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9화
458화-뒷수습 (3)
“상황은?”
“도시를 수습하느라 바쁜 모양입니다.”
“그만한 난리가 났는데, 그럴 만도 하지.”
부하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자신의 앞에 놓인 지도를 내려봤다.
남경.
얼마나 먹어 치우고 싶었던 도시인가.
물론 이번 일로 그 가치가 크게 훼손되긴 했지만, 구관이 명관이라고.
“회복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다.”
무림맹 놈들이 뼈 빠지게 일하고 있으니 상황은 꽤나 빠르게 진정될 테지.
특히, 놈들이 내세운 성주 대리.
똘똘하게 머리를 썼다.
성주의 핏줄을 내세워 명분을 챙기다니.
아무리 관리들이 욕망에 충실하다고는 하지만, 황실의 피를 무시하진 못한다.
황족이 아니게 됐다고 해도 왕족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무려 황제가 강소성이라는 하나의 성의 자치권을 인정해 준 핏줄이다.
그런 핏줄이 전면에 나섰으니 관리들이라고 해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을 터.
그리고 그런 조건이 갖춰지면 그다음부턴 이야기가 빠르다.
쓸데없는 헛짓거리로 돈과 인력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 없다면, 행정 업무가 정상화되는 건 금방이다.
이 나라는 그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깊은 저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황실의 사절이 오기까지 약 두 달.
성주 대리가 완전히 성을 장악하면 무난하게 성주의 자리를 승계하고 이야기가 끝날 터.
성주 대리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여자라는 사실이지만, 그거야 뭐 적당한 데릴사위 하나를 들이면 바로 해결될 문제다.
마침 무림맹과 연이 이어진 상태이니 적당한 남자 하나 붙잡아서 혼인하면 관리들도 쉽사리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게 될 거다.
“꽤나 앙큼한 년이야.”
듣기로는 전형적인 양갓집 규수 같다고 했는데 말이다.
“핏줄 어디 안 간다고, 나름대로 능력이 있는 인간이었어.”
과연 이 거대한 중원을 차지한 황실의 핏줄답다고 해야 할까.
“가주님.”
성주 대리를 떠올리며 피식 웃던 사내는 부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연락이 끊기는 조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무림맹 놈들, 분명 도시 수습에 전념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계획대로라면 부하들은 이제야 남경 외곽에서 조금씩 활동하는 수준일 텐데?
그걸 벌써 알아채고 움직였다고?
“그것이…… 남경 밖에서 활동하던 조에서도 연결이 끊긴 이들이 있습니다.”
“설마 맹주가 움직인 것이냐?”
순간 오싹한 생각에 상체를 앞으로 당긴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그 미친년.
어찌나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는지 사파의 거의 모든 가문이 몸을 사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다고?
이런 구석까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솟구치던 불안감은 부하의 대답에 살며시 가라앉는다.
“그래, 아무리 그 미친년이라고 해도 이곳까지 오진 않았겠지.”
저 중앙에서 할 일이 오직 많은가.
중앙에도 지금 맹주가 죽이겠다고 선포한, 사람 장사를 하는 놈들이 수두룩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정리하기에도 바쁠 텐데, 이런 곳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댄 사내는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냐? 무림맹 놈들은 아직 여유가 없을 텐데?”
“그게……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정말 완전히 연락이 끊겨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그대로 손에 잡힌 벼루를 집어던진 사내는 부하의 이마가 깨져 피가 터지는 걸 보고도 화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 가문이 정보력에 들인 돈과 시간이 얼만데, 그딴 얼빠진 대답을 내놔?! 네놈이 정녕 무능함을 내게 증명하고 싶은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알아내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따위가 아니다. 당장 알아내도록.”
“조, 존명!”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물러나는 부하.
그런 부하를 보며 혀를 찬 사내는 다시 의자에 기대서 턱을 괴었다.
“그 미친년이 온 게 아니라면, 무림맹이란 소리인데…….”
성의 혼란을 잠재운 건 분명 남경 지부의 부지부장이라고 했다.
성주 대리인 성주의 손녀를 구한 것도 그자라고 했고.
