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455화 (455/624)

제455화

454화-숨은 악의 (4)

스며든다.

마치 먹물을 머금은 종이처럼.

순백의 화염이 검게 물들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천위!!”

검은 기류를 막아 내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진 유예린은 검게 물든 설천위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또……!’

나는 왜 중요한 순간에 항상 이렇듯 쓸모가 없는 걸까……!

질끈 깨문 입술에서 철의 맛이 느껴졌지만, 유예린은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 데 집중했다.

실패했을 때 중요한 것은 후회가 아니라 빠른 대처다.

고개를 들어 설천위를 살핀 유예린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여러분! 호위 진형으로!”

설천위의 순백의 화염이 검게 물들긴 했지만, 주변에서부터 설천위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영력의 흐름은 여전했다.

즉, 지금 설천위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라는 뜻이다.

예상치도 못한 기습에 당했으니 거기에 대처하느라 정신이 팔린 지금, 설천위에게 추가적인 공격이 가해지면 아무리 그라고 해도 큰 피해를 입게 될 터.

그런 사태만은 기필코 막아야 했다.

술법적인 것이야 설천위가 영력을 어마어마하게 빨아들이고 있으니 그나마 걱정을 덜어도 되지만, 물리적인 충격은 얘기가 다르다.

누군가가 설천위를 직접 공격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유예린의 지시에 그녀와 마찬가지로 감지했으나 놓친 설천강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으니까.

설천강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잡자, 그의 부하들 또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주송유와 부상자들을 설천위의 발아래 두고, 전투가 가능한 인원들이 원을 그렸다.

그렇게 시작된 호위.

모두가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때.

‘……빌어먹을!’

먼 거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물론 입을 열어서 소리를 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뭐, 애초에 내부가 완전히 망가져서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내공과 달리 영력은 물리력이 적어 역류해도 직접적으로 내부 장기를 망가트린다거나 하는 일은 적었다.

진짜 막대한 양을 다루던 게 아니라면 말이다.

다만, 영력이 역류하면 혼이 흔들린다.

육체는 영혼의 영향을 받기에 혼이 크게 손상되면 육체에도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지금 사내의 상태가 딱 그랬다.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하던 것이 설천위에게 그 주도권을 뺏기면서 영력이 뒤틀렸다.

혼이 꼬인 수준의 크나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다만.

‘탈출은 할 수 있겠군.’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언여휘가 자신을 도왔다.

저 멀리, 이제는 영혼의 잔재조차 남지 않고 축 늘어진 인형을 짧게 바라본 사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언여휘에게 기습을 당한 이상, 설천위라고 해도 순식간에 위험에서 벗어날 순 없을 터.

설령 벗어난다고 해도 그 여파로 인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긴 힘들 거다.

그러니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탈출하자.

그렇게 다짐한 사내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금릉성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강렬하게 타오르는 검은 태양을 뒤로한 채.

* * *

검게 물든 대지.

초목은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져 있고, 하늘은 회색으로 우중충하다.

그리고.

“역겨운데.”

유일하게 강렬한 색을 품은 붉은 연못 앞에서 설천위는 코를 막고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언여휘?”

연못의 한가운데, 삐쭉 솟은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참방거리고 있던 언여휘는 설천위의 물음에 빙긋 웃었다.

“우리 천위랑 대화가 하고 싶어서?”

“대체 왜 의문형인지는 모르겠지만, 짜증 나니까 꺼져라.”

툭, 가볍게 땅을 발로 밟은 설천위는 이내 더욱 심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 공간의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히히, 못 나가.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곳이야.”

자신만만하게 웃는 언여휘를 보며 설천위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난 아니야.

……라고 비웃으며 나가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고작해야 시간 벌이에 혼을 소모하다니, 미친 거냐?”

“나는 언제나 미쳐 있지~!”

그건 또 맞는 말이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자연스럽게 흑관으로 의자를 만들어 자리에 앉는 설천위의 모습에 언여휘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천위, 우리 천위, 능력의 사용이 꽤나 다양해졌네?”

“손장난이 늘어난 것뿐이지.”

“그 손장난을 못 해서 죽어 나간 술사 놈들이 연옥에 지천으로 깔렸지~.”

히히 웃으며 손을 까딱인 언여휘는 연못의 붉은 물로 이런저런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 천위는 귀여우니까 옛날이야기를 해 줄게~.”

