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6화
455화-숨은 악의 (5)
붉은 연못의 중앙.
바위 위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물을 첨벙거리던 언여휘는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설천위를 보며 입술을 삐쭉였다.
“계속 그렇게 살벌한 분위기 풍길 거야?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도 흔치 않은데?”
삐진 연인에게 말하는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상체를 좌우로 흔드는 언여휘.
그 모습에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린 설천위는 여전히 다리를 꼰 채 불량스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꺼져.”
“어머, 냉정해.”
살짝 다리를 오므린 언여휘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훑었지만, 설천위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우리 천위는 취향이 확고한가 보네.”
“본능에 좌지우지될 정도로 나약했던 기억은 없어서 말이야.”
언여휘의 대화 시도에 이죽거림으로 일관하던 설천위는 순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머, 너무 빠른데?”
“너, 상당히 귀찮은 짓을 해 놨네.”
이 공간을 부수던 도중에 마주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네 혼이라지만 너무 막 굴리는 거 아니냐?”
“이미 너무 많이 해진 혼이라서 이 정도는 평범하지.”
후후, 웃으며 바위 위에 선 언여휘는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그런데 의외네~? 우리 천위는 꽤나 실리주의 아닌가?”
“실리를 따지긴 하지.”
그놈의 우리 천위.
일일이 지적하는 것도 귀찮네.
언여휘의 말을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설천위는 자신의 감각에 집중했다.
그런 설천위를 보고 히죽 웃은 언여휘는 다시 연못의 물을 일으켰다.
“그럼 대체 왜 나한테 정보를 캘 수 있는 이런 황금 같은 시간을 그냥 날리려는 걸까? 응?”
“미친 거랑 멍청한 거랑은 다르니까.”
미쳤다고 해서 손익을 계산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미친 사람들은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에 그렇게 보일 뿐.
“믿을 수 없는 정보를 얻겠다고 힘을 빼는 건 썩 효율 좋은 행동이 아니지.”
“흑흑, 나는 슬퍼. 우리 천위가 나를 그렇게 못 믿다니…….”
“쯧.”
본체와 마찬가지의 형상으로 빚어진 물이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하는 걸 보며 설천위는 혀를 찼다.
“헛소리 그만하고, 이 공간 유지에 집중할 생각 없으면 닥치고 짜져 있어.”
“나쁜 남자네. 그런 것도 매력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 조금 상처받을지도 몰라.”
“어쩌라고?”
진짜 어쩌라는 거지.
언여휘의 아양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낸 설천위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혈패황 얘기는 조금 흥미로워서 그냥 들었지만, 역시 그녀와의 대화는 영양가가 없었다.
차라리 완전히 무시하고 이 공간을 무너트리는 데 집중하는 게 더 나을 듯싶었다.
‘……실력 하나는 확실하네.’
제물로 자신의 혼 일부를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진짜 말도 안 되는 강도의 공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심상 세계지만.
언여휘도 이 공간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 힘을 대부분 사용했을 테니 외부에는 별문제가 없겠지만…….
‘너무 오래 붙들려 있어서 좋을 건 없지.’
언여휘가 자신의 내면으로 침투하기 직전에 느꼈던 그 악의(惡意).
방심해서 좋을 게 없었다.
언여휘가 어떤 의도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탈출을 우선시하는 게…….
설천위가 이 공간의 빈틈을 찾기 위해 더욱 집중하는 그 순간.
“흐음……. 좋아. 우리 천위가 쌀쌀맞으니 내가 특별히 조금 더 입을 열어 줄게.”
흥미를 끌고 싶은 걸까.
물로 만든 인형을 없앤 언여휘는 천천히 물 위로 발을 올렸다.
찰박이는 소리와 함께, 연못 위를 걸어 설천위에게 다가오는 언여휘.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의 두 눈이 천천히 커졌다.
“너……?”
“지우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지워 버렸지. 솔직히 너무 아팠거든.”
설천위가 남겨 놨던 낙인이 완전히 사라진 매끈한 피부를 손으로 쓸어 내며 언여휘가 웃었다.
“맨 처음 봉인하는 것을 도와줬던 녀석이 드디어 분석을 끝냈거든.”
분석을 끝냈다.