이 일이 있기 전에도 정치적인 면은 지부장에게 전부 맡겨 그쪽으로는 딱히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머리가 깨져라 일을 하고 있어야 정상인데…….
그런 와중에 사건이 터지기 전에 있었던 이쪽과의 분쟁을 떠올리고 움직이고 있다고?
부족한 인원을 쪼개서 따로 운용해서까지?
‘……설마 외부의 조력이 있었나?’
아니, 아니지.
설마 외부의 조력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당연히 외부의 조력이 있었겠지.
자신들도 알지 못했던 대규모 술식이다.
은밀하게 준비해 왔고, 단숨에 터져 나왔다.
그 거대한 남경시의 절반 정도가 집어삼켜졌는데, 그게 보통의 술법일 리가 없었다.
아마 거의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대술법이 펼쳐진 것일 터.
그만한 술법을 단숨에 제거해 냈다.
며칠이나 이어져 막대한 희생자를 낳긴 했지만, 막상 술법 자체가 사라진 건 순식간이었다는 증언들이 많았다.
들어갈 수 없게 된 금릉성 주위로 갑자기 들어갈 수 있게 됐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 술법을 단숨에 해제했다는 소리다.
“부지부장의 이름이 분명…….”
설천강.
호남설가의 차남.
그리고.
“……흑룡단주!”
흑룡단주의 형.
무력은 화경에 오르고, 술법으로는 거대한 흑룡을 다룬다는.
정말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괴물.
고작 스물을 조금 넘긴 나이에 이뤄 낸 경지라고는 믿기 힘든 소문만 가득한 인물.
만약, 그런 인물이 금릉성 탈환의 조력자였다면?
남경의 절반을 집어삼킨 술법을 단숨에 해제한 장본인이라면?
“……빌어먹을!”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친 사내는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험하다.
술사들 중에는 사자(死者)의 혼을 불러내 정보를 얻어 내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흑룡단주는 정파인 주제에 그런 술수에 능하다는 소문이 있는 인물이다.
그 손을 거친 죄인들은 끔찍한 비명만을 내뱉고 죽어서도 편히 가지 못한 채 알고 있는 모든 걸 토해 내게 만든다는 괴물.
그런 괴물이 움직이고 있다면, 여기 앉아서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일단 가문의 경계 수준을 높이고, 외부로 돌고 있는 무력대를 한차례 안으로 불러들여야…….
“눈치가 빠르네, 우리 종 가주.”
“뭐 하는 놈이냐!”
순간 거칠게 칼을 뽑은 사내, 종 가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예 눈치채지 못했다……!’
초절정의 끝자락, 화경을 목전에 둔 자신이 상대가 방에 들어올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건 상대가 화경의 고수라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은신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자가 아니라면, 이만한 경계를 뚫고 들어온다는 건……!
“눈깔 돌아가는 거 봐라.”
피식 웃은 설천위는 목을 노리고 들어온 검을 가볍게 밀어냈다.
검기를 두르고 있는 검을 두 손가락으로 잡아 이리도 쉽게 처리하다니.
‘……괴물!’
오싹함과 함께 종 가주는 즉시 손에 힘을 풀었다.
이런 고수를 상대로 버티는 건 헛된 발악이나 마찬가지다.
일단 물러나서 상황을…….
“에헤이, 어딜?”
“큭!”
뒤로 당긴 발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낀 종 가주가 이를 악무는 그 순간.
“당신한테는 미안하게 됐어.”
흑관으로 결박한 종 가주의 어깨에 손을 올린 설천위는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마침 내가 복귀했다는 증거도 필요하고 해서 조금 화려하게 할 생각이거든.”
히죽 웃으며 종 가주와 어깨동무를 한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봐 봐, 절강종가. 여길 싹 털어 내면 내가 돌아왔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겠지?”
히죽 웃으며 설천위는 손을 뻗었다.
“사파가 왜 이렇게 빌빌대는지 알겠네. 가문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일 처리가 되겠어?”
“공자, 공자와 저라면 오대세가에도 이 정도 난리는 칠 수 있습니다.”
“근데 막힐 거잖아.”
오대세가의 저력이 얼만데.
어깨를 으쓱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유예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딱히 막힐 것 같진 않은데요.”