“할망구, 헛소리 집어치우시지.”

“히히, 안 돼. 할 거야.”

웃음소리와 함께 연못의 물이 만들어 낸 것은 사내의 얼굴이었다.

꽤나 남자다운 이목구비의 미남.

어찌나 정밀한지 물로 만들었음에도 그 외모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 사람이 혈패황. 당시 정파로 가득했던 무림을 한 번에 쓸어버렸던 인물이야.”

꽤나 긴 시간이 걸렸지만, 혈패황은 당시 정파의 전력을 5할 이상 혼자 힘으로 쓸어버렸다.

죽은 고수들을 생각하면 7할 이상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여기서부터는 정파에서 숨기고, 사파 놈들은 모르는 진실.”

사내가 거칠게 걸음을 내딛는 모습으로 바뀐다.

“10만 대 1. 그 불가능한 전장에서 혈패황은 승리에 다가섰어.”

10만 대 1.

그 말도 안 되는 비율에 설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뭐, 지금은 상당히 축소해서 정파의 고수들이 나서서 합격진을 펼쳤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히히 웃은 언여휘가 손짓하자, 사내의 형상이 또 바뀐다.

심장을 꿰뚫은 봉.

“혈마대전 끝에 그의 힘을 감당해 내지 못한 정파의 무인들이 전멸하기 직전에 하늘에서 개입했지.”

“……하늘에서?”

“제천대성이 친히 내려왔거든. 업(業)을 짊어질 각오를 하고.”

그대로 두면, 정파는 전멸한다.

혈마대전에서 제천대성이 관여하지 않았더라면, 정파 무림은 끝내 그를 제거하지 못했을 거다.

그 뒤에는?

여전히 복수에 눈이 돌아가 미쳐 날뛰는 혈패황의 손에 정파의 씨가 말랐겠지.

위선(僞善)도 선(善)이다.

하물며 정파에는 진짜 선한 이들도 존재한다.

그들이 억제력이 되어 세상의 악인들이 지배자가 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는데, 그들 전부가 사라진다면?

아무리 황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극심한 환란이 찾아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물며.

“우리들은 그때도 있었거든.”

괴이(怪異)는 공포와 믿음을 먹고 자란다.

환란의 시기에는 피를 갈망하는 괴이들이 늘어나고.

태평성대의 시기에는 선을 베푸는 괴이들이 늘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은 괴이들의 중요한 양분이 된다.

공포와 믿음.

믿음과 공포.

그 둘이 합쳐지면 경외(敬畏)가 되고, 경외의 대상이 된 존재는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신(神)적인 존재가 된다.

혈교주가 그러하고, 사혈천의 수장이 그러하다.

그리고 망가진 무림에서 그들이 날뛰면 어떻게 될지는 그야말로 명약관화(明若觀火).

해서.

“제천대성이 무리를 좀 했지.”

당시에 인간을 향한 노골적인 악의를 품고 있던 존재들을 제천대성이 직접 봉인했다.

소멸시키는 것도 가능했으나, 그랬다간 그 업의 크기가 너무나 무거워지기에 봉인으로 그쳤다.

“비후랑 만났었다지? 비후도 그때 봉인된 거야~.”

비후(悲吼).

옛날, 청아를 처음 만났던 사건에서 조우했던 존재다.

게임 속에서 봉인되었다는 설정을 보긴 했지만, 누구에게 봉인되었는지 몰랐는데…….

‘제천대성이었나.’

생각보다 스케일이 크네.

설천위가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 언여휘가 만들어 낸 사내의 형상이 또다시 변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내가 상체를 숙인 채 입꼬리를 비틀고 있었다.

“제천대성에게 죽어 가는 와중에도 혈패황은 그 자리에 있던 고수들을 전부 죽였지.”

무림의 역사가 백 년 이상 후퇴했다고 말하는 가장 큰 이유.

당시, 각 문파의 절기를 직접 익히고 있던 초고수들의 떼죽음이 바로 그 원인이었다.

“사파 놈들도 꽤 많이 죽었지만, 정파 녀석들이 훨씬 더 많이 죽었지.”

그 결과, 사파와 정파는 거의 같은 시작점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서로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상황은 치열한 경쟁으로 이어졌고, 백 년이 넘는 경쟁 끝에 주도권을 정파가 다시 손에 쥐었다.

