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2화
451화-숨은 악의 (1)
설천강의 소식을 접하고, 설천위는 유예린에게 짐 싸는 일을 맡긴 채 수련실로 들어갔다.
명상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으로, 외부의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곳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후우.”
가볍게 숨을 고른 설천위는 즉시 내면세계로 돌입했다.
의식이 빠르게 가라앉아 깊은 심해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과 함께.
“오셨네요.”
맑은 목소리가 설천위를 반겼다.
천천히 눈을 뜨니, 해맑게 웃고 있는 청아가 손을 흔들었다.
“준비는 끝났어요.”
“잘했어.”
에헴, 하고 허리춤에 손을 올린 청아는 당당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그런 청아의 뒤를 따라 걷기를 잠시.
공간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 설천위는 목표하던 곳에 도착했다.
거대한 벽이 세워진 공간.
양옆으로 뻗은 벽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은 어르신들이 관리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라면 믿을 만하지.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성큼성큼 걸어서 거대한 벽에 있는 유일한 문에 다가갔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로 작은 문.
이 거대한 성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문이었지만, 설천위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훅 하고 올라오는 열기.
동시에.
“끄아아아아아악!”
“죽여! 죽이라고!!”
비명과 괴성이 터져 나온다.
사지 중 한 곳이 말뚝에 박혀 땅에 고정된 이들이 타오르는 백색의 불길 속에서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우는 사람, 비는 사람, 욕하는 사람.
다양하기 그지없는 반응을 보이는 인간들 속에서 설천위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었다.
그가 걸어가기 시작하자, 그의 정체를 깨달은 이들이 손을 뻗었다.
“제발! 제발 그만……!”
“크아아아아! 죽여 버리겠다!!”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사이를 걸으면서 설천위는 괴성을 지르는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건 청아도 마찬가지.
마치 익숙하다는 듯 지옥을 재현해 놓은 듯한 공간을 지나간다.
그렇게 지옥과 같은 공간이 끝나고.
“아직도 버티고 있나, 위건?”
설천위는 드디어 목적했던 곳에 도착했다.
거대한 십자가에 매달린 존재를 보며, 설천위는 그 앞에 서 있는 이들의 옆에 섰다.
천마 할배는 없었다.
소백진과 손휘, 현태중이 서 있었다.
위건을 찌르던 검을 뽑아낸 현태중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벌써 올 때는 아닐 텐데.”
아직 심리적으로 많이 몰아붙인 상태가 아니었다.
상대는 꽤나 높은 격까지 도달했던 존재.
단기간에 휘어잡아 휘하로 부리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이런 설득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황이 변했어요.”
“……상황이?”
미간을 찡그리는 현태중과 다른 이들에게 빠르게 상황을 설명한 설천위는 흑도(黑刀)를 꺼내 위건의 어깨에 꽂아 넣었다.
“위건.”
“……흐.”
“대답하기 싫다면, 듣기만 해도 좋다.”
또 다른 손에 만들어 낸 흑도를 반대쪽 어깨에 박아 넣고, 설천위는 또다시 흑도를 만들어 냈다.
“선택지를 주마.”
“……꺼져라.”
설천위의 말에 대화를 이어 나갈 가치도 없다며 위건은 마른 입술로 설천위를 비웃었다.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설천위 따위에게 굴복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인간은 죽는다.
설천위가 인외의 길을 걷는 게 아니라면 자신은 언젠가 해방된다.
‘그 괴물의 힘이라고 해도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는 명확하다.’
이 안에서 길어 봤자 백 년, 짧으면 몇 년 정도만 버티면 된다.
그놈들이 움직이면, 설령 이 괴물 같은 놈이라고 해도 힘에 부칠 테니까.
굴복해서 혼이 꺾이면 이놈이 죽어도 해방될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이를 악문 위건이 설천위를 노려보는 그 순간.
흑도를 위건의 허벅지에 박아 넣은 설천위는 웃으며 그 도의 손잡이를 두들겼다.
“첫 번째 선택지, 나한테 굴복하고 힘을 빌려준다. 뭐, 이건 당연하지. 그러려고 너를 이렇게 붙잡아 두고 있는 거니까.”
“헛꿈을 꾸는군.”
“뭐, 그렇게 나올 거란 생각은 했지.”
