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1화
460화-무림맹에서 (2)
단숨에 거인을 베어 넘긴 소윤혜는 덤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조급해하지도, 떨지도 않는다.
휘둘렀던 도를 부드럽게 거둬 도집에 넣으며 소윤혜는 담담하게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인 주현운과 문율 또한 무기를 거두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겁먹었던 모습은 장난이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소윤혜의 뒤를 따르는 두 사람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두려움 따윈 없었다.
담담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걸어가던 세 사람은 별다른 제지도 받지 않고 건물의 정문에 도착했다.
“불러도 나오지 않는다면, 일단 들어가고 나서 생각해야겠지.”
“그건 어디서 배워 먹은 무식한 방식……. 컥!”
덤비는 문율의 울대를 가볍게 친 소윤혜는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별다른 소음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
그리고.
“흐응?”
아무도 없는 복도의 끝. 그곳에서부터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소윤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도 주인이 없진 않나 보네?”
빙긋 웃으며 당당하게 나아가는 소윤혜.
작은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나아가는 순간.
[이상하군.]
벽에서 튀어나온 창이 소윤혜의 발 앞에 꽂혔다.
분명 벽에서 튀어나올 때는 벽을 통과했는데, 소윤혜의 발 앞에서는 바닥에 구멍을 뚫으며 박힌 창.
[딱히 방해가 될 요소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만하네요. 무림맹 한가운데서 이런 일을 벌여 놓고, 방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입꼬리를 비튼 소윤혜가 도에 손을 올리는 순간.
[어려 보이는 계집. 섣불리 무기를 뽑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창을 움켜쥔 거한의 경고와 함께 공간이 비틀렸다.
들어왔던 문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끝을 알 수 없는 복도의 한중간에 서 있다.
거기다.
“……빠르네요.”
[고작 무인 나부랭이가 술사의 공간으로 들어오다니, 아무리 오만해도 정도가 있다.]
순식간에 사라진 주현운과 문율의 기척에 경계심을 끌어올린 소윤혜는 거한을 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오만이라,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만이다.]
“아뇨. 진심으로 오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의 말은 전제부터가 틀렸으니까요.”
스르릉.
도가 뽑혀 나오는 서늘한 소리와 함께, 소윤혜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그냥 무인 나부랭이라고 했죠?”
* * *
“이건 곤란한데요.”
꽤나 키가 컸지만, 아직은 무인들 사이에선 작은 편인 문율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넓은 공간.
아마 실내 수련장으로 보인다.
중간중간에 기둥이 있고, 몇 개의 목인이 서 있는 걸 보면 맞겠지.
백화단이나 만귀단에서 최근에 무공 수련을 장려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깔끔한 실내 수련장이 있을 줄은 몰랐네.
하긴 밖에서 먼지 구덩이를 구르는 데 적응한 무인들과 달리 술사들은 먼지 속을 구르는 걸 질색하니까 당연한가.
청결의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기껏 준비해 놓은 부적이나 법구가 더러워지면 위력이 약해지니 상당히 싫어한다고 했지.
그런 의미에서 이런 실내 수련장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호신(護身)을 위한 무공 수련은 실내 수련장으로도 충분하니까.
태극권으로 대표되는 유술(柔術) 계열의 무공들은 이런 실내 수련장에서 대련 위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실제로 사람의 공격을 흘려 봐야 감이 잡히는 부분이 많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런 선택은 나쁘지 않은…….
“주인이 있었네요.”
[꽤나 태평하구나.]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멋쩍게 웃고 있는 문율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웬 침입자가 있다고 해서 기껏 왔더니, 상대가 이런 실없는 애송이일 줄이야.]
“헤헤, 그건 미안하게 됐네요.”
[소갈머리가 없기까지. 쯧, 완전히 꽝이네.]
혀를 찬 여인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촥 하고 펼쳤다.
분명 한 뼘 정도 되는 길이의 부채가 순식간에 웬만한 장검 수준의 길이로 커지는 것과 동시에 몇 개의 살의 끝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흉흉한 무기네요.”
[인간일 적에는 쓰지 못했던 무기지.]
이렇게 크기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신병이기가 어디 있겠어.
