 힘을 만들어 내는 무공이 있음을.
십(十)의 힘으로도 만(萬)의 공격을 막아 내는 무공이 있음을.
깊고 넓은 무공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알 수밖에 없었다.
우직한 노력만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은 포기한다.
이 길로는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포기한다.
가끔, 정말 아주 가아끔.
그 절망적인 현실조차 무시하고 나아가는 이들이 있고, 그들 중에서도 정말 한 줌, 아니 한 톨.
끝내 길의 끝에 도달하는 자들이 있으나, 그야말로 그건 정말 한 톨뿐이었다.
무림의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숫자.
그리고 그런 희귀한 무인이.
“재미있네요.”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주현운은 웃었다.
“심심했거든요.”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은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웠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눈앞에 있는 적이니까.
순간, 검을 세운 주현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자세를 갖추고 다시 한번 돌진하려고 했던 위령천은 코앞으로 들이닥친 검에 다급히 언월도를 눕혔다.
검과 언월도가 부딪치는 순간, 강렬한 폭음이 터져 나온다.
강기(罡氣)와 강기(罡氣)의 충돌.
위령천의 언월도를 감싼 강기를 보며 주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강기(罡氣).
학관에서는 거의 보지 못한 거다.
뭐, 애초에 학관에서 자신들 이외에 강기를 쓰는 친구가 있었다면 굳이 강기를 숨기지도 않았겠지만.
갑(甲) 졸업은 조금 탐이 나긴 했지만, 졸업 후에 귀찮은 인간들이 달라붙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조용히 남궁선에게 부탁해 창천단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던 거였고.
학관장님은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그나저나.
“오랜만에 전력으로 싸울 수 있겠네요.”
비틀린 미소와 함께, 주현운의 검이 움직였다.
말도 안 되는 근력으로 주현운의 검을 단단하게 막아 내고 있던 언월도가 흔들린다.
‘……진동?’
검이 떨리고 있다.
아니, 강기가 떨리고 있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위령천의 눈이 가라앉는 순간.
“불가해(不可解). 설 형이 알려 준 전투의 기본이지요.”
싸움은 정보전이다.
임기응변이란 항상 완벽할 수 없다.
미리 알고,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
그게 승리로 가는 지름길이며, 전투의 기본이다.
그리고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적이 예상할 수 없는 수를 꺼내는 것 또한 승리의 열쇠가 된다는 소리였다.
고지식한 인간들은 이 말을 들으면 아마 이렇게 말할 거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정말 다급한 순간에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건 손에 익은 무학이다. 어설프게 준비한 변칙적인 수법이 얼마나 통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무리 적의 움직임을 읽어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는 분명히 있다. 인지를 뛰어넘은 적에게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쌓아 올린 수련뿐이다.’
뭐, 이런 따위의 소리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어설프게 준비한 변칙적인 수법보다 뼈를 깎아 단단하게 다진 기본기가 훨씬 도움이 되니까.
다만.
“재능이 있으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게 되지요.”
그건 재능이 없을 경우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설천위가 술법으로 그러했듯.
주현운 또한 전투에서 얼마든지 완성된 새로운 수를 꺼낼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무학(武學)으로.
“거대한 암석을 석공들이 어떻게 쪼개는지 아시나요?”
“끄으읍!”
자신의 언월도를 파고드는 주현운의 강기에 위령천은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면, 언월도가 쪼개진다……!
“간단합니다. 구멍을 뚫어 거기에 말뚝을 박고 열심히 박아 넣는 거지요.”
우웅! 우웅!
위령천의 압도적인 힘을 버텨 내기 위한 강도를 지닌 위령천의 강기를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강기가 파고든다.
“박아 넣은 말뚝을 때리고, 또 때리고 때리다 보면, 끝내 그 거대한 바위가 쩍 하고 갈라집니다.”
“이, 괴, 물 놈이……!”
이딴 짓을 하면서도 말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니.
대체 뭐 하는 괴물이란 말인가……!
강기(罡氣)를 무슨 말뚝처럼 일일이 때려 박는 게 말이 쉽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당장에라도 쪼개질 듯 휘청거리는 언월도의 몸체에 위령천은 이를 악물고 양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대로 가면, 창은 어차피 쪼개진다.
다른 동료들과 다르게 자신의 창은 실체를 가진 진짜 병기.
쪼개지면 자신의 능력으로는 복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흐으읍!”
어차피 쪼개질 거라면, 최후의 불꽃을 태워 주마.
전신의 근육을 부풀린 위령천은 망설임 없이 창을 앞으로 밀어붙였다.
주현운의 강기가 창대를 휘감은 강기를 쪼개고 파고드는 속도가 가속화됐지만, 반대로 주현운의 검 자체는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밀어냈으니, 물러난다?
“흐아아아아압!!”
안타깝게도 그런 선택지는 없었다.
기합을 내지르며 위령천은 그대로 주현운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은 곧 두 걸음이 되고, 두 걸음은 세 걸음, 세 걸음은 뜀박질로 변한다.
청석이 깔린 수련장의 바닥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내며 위령천은 거의 반쯤 허공에 뜨다시피 한 주현운을 밀어붙였다.
이대로 벽으로 몰아붙여서 힘으로 찍어 눌러 주마.
이런 조잡한 방법 따위 이 힘으로 짓밟아 주마……!
“아, 맞다. 생각났다.”
이를 악물고 나아가던 위령천의 걸음이 일순간 멎었다.
나아가지 못한다.
“십이군이라고 했죠?”
빙글빙글 웃으며, 주현운은 아까 위령천이 돌진해 온 탓에 끊겼던 질문을 이어서 던졌다.
“약해 빠진 잡귀들이 모인 곳이라던데, 당신은 꽤 강하네요? 십이군 중에서도 강한 편인가요?”
강한 편이냐.
그 질문과 함께.
촤악!
위령천의 창대를 쪼갠 주현운의 검이 위령천의 가슴을 갈랐다.
“뭐, 그리 강한 것도 아닌 것 같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