그 한마디에 설천위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설천위가 언여휘에게 새긴 낙인은 패기(覇氣)에 의한 것이다.
지금은 패기에 의존하지 않아도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됐지만, 패기가 설천위가 가진 힘의 근간 중 하나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힘을 분석해 내서 혼에 새겨 놓은 것을 없앴다니.
이건 문제였다.
이쪽이 가진 패기라는 힘을 완전히 분석한 적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
“어때? 쓸 만한 정보지?”
“……이런 걸 알려 줄 이유가 있나? 숨기는 게 네겐 더 효과적일 텐데.”
언여휘의 목적이 자신이라면, 이런 정보는 숨기는 것이 무조건 이득 아닌가?
미친 인간은 역시 미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설천위는 언여휘를 지그시 바라봤다.
낙인이 새겨진 곳을 보여 주기 위해 옷을 젖혀 살을 드러낸 인형.
인간과 똑같은 외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일으킨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형에게도 안쓰러움을 느낄 수 있고 사람에게도 느낄 수 있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다.
그런데 언여휘의 몸은 인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마치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러운 살결, 은은한 살내음, 생기 있는 피부.
“궁금하거든~. 우리 천위가 어디까지 갈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언여휘가 웃었다.
“위건, 그 늙은이를 집어삼킨 천위가 대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손휘, 그 영감을 휘어잡은 천위가 어디까지 높아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 손이 과연 하늘에 닿을 것인지.”
궁금하다.
“그 발이 과연 지옥에 닿을 것인지.”
궁금하다.
“그 의지가 과연 천지를 가득 메울지.”
나는, 그것이 너무나 궁금하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언여휘의 눈을 마주한 순간, 설천위는 깨달았다.
“미친년.”
“꺄하하하하! 칭찬이야!”
무너지기 시작하는 공간.
애초에 설천위가 깨부술 것도 없이 이 심상 세계의 유지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설천위나 되는 존재의 정신을 확실하게 가두는 것이 쉬울 리가 없지 않겠는가.
빈틈은 없으나, 찰나에 불과한 공간.
‘……지독할 정도네.’
그 미칠 듯 뛰어난 언여휘의 능력에 설천위는 새삼 혀를 내둘렀다.
언여휘는 분명 인체를 조작하고 괴이를 비트는 것이 주된 능력일 텐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걸 보면 게임 속에서 봤던 것만으로 판단해선 안 될 적 1순위였다.
무너지는 회색의 하늘 아래서, 혼을 대가로 지불한 언여휘의 파편이 흩어져 간다.
재가 되어 흩어지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는 언여휘는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 우리 천위,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 * *
혼란으로 가득 찬 금릉성.
뒤틀린 영역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현실이 드러나고 있는 성 안에서 설천강은 구역질을 억지로 삼켰다.
‘……미친.’
절로 욕이 나올 지경이다.
만약 옆에 여 소저가 없었다면 입 밖으로 내뱉었을 거다.
물론.
“미친 새끼들…….”
여웅은 거침없이 입으로 내뱉었지만.
분노로 가득 찬 여웅의 욕지거리에도 다른 사람들은 여웅을 책망하거나 쳐다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들도 같은 생각이었던 데다 보고 있는 광경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무리의 중간.
다른 이들과 똑같은 광경을 목격한 주송유가 주저앉아 사죄만을 반복했다.
그녀에게도 보였기 때문이다.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시체가.
처참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시체에 남은 손상은 사후에 남은 것이 아니었다.
살아 있을 적에 그들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어 갔을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주송유가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유예린은 감정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었다.
영역(靈域)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설천위가 이 공간을 무너트릴 정도로 영력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리였다.
언여휘의 공격을 받은 설천위가 영력을 전부 흡수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자꾸 나쁜 생각이 떠올라 불안감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떨리는 심장을 겨우 억누르며 설천위를 확인한 순간.
“후…….”
유예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눈을 똑바로 뜬 설천위가 평소와 같은 눈빛으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여휘의 수작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증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유예린이 설천위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아무래도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유예린의 앞을 가로막은 오련이 영력을 끌어올렸다.
인간을 벗어난 마(魔)가 되어 살아온 오련은 여기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 예민하게 설천위의 변화를 감지했다.
오련의 경계에 유예린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 버린 순간.
고오오오오오!!