단순한 화경급 고수도 웬만한 가문에서는 재앙이겠지만, 설천위는 그 이상이다.
무력만 강한 걸 넘어서서 독특한 술법을 사용하는 설천위는 웬만한 현경급 고수만큼이나 까다로운 적이었다.
오대세가라고 한들 쉽사리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유예린의 대답에 작게 헛기침을 한 설천위는 고개를 돌려 종 가주를 바라봤다.
“아무튼, 증거는 챙겨 왔지? 이 아저씨가 한 일들에 대한 증거.”
“물론이죠. 이 정도면 백유 그 여자가 움직였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 정도란 말이지?”
절강성.
바다를 접하고 있는 성이기에 배를 이용한 운송은 상당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북쪽에 있는 북경 근처까지 배로 이동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큰 장점이다.
그리고 운송의 이점은 특히 밀수에서 그야말로 황금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
사람 장사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백유가 그렇게 엄포를 놓았는데도 아직도 사람 장사나 하고. 하긴 황실에선 값을 꽤 잘 쳐줄 테니까 포기하기 힘들었겠지.”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종 가주의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을 더하며 웃었다.
설천위의 몸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 패기(覇氣)가 흑관과 뒤섞여 종 가주를 완전히 옭아맸다.
그리고.
“걱정 마. 내가 다 정리해 줄 테니까.”
[암천룡(暗天龍)]
설천위의 어깨에서부터 솟구친 거대한 용이 천장을 뚫고 올라간다.
무너지는 나무 잔해 속에서.
“오늘부로 폐업이야. 종 가주.”
악귀가 그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 * *
“……헛걸음을 했군.”
적랑대 대주, 성무경은 저 멀리서 솟구치는 흑룡의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대주님.”
“흑룡단주다. 호남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은데, 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군.”
“흑룡단주라면 손을 보탭니까?”
손을 보탠다.
부하의 물음에 성무경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고작해야 종가다. 우리가 손을 보탤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그래도 칠가(七家) 아닙니까?”
“이제는 오가(五家) 아니, 사가(四家)라고 해야겠군. 고작해야 사파의 영역 안에서나 어깨를 거들먹거렸던 놈들이다.”
정파의 오대세가를 흉내 내 자신들을 ‘칠가’라고 부르는 놈들이었지만, 실제 힘은 한참 미치지 못했다.
정말 오대세가에 비빌 수 있을 정도였다면 사천맹이 전대 맹주의 절대 권력으로 움직이진 못했겠지.
“일할 수고를 덜었군.”
거대한 용이 날뛰며 무너지기 시작하는 종가의 건물을 바라보던 성무경은 이내 몸을 돌렸다.
“돌아간다. 맹주님께 보고하고, 절강성에 새로운 지부를 세우도록 하지.”
“예?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면…….”
“무림맹은 지금 강소성을 수습하기에도 바쁘다. 거기다.”
설천위라면 백유와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 리 없었다.
게다가 절강성을 탐낼 위인이 아니었다.
“적당히 기다렸다가 종가가 사라진 절강을 점령한다. 준비하도록.”
* * *
“후우.”
거친 숨을 내쉬며 뺨에 묻은 피를 닦아 낸 주현운이 해맑게 웃었다.
“대충 정리된 것 같은데요?”
“응. 그러네.”
주현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소윤혜는 차분한 눈길로 주위를 살폈다.
“만귀단이 완전히 먹힌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한두 명이 배신한 게 아닌 모양이야.”
소수의 배신만으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리가 없다.
소윤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문율은 검을 거두고 자신이 벤 악귀를 만졌다.
“실체가 있어요. 무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따로 준비한 것 같은데요.”
“술사들이 손도 못 쓰고 당한 걸 보니 다른 수작도 부려 놓은 것 같네.”
그렇다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진다.
뭐.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네.”
이야기는 복잡해졌지만, 이쪽이 할 일은 하나뿐이지.
“나아가자. 목표는 만귀단주의 구출 혹은…….”
도(刀)를 허리에 찬 채 소윤혜는 그 여린 몸을 앞세워 걸어갔다.
“사살이야.”
처형인의 도(刀)가 죄인의 목에 그 죗값을 물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