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3화
452화-숨은 악의 (2)
사내의 심장을 꿰뚫은 검은 봉을 타고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그러나 그 피를 보면서도 설천위는 담담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안 통하는 거 아는데, 연기를 하긴.”
피식 웃으며 봉을 붙잡은 설천위는 사내의 옆구리 쪽으로 뜯어내듯 거칠게 봉을 뽑아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턱을 노리고 파고드는 검붉은 무언가를 왼손으로 받아 낸다.
“술사 놈들은 하나같이 전투 실력이 조잡해.”
치열함이 없어, 치열함이.
이런 조잡한 유도에 당할 리가 없잖아.
수정처럼 반투명한 송곳.
원뿔 형태의 송곳의 끝은 날카롭기 그지없었지만, 안타깝게도 닿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네놈…….”
휘청거리며 물러난 사내가 이를 악물고 두 눈을 부릅떴다.
전투에 익숙한 움직임.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영역으로 단숨에 넘어올 수 있을 정도의 전이문.
거기다 검은색 형체를 만들어 내는 능력.
“설천위냐……?”
믿기 힘들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한 건 지금 소문이 자자한 설천위밖에 없으니까.
설천위가 전이문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처음 들어 보는 정보에다 믿기도 힘든 일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놈들이 자신을 방해할 리가 없었다.
연옥을 여는 건, 즉 하늘을 향한 길을 뚫는 건 놈들이 가장 바라는 일임과 동시에 시작점이다.
아무리 자신을 견제하고 싶어도 이렇게 계획 자체를 어그러트리는 일만큼은 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
이것을 어길 만한 미친것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렇게까지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고.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사내는 이를 악물고 영력을 끌어올렸다.
상대가 설천위라면, 위험하다.
그 언여휘조차 인정할 정도의 탁월한 술법적 재능을 가진 자다.
전이문이라는 초고등 술법으로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했으니 그를 경계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거기다 술사들에겐 거의 없는 무력까지.
‘이대로 가면 모든 게 망가진다……!’
지금 이곳에 있는 실패작들로는 그를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자꾸 눈깔 돌릴래?”
사내가 술법을 펼치는 그 순간.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사내의 목이 돌아갔다.
본능.
예상치 못한 외부의 자극으로 확인을 위해 시선이 가면서 이뤄진 자연스러운 동작.
그 동작이 끝나는 순간.
“커헉!”
설천위의 손이 사내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말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도록.
단숨에 목을 꿰뚫고 지나간 손을 뽑아내며 설천위는 가볍게 혀를 찼다.
“더럽게 질기네.”
강기를 둘러야 뚫을 수 있는 몸이라니.
철백이 부럽지 않은 강도네.
“강시라는 게 돈이 꽤 들지 않나?”
“…….”
목을 꿰뚫어 놓고 질문을 던지는 설천위의 모습에 사내의 눈에는 어이없어하는 감정이 깃들었지만, 설천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인형에게 던진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영감?”
거슬리는 사내를 발로 차 버리고 고개를 돌려 노인이 들어가 있는 연못을 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물주인 당신이 더 잘 알 것 같은데?”
비틀린 조소에 반응이라도 하듯, 눈썹이 꿈틀거린 노인은 이내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네놈은 누구냐?”
“아까 대화 못 들었어? 설천위라고 하는 사람이야.”
“무림맹의 흑룡단주인가?”
“알면서도 모른 척하기는. 하긴 너구리 같은 영감들이 다 그렇지 뭐.”
어깨를 으쓱이곤 시선을 돌린 설천위는 유예린의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용케 아직까지 지키고 있었네.”
설천위는 여무인의 뒤에서 떨고 있는, 처음 보는 여인을 바라봤다.
강소성 성주의 손녀.
주송유.
이 계획의 핵심.
초절정밖에 되지 않는 설천강이 대체 어떻게 주송유를 지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시간을 끌어서 이렇게 상황이 만들어졌다.
“주책이 심하네, 주백.”
“무엄하구나.”
피의 무게로도, 나이의 무게로도 이쪽이 훨씬 위거늘.
반말을 뱉으며 자신을 비웃는 설천위를 향해 주백이 눈을 부라렸지만,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다 늙어서 추한 욕심을 부리는 노인이 뭐래.”
콰득!
스멀스멀 기어가는 사내의 몸 위로 기둥을 떨어트린 설천위는 흑도를 만들어 냈다.
“추악한 냄새가 너무 심해서 피 냄새도 못 맡을 것 같은 수준이야.”