죽은 후에나 만들고 다룰 수 있게 됐지.
문율의 태평스런 감상에 답하며, 여인은 부채를 등 뒤로 당겼다.
그리고.
[귀찮으니 빠르게 끝내자꾸나.]
눈을 깜빡인 순간, 여인의 부채는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렀다.
거기서부터 나오는 압도적인 바람.
거센 것을 넘어 날카롭기 그지없는 바람이 순식간에 문율을 덮쳤다.
[흐응? 그래도 잔재주는 있는 것 같구나.]
“칭찬 고마워요.”
바람이 가라앉은 직후, 여전히 그대로 서 있는 문율의 모습에 여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과연 침입자는 침입자란 건가?’
정문을 막고 있는 그 머저리가 당했다길래 어떤 녀석들인지 궁금했는데, 과연 한 재주 하는 놈들이라 이거지.
작게 고개를 끄덕인 여인은 손에 쥔 거대한 부채를 비틀기 시작했다.
선을 그리고.
원을 그리고.
점을 그린다.
다양하게 휘몰아치는 바람은 돌풍이 되었다가 용오름이 되었다가 폭우가 되었다가 하면서 수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세는 것은 어림도 없었고, 다 받아 내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바람이 순식간에 문율을 무섭게 몰아붙였다.
베이고, 맞고, 눌린다.
인간이 휘두르는 무기와 달리 시작점도, 경로도, 끝나는 점도 자유로운 바람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하게 문율을 몰아붙였다.
“흐읍!”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지 않고 받아 낸 문율은 그 직후에 양옆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식은땀을 흘렸다.
피했다면, 무너진 자세로 저 다음의 공격을 받아 내지 못하고 치명상을 입었을 거다.
그리고 그 뒤에는 또 이어지는 공격에 목을 내어줬을지도 모르지.
[감이 좋구나. 꼬마야.]
“……꼬마라는 단어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아줌마의 나이를 생각해서 봐드리죠.”
[……아직 여유가 있구나?]
명백하게 화가 난 여인의 목소리에 문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한참 여유가 있어요.”
[그렇다면 그 여유를 깨부숴 주마.]
즉답.
여인은 여태까지와 달리 부채를 빠른 속도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채 끝에 걸린 바람은 더욱더 날카로운 칼날을 토해 냈고.
넓은 면이 만들어 내는 바람은 묵직한 주먹이 되어 날아간다.
휘몰아치는 바람은 균형을 흔들고, 흔들린 빈틈을 노린 칼날은 문율의 살을 갈랐다.
“흐읍!”
쳐 내도 바람이기에 그저 흩어질 뿐.
완전히 베어 내지 못한 바람은 오히려 더욱 악재가 되어 문율을 흔들었다.
[호호호호! 검을 든 검사가 그리 멀어서야 날 벨 수 있겠니?]
비웃음과 함께 미친 듯이 바람을 쏟아 내는 여인.
그 공격에 문율은 천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여인의 조롱대로 검을 쓰는 문율이 이대로 밀려나기만 한다면 그 결말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
그러나.
“흐응~?”
문율은 피가 흐르는 뺨을 핥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기이할 정도의 여유에 여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순간.
“이런 느낌이구나.”
흥분과 두근거림으로 가득한 두 눈으로 문율은 환하게 웃었다.
“바람을 이렇게 쓰는 건 처음 봤는데, 나쁘지 않네요. 무공으로 바꾸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하? 무공으로 바꿔?]
그게 무슨 헛소리야?
문율의 이상한 말에 여인이 미간을 찡그리는 그 순간.
[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녀석, 지금 무슨 짓을 했지?]
분명 바람이 놈의 목을 정확하게 노리고 들어갔는데, 어째서 단숨에 흩어진 거지?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말했잖아. 무슨 느낌인지 감 잡았다니까.”
여인의 반응에 히죽 웃는 문율은 어느새 바뀐 분위기를 풍기며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여태까지 보인 강아지 같은 분위기는 거짓이었다는 듯 거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한 문율은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람을 베고, 바람을 찢으며.
“나쁘지 않아. 단순히 영력을 이용해 바람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의념을 이용하는 거지?”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
그야말로 하늘의 은하수를 품은 것 같은 두 눈으로 모든 것을 담으며 문율은 앞으로 나아갔다.