손휘도 꺾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나름 거래도 했고.
그래서 위건도 천천히 시간을 들여 밑에 둘 생각이었지만…….
“너에겐 안타깝지만, 상황이 썩 좋지 못하게 됐어.”
“흥.”
“네가 가진 힘이 필요하게 됐단 말이지.”
사실 위건에게선 많은 것을 뽑아낼 생각이었다.
독과 환술에 관한 지식부터 결계나 소궁주를 만드는 방법, 황궁에 관한 정보, 음지에 숨어 있는 놈들에 대한 것까지.
궁금한 게 아주 많았다.
천천히 제압한 뒤에 그 모든 것을 얻어 낼 생각이었다.
죽자마자 백수아의 몸에 기생해 버린 무능한 손휘에게선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얻고자 했다.
다만.
그건 모두 여유가 있을 때 챙길 수 있는 욕심이었다.
모두를 챙길 수 없는 상황이 됐으니, 어쩔 수 없지.
“두 번째 선택지, 이대로 반항하다가 몇 가지 정도만 빨리고 소멸한다. 뭐가 좋지?”
“흥, 네깟 놈이 그런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아무리 뛰어난 술사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혼의 격을 높이 쌓아 올린 존재는 외부의 개입으로는 쉽게 무너트릴 수 없다.
고작 이런 조잡한 협박 따위에 자신이 굴할 리가 없지 않은가.
반항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위건을 보며 설천위는 아쉬운 한숨을 내뱉었다.
“거, 순순히 넘어오면 좋을 텐데 꼭 이렇게 반항을 해요.”
새롭게 만들어 낸 흑도를 아직 비어 있는 허벅지에 찔러 넣은 설천위는 반걸음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뭐, 어쩔 수 없지. 탐이 나긴 하지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두 가지밖에 없으니까.”
육도(六道)라는 게임을 할 때 가장 희귀하면서 가장 필요한 능력은 뭘까?
답은 간단하다.
공간이동.
이 더럽게 넓은 대륙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
그게 바로 육도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지금 황궁에서 일이 터졌다고 한다면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야말로 한세월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적은 강해지고, 아예 돌파가 불가능해지는 경우도 많다.
육도(六道)에서 연옥이 열리는 것을 완전히 막는 게 불가능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판타지처럼 공간이동이 흔한 게 아니니까.
거기다 조금 있는 공간이동도 효율이 박살 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흔히 축지(縮地)라고 부르는 술법이 유저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동의 전부라고 보면 되는데.
축지(縮地)란 말 그대로 땅을 줄이는 술법이다.
즉, 공간을 뛰어넘는 게 아니라 공간을 줄여 이동 거리를 줄이는 형태의 술법이다.
그래서 진짜 뛰어난 술사라도 이동에 드는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는 정도가 고작이다.
어중간한 술사는 그보다 이동 속도가 더 늘어나는 수준이고.
거기다 연비가 완전히 박살 난 기술이기도 하다.
소모되는 영력과 체력은 말할 것도 없고, 내공도 미친 듯이 잡아먹는, 그야말로 계륵 같은 스킬.
그래서 아예 이동 시간은 튼튼한 무인의 다리로 줄이고, 최대한 전력을 투입해 전투를 빠르게 끝내는 것을 메인으로 잡는 유저들이 많다.
축지의 성능과 효율이 꽝이니, 이동 시간을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조잡한 기술이 아닌 것이 정말 놀랍게도 존재했다.
게임 속에선 상대편 적들이 썼던 기술.
그리고 이곳에선 위건이 썼던 기술.
“조건은 좀 까다롭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게 어디야?”
십자가에 매달린 위건의 배에 손을 올린 설천위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전이문 생성. 어떻게 하는지 한번 들어나 볼까?”
* * *
설천위의 짐을 싼 유예린은 그의 짐을 들고 연무장에 도착했다.
연무장에 도착하니, 짐을 싸 놓은 이들이 보였다.
흑룡단 전원.
목숨을 건 임무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원이 짐을 싸서 나와 있었다.
뿌듯하면서도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속도가 중요한 이번 임무엔 이들 전원을 데려갈 수 없으니까.
심지어.
“……후우.”
떨리는 손으로 이를 악물고 있는 여웅.
그녀도 데려갈 수 없었다.