설천위를 중심으로 검은 화염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용오름을 보는 것처럼 회오리치는 검은 화염은 이내 하얀색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칠흑의 화염과 순백의 화염이 싸우는 듯한 모양새.
서로 일렁이며 힘겨루기를 하는 회오리 속 화염의 모습에 유예린의 눈에 긴장감이 서리던 그때.
화악!
단숨에 화염이 일시에 사라지며 설천위의 모습이 드러났다.
흑색의 무복을 흩날리며 천천히 내려오는 설천위.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일행이 긴장하는 그 순간.
“천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간 유예린이 설천위의 앞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그 뺨에 손을 올리고 웃었다.
“어떤 년이야?”
내가 찜한 남자한테 혓바닥을 들이댄 게.
* * *
……어떤 년이냐니.
살벌한 유예린의 눈빛에 어색하게 웃은 설천위는 유예린의 손을 잡아 천천히 내렸다.
“뭐, 일단 밀어냈으니까 그렇게 살벌하게 보지 마.”
선물이라니.
똥을 뿌려 놓고 간 주제에.
이번에 흡수한 영력.
언여휘가 뿌려 놓은 악의에 오염됐다.
언여휘가 뿌려 놓은 악의를 걸러 내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거기다.
‘귀찮게 됐어.’
한데 뭉쳐 대충 짱박아 놓긴 했지만, 언여휘의 악의는 끊임없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제어에 실패하면 그냥 사용하는 영력도 오염될 터.
“아무래도 내가 활약하는 게 꼴 보기 싫었던 것 같아.”
영력의 오염을 걱정하면 제어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그러면 이런 대규모 술식을 사용하기 힘들어진다.
혹시라도 제어에 틈이 생겨 영력이 오염되면 아군에게도 피해를 안겨 줄 테니까.
설천위가 주력으로 활약할 수 있는 대규모 전투에서 그의 힘을 위축시킬 수 있는 지뢰다.
그리고 언여휘가 이런 지뢰를 굳이 심어 놨다는 건…….
“아무래도 무림맹으로 돌아가 봐야겠는데.”
자신이 방해하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 여기부터 정리해야겠네.”
뭐, 그쪽엔 내가 뿌려 놓은 게 많으니까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겠지.
* * *
“흐음.”
만귀단의 장원.
영역이 전개된 것을 깨닫고 담을 넘은 주현운은 헛숨을 삼켰다.
“이건 상상 이상인데…….”
“배신일 가능성이 가장 크네.”
천천히 걸어가며, 도(刀)를 가슴 쪽으로 끌고 와 품에 안은 소윤혜는 천천히 장원을 걸어갔다.
그리고.
[키아아악!]
달려드는 악귀의 목이 땅으로 떨어진다.
동시에 사방에서 요동치는 영력.
이쪽의 존재를 눈치챘구나.
그것을 깨달은 주현운, 소윤혜, 문율, 이 세 사람은 경계 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어머어머, 귀여운 도련님들이네?]
출렁.
풍만한 무언가를 흔들며 나타난 여인의 모습에 두 자루의 검이 멈칫했다.
그리고.
딱! 딱!
“저런 살덩이가 뭐가 좋다고…….”
짜증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머리에 혹이 생긴 두 사람은 말없이 다시 검을 들었다.
“설 공자는 유 소저가 유혹해도 꿋꿋하게 버텼는데, 근성 없는 놈들.”
“그건 설 형이 특이한 거죠!”
“맞아요! 대장이 이상한 거예요!”
그건 남자가 아니야!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주현운과 문율은 소윤혜의 날카로운 눈에 그만 깨갱했다.
풀이 죽은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소윤혜는 이내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그 여자를 쳐다봤다.
“여기, 영역(靈域)이지?”
[그렇다면? 도망칠 생각이니?]
귀여운 세 사람의 모습에 후후 웃던 여인은 비틀리는 소윤혜의 입꼬리에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그럼, 굳이 숨기지 않고 날뛰어도 되겠네.”
소윤혜의 허락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서걱!
강기를 머금은 주현운의 검이 여인의 상체를 갈랐다.
동시에 패기를 품은 문율의 검이 달려드는 악귀들을 찢어발긴다.
“쓸어버려.”
주인공급의 재능이 완연히 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