“흥미로워. 무공에 의념을 담는 방식이랑 다르지만, 이쪽이 효율은 더 좋은 것 같아.”
영롱하게 빛나는 두 눈에서 폭포수처럼 안광이 일렁인다.
기이할 정도로 아득한 그 두 눈에 압도된 여인이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순간.
“멈추지 마. 아직 덜 봤으니까.”
어느새 그 몸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걸어오는 문율이 그녀를 향해 명령했다.
한 걸음.
“나는 아직 네 바람을 전부 보지 못했어.”
거대한 파도가.
“좀 더 끌어내. 끄집어 올려.”
아득할 정도의 속도로.
“모든 것을 쥐어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나에게.”
세상을 집어삼킨다.
“바쳐.”
하늘에 닿을 정도의 눈부신 재능이 설천위라는 괴인을 만나 감화되어 탄생한 길.
그것은 모든 것을 품는 대해(大海)가 세상을 집어삼키는 길을 선택한 결과.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대해(大海).
넘치는 바다가 패도를 품고 나아가는 재앙.
몰아치는 바람을 전부 집어삼키며 문율은 앞으로 나아갔다.
[무량대해(無量大海) 패도(覇道)]
바람은 거대한 파도에 부딪혀 허무하게 흩어지고.
만들어진 거품은 금세 사그라들어 한 줌의 무(無)로 화(化)한다.
[으, 으아아아아아!! 오지 마! 오지 마!!]
어느새 여유 따윈 전부 잃어버린 여인이 미친 듯이 부채를 휘둘렀지만, 이미 모든 것을 읽힌 바람이다.
거대한 해일 앞에서 작은 거품만을 일으키고 사라지는 바람.
그리고.
“이런 방법인가?”
해일에서 솟구친 용오름은 거대한 태풍이 되어 앞으로 나아갔다.
문율이 만들어 낸 바람이 거대한 힘을 품고 앞을 막는 모든 바람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콰가가가가가각!
[끄, 끄으으으아아아!!]
끝내 여인에게 도달한 용오름은 재해를 부채로 막아 보려는 여인을 비웃듯 순식간에 여인을 집어삼켰다.
처참하게 찢기고 갈라지는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던 여인은 바람의 힘이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땅에 떨어질 수 있었다.
[끄으으으……!]
입술을 악물고 몸을 일으키려는 여인의 손을 나타난 발이 지그시 밟는다.
[꺅!]
“갑자기 비명이 귀여워지셨네.”
비웃음.
여태껏 당한 적 없던 치욕에 여인이 표독스럽게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나쁘지 않아. 이 손에 쥐고 싶을 정도야.”
날카로운 눈빛의 문율이 여인의 턱을 잡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처음 보았던 순둥이 같은 인상은 어디 갔는지, 날카로운 남자의 얼굴이 된 문율과 마주한 여인은 살짝 눈을 돌렸다.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여인이 악과 독기로 마음을 재무장하는 사이.
“쩝, 안 되네.”
어느새 특유의 둥근 인상으로 돌아온 문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럼 잘 가요.”
거침없이 여인의 목을 베었다.
인상이 싸늘해지든 둥글든 그 심성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쓴 문율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의 머리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형님은 보통 이러면 자기 거로 만들던데, 전 아직 안 되나 봐요.”
……미친놈아, 대화를 해야지.
조금만 더 했으면 넘어갔을 수도 있어!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문율을 노려보던 여인은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
영력을 품은 문율의 검에 목이 베인 탓에 혼이 소멸을 맞이하기 시작한 거다.
제대로 된 욕도 한 번 쏟아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자신의 처지에 여인이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
“울지 마요. 그래도 안 아프게 단숨에 베어 줬잖아요. 왜 울고 그래요. 슬프게.”
잘린 머리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문율의 모습에 여인은 깨달았다.
아.
‘내가 정말 미친놈이랑 만났구나.’
무량대해(無量大海)라.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재는 살짝 돌아 버린 선배를 만나고 그를 동경한 탓에 살짝, 아니 어쩌면 상당히 많이 검게 혼탁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