흑도로 노인을 겨눈 설천위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장례 정도는 화끈하게 치러 주지.”
화르르르륵!
설천위의 흑도를 타고 솟아오르는 순백의 화염.
패기와 살의를 싣지 않은, 순수한 소령(燒靈)의 화염이 흑도를 하얗게 물들였다.
“목을 베고, 시체는 이 성과 함께 태워 주마.”
“……역모로구나!”
설천위의 도발에 두 눈을 부릅뜬 주백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촤악!
거대한 육체가 연못을 빠져나오며,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검붉은 피가 중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쏟아져 내리며 노인의 육체가 드러난다.
“하, 할아버지?”
당황한 주송유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설천위는 무시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목소리에 반응할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게 맞을 거다.
“워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압도적인 육체.
“젊은 시절엔 일과 정치에 치여 무(武)를 포기했었지.”
업무는 많았고, 무력은 쌓아 올리면 의심의 눈초리가 바로 날아왔다.
살기 위해서 숨을 죽이고 하고 싶었던 일은 전부 포기했다.
무공이 그것이다.
늙어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니, 그것이 한이 됐다.
그때 찾아온 것이 그들이다.
젊은 시절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우월한 신체를 약속하겠노라.
불끈!
꿈틀거리는 근육의 맥동을 느끼며 주백은 이젠 가슴께밖에 내려오지 않는 수염을 쓸었다.
가볍게 털어내듯 핏물을 뽑아낸다.
붉게 물들었던 수염은 하얀색으로 변해 멋을 품고.
“이제는 그것을 되찾은 것뿐이다.”
당당하게 주먹을 불끈 쥐는 주백의 모습에 설천위는 헛웃음을 흘렸다.
“되찾기는 개뿔, 방댕이에 주사를 얼마나 맞은 거야.”
키는 거의 230cm는 될 것 같았고, 근육은 무슨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수문장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더했다.
그 크기가 압도적인 건 물론이고, 근육의 선명도가 말이 안 될 정도로 뚜렷했다.
자고로 큰 신장을 가진 사람이 근육을 과하게 붙이면 지방도 함께 붙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노인의 육체는 철백이 경지를 뛰어넘어도 저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근육의 비율을 보이고 있었다.
게임에서 보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위압감이 장난 아닌데.
뿌득!
주백이 움켜쥔 주먹을 풀면서 어깨와 목을 비트는 것만으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완성이 덜 됐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할 터.”
그그그그긍!
마치 금속으로 만든 기관을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주백이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자세를 크게 낮췄음에도 설천위와 거의 눈높이가 맞는 수준.
자세를 완전히 낮춘 주백은 허탈하게 웃고 있는 설천위를 보며 근육을 쥐어짰다.
“그 골통을 부수고, 이 의식을 끝내도록 하지.”
쾅!!
굉음과 함께 주백의 몸이 쏘아진다.
직선적이고 과격한 움직임.
멋이라곤 없는, 단순한 공격.
하지만, 그렇기에 매우 파괴적이었다.
공기를 가르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주백.
단숨에 설천위의 품 안으로 파고든 주백은 허리를 비틀며 주먹을 날렸다.
회전을 더한, 단순하면서도 파괴적인 공격.
그 속도 또한 상식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상태다.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그 머리가 단번에 으깨어지리라.
그리 자신한 주백의 주먹이 설천위에게 닿으려는 그 순간.
“하수 주제에 뭐 하는 거야?”
흑도로 가볍게 주먹을 흘려낸 설천위의 두 눈이 주백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어딜 약으로 펌핑 한 놈이 피똥 싸면서 수련한 사람한테 개기냐?
* * *
“빌어먹을!”
금릉성의 깊은 곳.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친 사내는 벌떡 일어났다.
“그 괴물 놈이 대체 여길 어떻게……!”
전이문이라니.
백 년을 넘게 산 괴물 중에서도 쓸 수 있는 존재가 드문 초고등 술법이 아닌가.
그걸 이제 스물을 조금 넘긴 애송이가 쓴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앞으로 몇 년 더 지나면 진짜 그 괴물을 절대 막을 수 없게 된다.
생각해 보라. 지금도 전이문을 쓰고 각 세력의 주력급 전력을 밥 먹듯이 처리하는 괴물인데, 이대로 시간이 더 주어지면 어찌 되겠는가?
웬만한 술사는 놈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게 뻔했다.
술법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도 힘들 텐데, 상대는 무려 화경급의 무림 고수다.
