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454화 (454/624)

제454화

453화-숨은 악의 (3)

[소령연화(燒靈燃枠)]에 술법을 더해 거대한 화염의 원을 만들어 낸 설천위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의지에 반응한 영력이 움직여 [소령연화(燒靈燃枠)]를 실타래 삼아서 작은 원을 만들어 낸다.

순백의 화염이 뒤엉켜 만들어 낸 작은 태양이 강렬한 열기를 뿜어낸다.

가볍게 밀어내는 힘으로 날아간 구체는 단박에 건물 한 채의 반절을 날려 무너트리고, 그 건물을 장작 삼아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보통의 무인.

보통의 술사.

둘 모두에게 불가능한 압도적인 파괴의 힘.

“확실히 늘었어.”

또 다른 화염의 구체를 만들어 내며,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류귀종이라고, 손휘에게서 술법의 기초와 응용을 배웠더니 영력을 다루는 솜씨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지금 임시로 만들어서 쓰고 있는 이 기술도 예전이라면 아예 감도 잡지 못해 시도조차 못 해 봤을 거다.

괜히 이론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영력을 다루던 설천위는 앞에서 들리는 숨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오, 정신 좀 차렸나?”

“네……놈, 무슨 생각인 거냐?”

조금 전 머리에 설천위의 손이 올라왔을 때만 해도 주백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었다.

놈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팔이 녹아내린 직후에 놈의 손이 머리에 닿았는데, 어찌 죽음을 예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설천위는 돌연 건물 하나를 불태우더니 손을 뗐다.

자신을 마무리하지 않고.

대체 왜?

농락하기 위해서?

조롱하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대체 무엇을 위해서 자신을 살려 놓은 거지?

녹아내렸던 팔은 서서히 재생을 시작한 상태.

이대로 가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팔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걸 놈이 모를 리가 없는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설천위를 노려보며 주백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뭐가 어찌 됐든, 이건 기회다.

놈을 무찌르진 못하더라도 탈출할 수 있는 기회.

상대해 보니 알겠다.

지금 이 불완전한 몸으로 놈을 이기는 건 무리다.

그렇다면 탈출.

탈출해서 새롭게 준비하면 될 일이다.

기반을 잃어버리는 것이니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이미 수명을 크게 늘린 육체를 손에 넣은 상황이다.

물러나서 천천히 복구하자.

그다음, 즉 완전해진 뒤에 복수하면 될 일이다.

자고로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하지 않던가.

일단은 이 자리를 벗어나서 다음을 기약하는…….

“눈깔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비웃음과 함께 아직 재생이 끝나지 않은 주백의 팔에 검은 관이 족쇄처럼 매달렸다.

그리고.

“끄아아아악!”

뜯어낸다.

어설프게 붙었던 팔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뜯어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끔찍하게 치밀어 오르는 고통에 주백이 다시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사이.

‘꽤나 열심히 움직이네.’

설천위는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숨긴다고 숨기고 움직이고 있는 놈.

생생하게 느껴지던 영력이 갑자기 약해졌는데, 그걸 모르겠냐고.

저 멀리 있는 술사를 주시하며 설천위는 조용히 영력을 퍼트려 나갔다.

이 금릉성의 혈겁 이벤트.

메인 보스는 눈앞에 있는 주백이지만, 이 상황 자체를 만든 건 사혈천 휘하의 술사들이다.

사혈천(瀉血天).

우두머리는 악귀(惡鬼)로, 게임 후반부에 가야 나올 정도로 강력한 존재다.

주력이 되는 전력들도 대부분이 악귀이고, 실제로 악귀들의 힘이 술사들보다 더 강하다.

그렇기에 술사들 중에는 불만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고작 괴이 따위에게 사람이 지배돼서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술사들이 놀랍게도 사혈천 내부에 있었다.

보스의 강력한 힘과 존재감에 매료되어 휘하로 들어간 주제에 그 밑에 있는 악귀들의 명령을 따르는 게 불만인 자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불만은 능력에서부터 나온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뛰어나든 뛰어나지 않든 간에.