사존처럼 경천동지할 강자들이 사파에도 나타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인간들이 모인 사파는 그 결집력에 한계가 있었다.

무림의 주도권은 다시 정파가 손에 쥐었고, 사파는 부랴부랴 사천맹을 만들어 최소한의 밥그릇을 지켜 낼 수 있었다.

그렇게 틀이 잡힌 무림은 어중간한 평화를 맞이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제천대성의 힘이 끝을 보이고 있지.”

봉인은 많이 당해 봤지만 남을 봉인하는 데는 재능이 없었던 탓일까.

무신이 어쭙잖게 만들어 놓은 봉인은 고작 이백 년 남짓한 세월 만에 그 한계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지금.

“괴이들이 풀려나고 있어.”

묶여 있던 괴물들이 사슬을 끊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의 삶에 희망 따윈 없어. 재해(災害)는 파멸(破滅)이 되어 인세를 덮치겠지.”

히죽 웃으며, 언여휘는 손을 뻗었다.

“천위, 아무리 너라도 살아남을 수 없어. 지금이라도 내게 와. 밖에 있는 그 계집 정도는 함께할 수 있도록 해 줄게.”

후후 웃는 언여휘의 손짓에 따라,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던 물이 형상을 바꿨다.

굴곡진 몸매를 가진, 매혹적인 여인의 형상으로.

노골적으로 유혹해 오는 그 물의 형상을 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꺼져.”

“어머, 화끈해. 이런 면도 좋아.”

후후 웃으며 물을 흐트러트린 언여휘는 다시 발을 참방거리며 상체를 흔들었다.

“뭐,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넘어오게 되겠지. 현실이 눈앞에 닥쳐오면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그거야 사람마다 다르지.”

설천위의 담담한 대답에 언여휘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과연, 그럴까?”

* * *

섬서성, 서안.

무림맹이 자리 잡은 이곳에 제갈세가 또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 무림맹 본단을 세울 곳을 정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무력에 뚜렷한 한계가 있는 제갈세가가 있는 서안이 본단의 위치로 정해졌다.

남쪽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사파의 습격도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지리적 이점은 충분했다.

다만, 그렇기에 본단은 안전한 곳이라는 인식이 매우 강했다.

일전에 선검단이 습격을 받았을 때 맹 전체가 크게 충격을 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애초에 적들이 접근하기 좋은 곳이 아니었기에 방심하고 있었는데, 이렇듯 불시에 기습을 당했던 거니까.

때문에 맹의 본단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생겨났고, 형식적으로 이뤄지던 순찰과 경비도 꽤나 본격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들의 영역 순찰은 알아서 하는 데다 맹 전체의 순찰까지 돌아가면서 맡고 있었다.

빈틈을 찾기 힘든 그런 구조.

“점점 더 빡빡해지네.”

그런 맹의 한복판을 걸어가며, 주현운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들의 기세가 상당히 흉흉했다.

그도 그럴 게 사파도 꽤나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흑룡단은 단체로 실종 상태인 데다 최근 들어 강력 범죄들이 크게 늘었으니까.

실종부터 학살까지.

거의 모든 무력대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데도 무림맹에 임무 의뢰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무림학관의 학도들까지 불러들여 일을 시킬 정도로 말이니 말 다했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맞아. 빨리 가자.”

느긋한 태도로 걸어가는 주현운의 어깨를 찰싹 때린 소윤혜는 고개를 끄덕이는 문율과 함께 창천단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흑룡단이 부재중인 지금, 임시로 창천단에 소속되어 남궁선의 배려로 이렇게 셋이서 활동하고 있었다.

고작 셋이서 활동할 수 있게 허락해 준 만큼 임무의 실패란 용납될 수 없었다.

진지한 얼굴의 소윤혜를 보고 주현운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괜히 입을 더 열었다간 이번엔 손바닥이 아니라 도집이 날아올 테니까.

그렇게 주현운이 얌전히 소윤혜의 뒤를 따르던 그 순간.

“……으음?”

걸음을 멈춘 주현운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우웅!

공기가 변한다.

“……이건 또 무슨?”

한탄하는 소윤혜의 목소리에 이어 주현운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살의를 품은 영역(靈域)이라……. 훈련용은 아닌 것 같은데?”

주현운과 소윤혜가 지나가던 길 바로 옆.

그곳은 만귀단(萬鬼團)의 장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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