그녀가 뛰어난 무인인 건 맞지만, 본격적으로 질주하는 북존을 따라갈 능력은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것에 적응한 설가의 무력대나, 거의 벽을 넘기 직전인 대주급들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신법에 특화된 대원들이야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여웅은 아니었다.
현실이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명확하다.
여웅에게 안 된다고 말하기 힘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써지는 입안의 침을 삼키며, 유예린이 단상 위에 올라서려는 순간.
“유 매, 여웅, 이쪽으로.”
설천위가 그녀들을 불렀다.
하던 것을 멈춘 유예린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 설천위에게로 걸어갔다.
자신에게 짐을 싸 달라고 부탁하고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뭔가 계획이 있어서 부르는 것일 터.
여웅을 따로 부르는 건 역시…….
씁쓸한 생각에 안타까움을 삼키며 유예린이 설천위의 앞에 선 순간.
“우리 셋은 바로 남경으로 향한다.”
“……아버님과 함께 움직이지 않고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아버님의 속도라면 굳이 따로 가지 않아도 금세 추월당할 것 같은데.
자신과 설천위 둘만 가는 거라면 몰라도 여웅까지 함께 가면…….
유예린이 말을 아끼는 그 순간, 설천위가 세 개의 손가락을 펼쳤다.
“사흘. 우리는 사흘 안에 남경에 도착한다.”
* * *
철벅.
질척이는 피와 살점을 밟으며, 유예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진짜 되는군요.’
고작 사흘.
그것도 실제 이동 시간 자체는 거의 없었다.
설천위가 만들어 낸 검붉은 문을 지나니 낯선 곳에 떨어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유예린과 여웅이 당황한 사이, 설천위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명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반나절을 휴식하고 나서 다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것을 사흘 동안 반복했을 뿐인데.
“……정말 남경에 도착할 줄이야.”
역겨울 정도로 짙은 피 냄새 속에서 유예린은 즉시 움직였다.
설천위가 한 번 정리하긴 했지만, 술사가 뿌린 괴물의 씨앗은 여전히 바닥에서부터 그 흉물스러운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단숨에 이동한 유예린은 설천강의 부하들 앞에 서서 괴물들을 막아 냈다.
그리고.
“여 소저!”
“제가 막을 테니 몸을 추스르세요!”
설천강의 앞은 여웅이 막아섰다.
덕분에 여유가 생긴 설천강이 자세를 다잡는 사이.
“누, 누구냐, 네놈!”
뒤늦게 상황 파악이 끝난 사내가 설천위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빠르게 움직이는 동료들의 모습에 흡족해하던 설천위는 사내의 외침에 고개를 돌려 히죽 웃었다.
“널 막을 사람?”
비웃음과 함께 뻗어 나간 영력이 순식간에 사방을 잠식해 나간다.
그리고.
“오련.”
“예.”
설천위의 그림자에서 나타나 무릎을 꿇은 오련의 머리 위로 설천위의 손이 올라갔다.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천위는 오련에게 영력을 때려 박았다.
잠시나마 북존의 공격을 견뎌 낼 수 있을 정도의 강함을 지닌 그녀에게.
“전부 때려 부숴.”
파괴를 명령했다.
“명을 받듭니다.”
고개를 숙인 오련의 도에는 설천위가 사용하는 것 같은 시커먼 화염이 깃들어 지하에 널브러진 살점을 태우기 시작했다.
“감히!”
그 광경에 즉시 반응한 사내가 손을 휘두르자, 비어 있던 피의 연못이 솟아올랐다.
피를 쏟아 내며 연못에서 빠져나오는 존재들.
“놈들을 쳐라!”
붉은 피부, 백색의 눈동자, 목에 감긴 부적.
“혈위강시였던가?”
“어디서 보낸 놈이냐! 감히 이런 식의 방해를 하다니!”
강시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설천위의 말에 분노한 사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연옥을 연다는 공통의 목적 아래 최소한의 협력은 암묵적인 규칙.
감히 이딴 식으로 훼방을 놓다니……!
솟구치는 화염 속에서 술식이 망가져 가는 것을 깨달은 사내가 분노를 토해 내려는 순간.
“커헉!”
“방심을 뭐 그렇게 대놓고 하냐?”
설천위가 만들어 낸 흑관이 사내의 심장을 꿰뚫었다.