상대가 될 리가 있나.
반대도 마찬가지.
경계를 뛰어넘어 사람조차 해칠 수 있는 술법을 다룰 수 있으니 같은 화경급 고수라면 상대도 되지 않으리라.
“빌어먹을!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는데!”
음지의 수장들을 봉인하고 있는 힘이 점점 더 약해지고 있는 지금, 이번 기회에 힘을 손에 넣지 못하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옛날, 제천대성이 혈패황을 처리하면서 이 무림에 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음지의 수장급 대부분을 봉인했었다.
당시 무림은 혈교든 사혈천이든 일어나기만 하면 전부 쓸려 나갈 정도로 약해진 상태였으니까.
다만, 혈패황에게 꽤나 많은 힘을 쓴 제천대성의 봉인은 수백 년이 흐른 지금, 확실하게 약해져 수장급들이 그 봉인에서 벗어날 날이 머지않았다.
그들이 깨어나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연옥과의 길이 열리는 건 순식간이고, 하늘이 열리는 것도 머지않은 미래가 될 터.
그 혼란 속에서 한 자리 확실하게 차지하려면 지금 그 수장급에 버금가는 힘을 쌓는 것이 필수적인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그 계획을 설천위라는 미꾸라지 한 놈이 전부 어그러트렸다.
이대로 흘러가면 주백의 육체는 불완전하게 마무리되고 자신들의 소원도 이뤄지지 못한다.
“방법……. 방법을 찾아야 한다!”
주백의 육체를 완성시키고, 자신들의 안위까지 보장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다급해진 사내가 방 안을 서성이며 고민에 빠진 순간.
쿵!!
“어억!”
사내가 휘청거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 방을 흔들었다.
아니, 이 진동은……!
다급하게 창문 쪽으로 다가간 사내는 숨을 들이켰다.
의식적으로 숨을 쉬지 않으면, 위압감에 짓눌려 이대로 숨이 멎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창밖.
분명 술법으로 만들어 낸 연기와 구름으로 해를 가리고 음기를 활성화시켰던 금릉성과 도시인데.
“괴, 괴물……!”
그 모든 것을 뚫고 떠오른 하얀 태양이 성과 도시 전체로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그런 태양을 향해 달려드는 주백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 뒷모습이 어찌나 초라한지 우람한 노인의 육체가 본래의 앙상한 몸처럼 보이는 착각마저 일었다.
금릉성의 하늘.
압도적인 빛을 뿜어내며 허공에 떠오른 설천위의 도가 주백을 갈라낸다.
과연 무(武)에 재능이 있었던 주백답다고 해야 하나.
그새 혈기(血氣)를 다루는 법을 익힌 것인지 붉은 기운을 팔에 두른 주백이 그 일격을 받아 냈다.
막아 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끄아아아아아!!”
타오르는 화염에 팔이 녹아내린 주백이 괴성을 내질렀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주백.
그 모습에 사내는 미간을 찡그렸다.
전투 중에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다니.
아무리 평범한 삶을 살아온 노인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사내가 미간을 찡그린 사이, 어느새 쏘아진 설천위의 흑도가 주백의 어깨를 꿰뚫고 그대로 솟구쳐 올랐다.
단숨에 노인을 자신의 눈높이까지 끌어올린 설천위는 그대로 노인의 머리에 손을 올리곤 반대쪽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내는 아까 느꼈던 진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괴물 놈……!”
설천위의 손에 피어오른 거대한 화염의 구체.
순백으로 불타오르는 그 구체는 웬만한 성인 남성의 상체만 했는데, 그 안에 담긴 힘은 혀를 절로 내두를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강기(罡氣)에 수많은 술법적 보조가 들어간 기술.
화염의 구체가 금릉성에 있는 전각 중 하나로 날아가고.
콰아아아앙!!
강렬한 폭음과 함께 땅이 크게 흔들렸다.
압도적인 충격.
그리고.
“싹 다 불태워 줄게. 너도, 이 노인도, 이 성까지도.”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고 있는 설천위의 미소.
겨우 모습이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내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시, 실패했……!’
후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강렬한 충격과 폭음이 다시 한번 바닥을 뒤흔드는 순간.
창문에 겨우 걸쳐 있던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겨우 건물을 빠져나오고 있는 무리.
그 안에 끼어 있는 주송유.
‘……마지막 기회다!’
이를 악물고 일어난 사내는 즉각 부적을 꺼냈다.
저 말도 안 되는 괴물을 향한 최후의 발악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