본인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불만은 터져 나온다.

‘내가 술사인데, 악귀 따위의 말을 들어야 하나?’

‘내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게 한정된 반쪽짜리 주제에 어째서 내 위에 있는 거지?’

‘하늘이 열리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봉인된 수장은 존재만으로 압도적이나, 그 힘을 실제로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의심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그렇기에 술사들은 계획을 짰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제대로 된 인간 수장을 세우자.

그걸 위해선 완전한 인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그들이 찾은 것이 바로 주백이었다.

황실 혈통에서 오는 권력.

긴 시간 성주로 살아오며 쌓은 지도력.

이 나라의 고위층으로 살아오면서 쌓은 인맥과 금력.

마지막으로 노쇠한 육체와 함께 커져 가는 삶에 대한 탐욕.

이자다.

이자를 앞세워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리라.

술사들이 원하는 것과 주백이 원하는 것이 서로 맞물려 이런 상황을 낳은 것이다.

주백은 제 핏줄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더 긴 삶을 원했고.

술사들은 제대로 된 능력을 가진 수장이 나타나 자신들을 이끌어 주길 원했다.

그런데 지금.

‘실패지.’

그것이 실패했음을 술사들은 깨달았을 터다.

주백 본인은 상황 때문에 무(武)를 포기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말 가망이 있었다면, 불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면 주백의 곁에 있던 자들이 그가 싫다고 해도 무공을 권했을 거다.

즉, 주백에겐 이렇다 할 무(武)의 재능이 없었다.

육체는 사람을 갈아 넣으면 만들 수 있다.

술법으로 재구성해 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니까.

고도로 강화한 육체라면 무재(武才)의 부족함도 충분히 메울 수 있다.

거기다 술사들의 힘으로 술법적 능력까지 갖춘다면, 설천위 같은 괴물이 탄생할 수도 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계획이 정상적으로 완성됐을 때의 이야기다.

설천위라고 자세한 내용까지 아는 건 아니었다.

설천위가 아는 것은 게임 속에서는 지금 설천강이 데리고 있는 주송유라는 여자가 마지막 퍼즐 조각이고, 그녀가 제물이 되는 것으로 의식이 완성된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니 그걸 막은 지금 주백은 불완전한 상태로 육체의 변화가 끝났고, 자신을 막기 위해 한 번 의식을 멈추기까지 했다.

설령 다시 의식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이미 형태가 잡힌 영육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부딪힐 터.

그렇다면 지금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술사들이 할 선택은 무엇인가?

간단했다.

버리는 거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노인을 제물로 해서 자신들의 활로를 찾는 거다.

애초에 충성심이나 대의 따위를 위해 모인 녀석들이 아니었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했기에 힘을 모은 녀석들.

그러니 제 살길을 찾기 위해 어제까지 함께했던 동료를 버리는 일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행할 놈들이다.

그리고.

“오호.”

지하로 내려간 술사를 중심으로 기묘한 영력의 파동이 시작된 것을 느낀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더 빠르다.

도망치려고 눈깔을 돌리고 있는 노인을 붙잡고 시간을 때운 게 십 분이 되지 않았는데, 훌륭하네.

5분 대기조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빠른 속도야.

피식 웃으며 설천위는 눈치를 보며 달려드는 노인을 멈춰 세웠다.

“여기까지 하자고.”

굳이 적들이 움직이는 걸 기다려 준 이유.

간단하다.

빼먹을 건 빼먹어야 하니까.

이쪽으로 급하게 오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큰 손해를 봤던가.

위건에게서 얻어 낸 것이라곤 소궁주들을 통제하는 방법과 전이문을 여는 방법뿐이었다.

금릉성에서 일하던 위건의 수하 중 하나가 이 혈겁에 휘말린 덕에 그런 중심에 바로 전이문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정말 천만다행이라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힘을 나눈 소궁주를 통한 전이문 생성.

확실히 뛰어난 능력이다.

힘의 소모가 꽤 크긴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고.

수하가 있다면 상대의 결계를 어느 정도 무시하고 정밀하게 전이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은 진짜 큰 이점이다.

이 무림에서 가장 필요한 기동성을 손에 넣었단 소리다.

문제는 소궁주를 만드는 법은 위건에게서 빼내지 못한 탓에 바닥에서부터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과, 그로 인해 전 중원에 뿌릴 수 있는 수하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 정도?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점점 더 익숙해지고 개량을 거치면 더 늘어날 거다.

‘오련도 잘 지배했고.’

유예린이 있는 곳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오련을 짧게 바라본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손을 뻗었다.

“이제 끝내자.”

술사를 추적하며 뿌려 놨던 영력이 설천위의 의지에 반응해 요동친다.

급격하게 흔들리는 영력의 흐름에 술사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결계의 핵심이 통째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하지만.

“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렇다고 안 먹을 건 아니거든.

주백의 몸에 깃든 영력부터 시작해 설천위는 미친 듯이 영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혼(魂)의 형태로 성을 떠돌아다니는 영력을 미친 듯이 빨아들인다.

전무후무한 신공인 [혼원패공(魂元覇功)]의 힘은 그 모든 것들을 빨아들여 설천위의 내면에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네가 할 수 있는 한계까지 받아들여 주겠다는 듯이.

미친 듯이 영력을 빨아들인다.

“네노오오옴!”

절규하는 주백의 목소리와 함께 발버둥치는 술사들의 몸부림이 느껴졌지만, 무시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영력을 흡수하는 거니까.

성과 도시 전체에 퍼져 있던 괴물들은 그 형체를 잃고 무너지고, 곳곳에 악취가 나는 살점 덩어리가 생겨난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광경이 아닐까.

“……아아.”

신(神)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땅에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주송유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신음과 함께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하늘 위에 서서 등 뒤로 새하얀 태양을 품은 존재가 사악하기 그지없는 검붉은 연기를 모조리 빨아들인다.

저 존재가 신이 아니라면, 신은 대체 얼마나 초월적인 존재인가.

감탄과 경외감에 몸을 숙인 주송유가 떨고 있을 때.

“……미쳤네.”

설천강은 솔직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진짜 솔직하게 미쳤으니까.

강해졌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진짜 예상 밖의 일인데.

거기다 들어 보니 축지 같은,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기술을 써서 이곳에 온 거라고 하지 않는가.

이건 뭐, 너무 대단해서 질투심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뿌듯한가?’

평생 동생에게서 가져 본 적 없는 감정을 느꼈으나, 이내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은 설천강은 무너지는 괴물들을 바라봤다.

이제 끝이다.

남경은 지옥이 됐지만, 이 일이 끝나면 천천히 해결해 나가면 된다.

산 사람은 분명히 있을 테고, 살아 있는 이들이 있다면 분명 사람 사는 풍경이 다시 돌아올 테니까.

안도와 함께 검을 쥔 손에 힘을 풀려던 그 순간.

설천강은 느꼈다.

묘하게 익숙한 악의(惡意)를.

어디선가 느껴 본 것 같은.

더럽고 악취가 나는 악의.

그것이…….

“천위야!!”

설천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단숨에 땅을 박찬 설천강이 허공으로 손을 뻗는다.

검붉은 연기 속에 섞인 무언가를 향해.

그리고.

[후후후, 늦었단다. 멍멍아.]

불과 조금 전 술사의 결계를 부수는 순간에 들었던 목소리와 함께 손에서 검은 형체가 빠져나간다.

막을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설천강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이미 늦었어.]

설천강의 검보다 빠르게 도착한 유예린조차 지나친 검은 연기가 도시 전체의 영력을 빨아들이던 설천위에게 적중했다.

[천위, 우리 천위야!]

환희로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우리 함께 놀 시간이란다!]

설천위의 태양이 검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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